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소방서에 있는 ‘100년 전구’(센테니얼 라이트). 센테니얼 라이트 홈페이지 캡처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소방서에는 100년이 넘도록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는 전구가 있다. 이 전구는 1895년 셸비일렉트로닉이 제작한 것으로 당시 특허를 따냈다. 셸비일렉트로닉은 광고에서 ‘수명 최장’이라고 자랑스럽게 알렸다. 그러나 이 회사는 1914년 다른 중소 전구업체들과 함께 제너럴일렉트릭에 흡수됐고 ‘100년 전구’(센테니얼 라이트)의 기술도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그 뒤 제너럴일렉트릭과 네덜란드 필립스, 독일 오스람 등 거대 기업들은 세계 전구시장을 나눠먹으려고 카르텔을 결성했고 전구 수명을 1000시간으로 통제했다. 훗날 드러난 카르텔 내부 문건에는 1000시간 한도를 어기면 징벌을 가하는 벌칙표도 들어 있었다. 소비자들이 전구를 자주 사야 기업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수명이 긴 전구가 전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지구와 바꾼 휴대폰> 23~45쪽)
미국 듀폰이 1934년 나일론을 개발했을 때 질기기가 이를 데 없었다. 진창에 빠진 자동차를 나일론스타킹으로 끌어내는 장면이 나오는 광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명이 긴 새 상품을 소비자들은 반겼지만 스타킹업체들은 불만이 컸다. 듀폰은 햇빛이나 공기 속 산소와 작용해 스타킹에 올이 쉽게 가게 하는 소재를 나일론에 추가했다. 나일론스타킹의 수명이 단축되자 판매가 급증했다.(같은 책 96~105쪽)
독일 저널리스트 위르겐 로이스와 영화감독 코지마 다노리처가 쓴 <지구와 바꾼 휴대폰>은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제품을 빨리 닳게 하는 ‘불순한 음모’를 폭로하고 이로 인해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라는 지구적 차원의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책은 다노리처가 만든 다큐멘터리 <쓰레기 더미를 위한 구매>를 토대로 출간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150여개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국내에선 2013년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전구 음모이론>이란 제목으로 선보였다. 저자들은 100년 전구의 실종이나 올이 잘 나가는 스타킹의 판매 등을 ‘계획된 노후화’라고 명명했다.
최근 애플이 신형 아이폰 판매를 위해 구형의 성능 저하를 유발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배터리를 일정 기간 사용하면 아이폰의 작동 속도가 느려지도록 운영체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애플은 배터리가 오래 되면 전원이 갑자기 꺼질 수 있어 이를 막기 위해 성능을 제한하는 기능을 도입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배터리만 바꾸면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신형 아이폰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배신감 때문에 애플을 상대로 집단소송에 나서고 있다.
기업이 제품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탓에 소비자들이 ‘계획된 노후화’를 알아채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고객센터 직원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제품 수리를 말리면서 신제품 구매를 재촉한다면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안재승 논설위원 js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