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퇴근길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달이 참 밝았습니다. 천천히 집으로 올라가는데 간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길고양이의 서성거림이 보였고 골목길의 담벼락에는 고운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요즘 담은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담이 대개 낮아서 집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였는데 요즘 담들은 너무 높아서 그 안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저는 지금 15년째 조그마한 잔디밭이 있는 2층 주택에 살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옆집과는 형님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 옆집의 옆집과는 겨우 눈인사만 나눌 뿐 한 번도 속 깊은 정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에 이웃집 사람들이 몇 번씩 바뀌기도 했지만 각자의 삶이 너무나 바빠서 서로 간섭하고 서로 관심가질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서로 서먹서먹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젯밤에는 달빛이 하도 고와서 밤은 깊었지만 아내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몇 달째 둘 다 너무나 바빠서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고 그러다 보니 둘이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다운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대화를 겸한 산책을 하였습니다. 서로의 관계에서 대화는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우리 부부는 애들 얘기도 하고 옛날 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월세로 단칸방에서 살던 신혼 때의 얘기도 하고 거기서 큰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낳고 키우던 옛날 얘기도 했습니다. 26년 전에 우리 부부가 살던 신혼집은 중앙여고에서 여수시립도서관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접어드는 좁은 골목길이 나오는데 그 어귀에는 전봇대 하나가 서 있었고 그 전봇대에는 '소변금지'라는 푯말이 화를 내면서 붙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늘 오줌 지린내가 났었고 버려진 연탄재도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우리집에 가려면 그 골목길을 따라 쭉 올라가야 했는데 가다보면 오래된 공동우물 하나가 나왔고, 그 우물을 지나면 좁은 논둑길이 나오는데 그 논둑길의 끝에 우리 부부가 우리집이라 불렀던 허름한 집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 집의 녹슨 철 대문을 밀면 “끼이~익”하는 금속음이 들렸고 그 문을 안으로 밀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주인집이 보였고 우리 부부가 살던 단칸방은 주인이 살던 안집과 옆집의 담벼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야 했습니다.
우리 신혼집은 방 하나와 부엌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월세집인데 합판으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 나왔고, 그 부엌에는 찬장 하나가 벽에 걸려있었는데 그 안에는 반찬 그릇 몇 개와 밥그릇 몇 개가 가지런히 엎어져 있었습니다.
그 방문 앞에는 연탄아궁이가 있었고 그 옆에는 검은 연탄이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연탄아궁이에서 우리는 날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그 연탄불 옆에 운동화와 양말도 말렸습니다.
그 부엌에 신발을 벗어 놓고 미닫이문을 드르륵 하고 열면 두 평 반쯤 되는 단칸방이 나왔는데 그 방이 바로 우리 부부의 신혼 보금자리였습니다. 볼품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방에는 책상 하나와 천으로 만든 조립식 옷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 아내가 큰 장농을 가져 오고 싶어했는데 곧 큰 집으로 이사를 갈 것이니 그냥 내가 사용하고 있던 옷장을 그대로 사용하자고 아내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옷장 옆에는 낡은 기타 하나가 벽에 비스듬이 기대어 있었습니다. 가끔은 그 기타로 "낙엽지던 그 숲속에 파아란 바닷가에... 하며 7080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불러주면 아내는 김광석이보다 내가 더 노래를 잘한다고 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 방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전축도 없었습니다. 오직 작은 라디오 하나가 밤마다 문명사회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처럼 달이 무척이나 밝은 날에는 둘이서 나란히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 대해 얘기를 하기도 했고 달을 보면서 우리 부부의 미래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집 앞에 있는 논에서는 논개구리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만큼 우리부부가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집도 2층집이고 텔레비전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김치냉장고도 있고 냉동고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정원도 있고 자식도 둘이나 있고 먹을 것도 많고 사업체도 있고, 종업원들도 많고... 모든 것이 크게 늘었는데 오직 우리의 행복만큼은 그때에 비해서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어젯밤에 아내와 그 얘기를 했습니다.
찬물로 손빨래를 하고 연탄불을 갈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그 때가 훨씬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밤에는 연탄아궁이에 양은 찜통을 올려놓고 물을 데워서 아침에 그 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지만 그래도 그 때가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어제 우리 부부는 밤길을 걸으면서 이 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지금부터 마지막 사는 날까지 집을 키우고 차를 키우고 땅을 키울 욕심보다 우리의 행복을 키우는데 더 집중하자고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집의 크기와 차의 크기와 경제적 크기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고 서열이 정해지는 사회라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러한 것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고 우리와 우리 주변의 행복을 키우는데 더 집중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한 달에 7만원을 하던 월세방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행복했는데 그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때보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