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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0. 21. 토요일 [어머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0. 22. 04:32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0. 21. 토요일


어머니.


1.
어머니는 1920년생이시다.
우리 나이로 98.
몇 년 전부터 일 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하셔야만 하셔서
우리 교회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우리 장로님과 권사님이 아들과 며느리처럼 우리 어머니를 모셔 주셨다.
장로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생명이 얼마 남지 못하실 것 같다는 말씀을 들었다.
어제 필리핀에서 귀국하는 길로 병원엘 갔고 둘째 아들 부부와 셋째 아들 부부 그리고 손주들이 다 함께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어제 밤에는 세종시에 있는 큰 아들네 가족이 올라와 오늘 오후 할머니를 뵐 예정이다.

2.
그냥 병원에서 하루 하루 연명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일이 없는 삶을 어머니는 참 힘들어 하셨다.
'
사는 게 지루하다. 빨리 하나님께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참 미안하고 안스러웠었다.
이제 드디어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시던 하나님 나라에 가시는가 보다.

3.
우리 아버지는 학교 수위셨다.
한 달 봉급으로 쌀 한 가마 반을 살 수 있는 돈을 받으셨다.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30만 원 정도.
어머니는 그 돈으로 살림을 참 야무지게 하셨다.
친정의 외삼촌들은 참 부자셨고
동생과 누나였던 우리 어머니를 끔찍이 아끼셔서 어떻게든지 도와주려 하셨지만
어머니는 정말 다급한 일이 아니면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계셨다. 감사하게도 그게 우리 집안의 DNA가 되었다.

4.
어머니는 당신의 가난을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인 나에게까지 대물림하고 싶지 않으셨다. 그 코딱지만한 돈을 아끼고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65년 내가 중 3이었을 때 회기동에 집을 샀다. 50만 원을 주고. 외삼촌 두 분이 많이 도와 주셨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8대 불가사이라고 생각한다.

100
평 땅에 방이 일곱 인 큰 집이었다.
땅은 문화재 관리국 땅이어서 집과 나중에 땅을 불하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살 것이었다. 안 방 하나만 쓰고 6개의 방에 하숙생을 들여 내가 결혼하기 전 해까지 식모처럼 사셨다. 그렇게 해서 나를 먹이시고 공부시키시고 결국은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땅을 불하 받아 온전한 집을 만들어 나에게 상속해 주셨다.

그 집을 팔아 중화동에 집을 샀고 그 집을 팔아 용인에 땅을 샀고 그 땅을 팔아 몇 년 전 피피엘 재단을 세웠다. 그러므로 피피엘 재단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땀으로 세워진 재단이라 할 수 있다.
김상백, 최윤희 기념재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재단 명패에 그렇게 써서 붙여야겠다.

5.
아들이 목사가 되고
제법 큰 교회의 목사가 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위 유명한 목사가 되고
이 나라 저 나라 비행기타고 분주히 다니는 내가 어머니는 늘 자랑스러우셨다.

손주들이
박사도 되고
감독도 되고
목사도 된 것이 자랑스러워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자랑 하셨다.
그게 낙이셨다.
그러시면서 평생의 고생을 잊으셨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7.
어머니,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단한 삶 이제 정리하시고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셨던 하나님 나라로 가세요.

저와
제 아이들과
제 손주들의 이 안정되고 넉넉하고 편안한 삶 속에 어머니의 수고와 고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평생 잊지 않고 고마워하며 살겠습니다.

무뚝뚝하여 평생 입으로 어머니께 드리지 못했던 말.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숨쉼이
고통스럽지 않으시길
힘드지 않으시길
그냥 주무시다 편히 가실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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