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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0. 9. 월요일 [교회개혁 미루다간 공멸한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0. 11. 06:02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0. 9. 월요일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7)


미루다간 공멸한다.

목사고시를 볼 때 면접을 하시는 목사님께서 "김 전도사는 앞으로 목사가 되면 보수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할 것인가?"하고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이 요구하는 정답(?)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보수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하겠다고 대답함으로 무사히 합격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수와 자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없다면 자유도 없고, 자유가 없다면 보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새 포도주 비유에서, 새 부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새 포도주를 담아둘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를 담아 두는 것을 진리의 보수라고 정의한다면, 새 부대는 의식(意識)과 제도( 制度)의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새 부대는 자유를 의미한다. 담아 두어 오랫 동안 보관해야 할 새 포도주는 보수를 의미한다. 포도주를 보수한다고 부대까지 보수하면 안 된다. 그러면 그 부대가 낡아져서 결국 터지게 되고 포도주를 쏟게 되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포도주의 보수가 아니라 부대와 자루의 보수 같아 보인다. 진리의 보수를 내 세우지만 결국은 자기의 자리와 기득권의 보수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원로, 공로와 같이 성경적이지도 않은 자리에 연연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보수주의는 과연 무엇을 위한 보수주의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사실 점검해 볼 것도 없다. 그것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욕보이는 짓이다. 보수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유해야 할 의식의 보수인가, 주님을 위하여 흔쾌히 내어 놓아야 할 자리의 보수인가를 스스로 비판해 보아야만 한다. 의식과 자리와 자신의 기득권은 진리의 보수를 위해 바꾸고, 버리고, 떠나야 할 부대임으로 늘 자유해야 한다.

낡은 의식과 제도의 옷을 벗자.

한국 교회는 의식의 보수를 탈피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대가 바뀌고 교회의 크기가 바뀌면 당연히 따라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 의식과 제도이다. 의식과 제도는 자유롭게 늘 바뀌어야만 진리를 보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낙후된 의식과 제도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신발고 옷을 바꾸어 주어야만 한다. 아이들은 자라는데 계속 어렸을 때의 옷과 신발을 입게하고 신게 한다면 아이들의 몸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는 아이의 발은 옛날 전족(纏足)을 한 중국 여인들처럼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
왜 변하려고 하지 않는가?)

교회가 성장하면서 목사 장로의 기득권이 커졌기 때문이다.

옛날 교회가 작고 힘들었을 때 목사와 장로의 자리들은 한결같이 다 십자가를 지는 자리였었다. 목사의 자리가 그러했고 장로의 자리도 그러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목사, 장로가 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학대학은 거의 언제나 미달이었고, 교회의 장로 선거도 지금과 같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신학대학도 몇 대 일의 경쟁율을 보이고 있고, 장로 선거도 세상 선거 못지 않게 과열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면서 예전에 십자가였던 자리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면류관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힘과 권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목사가 되려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은 기본으로 각오해야만 했었다. 그것은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교회 살림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으니 지금처럼 서로 장로가 되겠다고 다툴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요즘도 그때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교회들이 남아 있지만 적지 않은 교회들은 형편이 좋아졌다. 대형교회의 형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좋아졌다. 교회재정이 넉넉해 지면서 그것은 관리하고 지배하는 목사와 장로의 권한이 은연 중에 커져가게 되었다.

교회와 교회의 재정이 작았을 때 그래서 그것이 권한과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고 십자가였을 때 그것을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어 할 수 없었다. 정책과 예산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는 모든 일을 다 목사와 장로가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었고 면류관이 아니라 십자가였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제도와 조직이 자연스럽게 목사와 장로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책임에서 권한, 십자가에서 면류관으로 바뀌었다.

책임은 져야하고 권한과 권력은 내려놓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책임은 내려놓고 권력과 권한은 걸머지려 한다.
(
요즘 아들 세습을 끈질기게 고집하는 어느 대형교회의 원로목사는 아들에게 그 큰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려는 것을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양심불량이다.)

목사와 장로의 권한의 개혁이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의 적당하고도 적절한 권한과 정당한 권력까지 부인하면 안 된다. 그것까지 부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나친 권한과 권력을 내려 놓자는 것이다. 그것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부대를 좀 바꾸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정말 말씀과 신앙과 진리를 보수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너무 부정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목사가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교주처럼 목회를 하는(pastor's church) 이거나 아니면 장로들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교회 (elder's church)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벼랑 끝에 선 교회와 같아 보인다. 더 미루다간 다 죽고 만다. 공멸한다.

(
생사를 건 교회개혁 30페이지에서 37페이지 상까지)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메모 : 교회개혁 미루다간 공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