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 사실 보도의 엄중함
2003~2004년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개혁의 중요한 계기가 됐던 ‘길리건 사태’는 사실 보도의 엄중함을 일깨운다. 당시 영국 정부가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부 보고서를 ‘각색’했다고 폭로한 <비비시> 길리건 기자의 보도는 취재원이 말한 대로 보도한 형식상의 ‘사실’ 보도였지만, 취재원이 말한 내용이 사실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기자는 물론, <비비시> 이사장과 사장이 사임해야 했다. 요즘 포털 공간에서 난무하는 출처와 근거가 희박한 수많은 표절적인 ‘어뷰징 기사’는 물론이고, 신문과 방송마저 정파적 입장과 주장에 휩쓸려 사실을 호도하고 사실관계를 흐리는 기사들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역시 한국 언론의 근원적인 문제는 사실과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무책임성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한겨레는 이번달에도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 고리를 폭로하는 보도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에 힘을 보태는 한편,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당하게 차별받고 굶주리고 억압받는 ‘없는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중요 의제로 집중 보도하는 정의로운 진보 언론의 모습을 보여줬다. 10일 6면 ‘고대영( 사장) 이어 이인호( 이사장)도 ‘조건부 퇴진’ 꼼수’ 기사 등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개혁을 촉구하는 보도를 했고, 8일 18면, ‘차기 행장 선임에 정부참여 검토? 우리은행 민간 사외이사들 반발’ 기사 등도 해묵은 ‘관치 금융’ 문제의 혁파를 시사해서 좋았다. 23일 9면 ‘‘친박’ 권영세 쪽, 현대차에서 급료·자문료로 3억원 챙겨’와 23일 10면 ‘강원랜드, MB때도 유력자들 청탁받아 대거 채용했다’ 기사 등은 ‘있는 자’들의 결탁과 부패사슬 의혹을 드러냈다. 15일 1면 ‘누가 ‘김지영’을 성차별하나’ 통계 증언으로 본 ‘82년생 여성들’ 삶’ 기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여성차별 현실을 절절하게 고발했고, 13일 10면 ‘“단속 피하자” 믿고 따라갔는데…어느 불법체류자의 비극’ 기사는 인권사각 지대에 놓인 불법 이주노동자 문제를 상기시켰다. 24일 4면 ‘“절대 복종…집단 행동땐 면직” 다이소, 근로계약 ‘황당 각서’’ 기사 등은 취약한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적절히 고발했다.
■ 사실관계가 정확해야 개혁방안도 나온다
사회적 약자 문제를 중요한 사회 의제로 부각하려는 한겨레의 많은 정의로운 보도 가운데는, 그러나 일부 사실과 사실관계 확인이 제대로 안 돼 보도의 취지를 흐리게 만드는 경우도 발견된다. 한겨레는 22일 1면 ‘18살 고교실습생은 왜 죽음으로 내몰렸나’ 기사 등에서 현장실습을 나가 관리자 없이 일하다 기계에 눌려 숨진 제주도 특성화고 이민호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연일 1면 기사와 사설을 통해 크게 다뤄 특성화고 현장실습 안전 문제를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렸다. 23일 1면 ‘숨진 이군은 ‘장시간 노동’ 기계처럼 일했다’ 기사는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에 나가 착취와 부당노동을 당하고, 이군처럼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음을 고발했다. 24일 사설 ‘‘노동착취’ 현장실습 제도, 언제까지 이대로 둘 건가’와 27일 1면 ‘고교 현장실습 ‘3대 악습’ 끊자’ 기사 등에서 제도 개혁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25일 8면 ‘민호 숨진 지 엿새째…정치권·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 등은 한겨레 보도로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한 정치권과 관련 기관의 대처를 보도했다. 그런데 한겨레는 24일 1면 ‘취업률 성과주의에 내몰린 위험한 현장실습, 이명박 ‘노예취업’ 길 트고 박근혜 ‘도제학교’ 가속화’, 24일 2면 ‘‘자율·경쟁’ 이름으로 현장실습 ‘안전장치’ 없앴다’ 기사 등에서 마치 ‘산학일체형 도제학교’의 신설 등 보수 정부의 현장실습 확대·강화 정책이 이군과 같은 치명적인 안전사고 희생자를 낳게 하는 원인인 것처럼 서술했다. 통계학에서 얘기하는 전형적인 ‘의사(疑似)관계’ 사례다. 현장실습을 확대하면 당연히 안전사고가 날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그렇다고 안전사고의 원인이 현장실습 확대라는 주장은 이상하다.
이미 한겨레는 다른 관련 기사에서 이군의 죽음과 같은 현장실습 안전사고의 진짜 원인들을 적시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사설도 썼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보수정권의 문제로 연결시키다 보니, 현장실습생의 합당한 고용과 근로, 안전 문제가 어느새 현장실습 자체의 문제로 둔갑해버린 듯하다. 현장실습의 확대·강화는 산학협력형 역량교육을 지향하는 국내외 초중고, 대학교가 추구하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이 문제는 진보, 보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현실의 문제일 뿐이다.
■ 문제의 진짜 원인은?
한겨레는 18일 11면 ‘또 환경미화원 목숨 앗아간 ‘새벽 노동’의 비극’ 기사와 ‘‘새벽 근무’가 부른 안타까운 환경미화원 참변’ 사설에서 광주에서 새벽에 근무하던 환경미화원이 후진하던 수거차에 치여 숨진 사건을 크게 다루고, 환경미화원의 근무여건 개선을 촉구했다. 지난해에도 새벽 음주운전자한테 치여 숨지기도 하고,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파상풍, 세균성 감염 등으로 업무상 사망 사고를 당한 미화원이 27명에 이른다니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대책도 마련해야겠다. 그런데 한겨레 보도는 ‘새벽 근무’를 사망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아침 7시40분~오후 4시25분에 근무하는 도쿄 사례처럼 근무시간 조정을 촉구했다. ‘새벽 근무’는 환경미화 업무의 필요성과 효율성, 안전성 등을 고려해서 필요하면 조정을 검토할 수 있겠지만, 새벽 근무 때문에 환경미화원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과적인 사실관계에 들어맞지 않아 보인다.
????최영재 한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과학적 사실 확인은 언론의 책임
사실 확인은 언론의 책임 15일 오후 포항 지진 발생 이후 한겨레는 예상 밖의 강진 발생에 따른 인근 지역에 산재한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일반의 높아진 불안감을 전달했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미래 전망과 현실적인 대처 방법, 탈원전으로 가는 구체적인 방안 등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16일 3면 ‘불안감 더 커진 원전지역 주민들, “지진 안전 확인까지 가동 멈춰야”’ 기사는 한국수력원자력이 “고리·신고리·월성 원전 모두 이상 없이 정상가동 중”이라며 안전에 문제없음을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이 기자회견에서 “최대지진평가를 조속히 실시하고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모두 가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강조 보도했다. 시민단체야 이런 성명을 낸다 해도 이 정도의 지진 상황에서 원전 가동 중단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책임있는 조처인지는 의문이다. 16일 사설 ‘원전 밀집지역에 잇따르는 지진, 정말 괜찮은 건가’에서 “강력한 지진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는 등의 주장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염려만을 얘기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한겨레는 17일 사설 ‘‘지진대책’ 모든 걸 원점에서 새로 만들자’에서 “역대 최악의 지진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진 대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최영재 한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