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독서무한
“만일 그러한 노력이 실패하고 장면 정부가 몰락한다면 예상대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군대의 정권 탈취다. (…) 만일 우리가 우물쭈물하면서 현재의 정부와 더불어 1년 더 시간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은 오직 한국을 잃을 수도 있는 폭발로 이끌 수 있으며, 이것은 극동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지위를 동요시킬 것이다. (…) 한국의 주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인가 (…) 우리는 (…) 이미 개입하고 있다. (…) 우리는 개입을 멈출 수 없다. (…) 우리는 한국의 체면을 세울 수 있고 우리의 행동을 조절하여 최대한도로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1961년 3월6일 존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특별부보좌관 월트 로스토에게 제출된 ‘팔리 보고서’의 일부다. 문두의 ‘만일 장면 정부가 몰락한다면’을 ‘만일 최규하 정부가 몰락한다면’으로 한 단어만 바꿔 놓으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상황 대응책으로 읽히지 않을까. 미국 국제협력처(ICA) 기술지원계획 책임자로 1961년 2월24일까지 주한미군원조사절단(USOM) 부단장을 지낸 휴 팔리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그해 5월5일 케네디 대통령이 참석한 제483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주요 안건이었고 그 열흘 쯤 뒤에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20년 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의 전두환이 쿠데타로 집권한다.
팔리는 그 전해인 1960년 4월혁명으로 고양된 한국의 민족주의, 그것을 촉발시킨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의 실정 등으로 반미주의가 대두돼 결국 “한국을 잃을 수도 있는 폭발로 이끌 수 있으며, 이것은 극동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지위를 동요시킬” 사태 발전을 두려워했다. 그 20년 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이후도 닮은꼴이 아닌가.
‘비강단 재야 사학자’ 김상구가 최근 써낸 <5·16 청문회>(책과나무)를 읽노라면 자연히 이들 두 역사적 사건들을 겹쳐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박정희 신화의 진실과 미국. 이 둘의 관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박정희가 일제 관동군 산하 만주국군 장교로 있다 일본 패망 뒤 광복군(후 광복군)과 기회주의적으로 얽히고 그 다음해 귀국하는 과정에서부터 미국은 그림자처럼 어슴프레 등장하다가, 그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고 국군 장교로 출세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과 숙군 과정에서의 중형, 그리고 구명과 군 복귀 등 남다른 이력, 친일 만주군 인맥의 득세 등은 미국의 개입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박정희 수수께끼’는 미국이란 열쇠를 끼워넣는 순간 명쾌하게 풀린다. 예컨대 김상구가 이 책을 쓰게 된 5·16 수수께끼. “60만 이상의 군대를 가진 민주당 정권이 전 군의 0.5% 정도인 3400여 명을 동원한 극소수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했다는 것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수수께끼다.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사령관 이한림 등은 쿠데타의 주모자인 박정희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이상한 쿠데타.”
<5·16 청문회>도 그 수수께끼의 확증적인 열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수수께끼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확대하고 박정희 신화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기존 언설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포인트는 미군정의 G-2, 방첩대(CIC) 등 미군 정보기관. 미국을 하나로만 보지 말고 군부·국방부와 국무부·백악관으로 구분해서 보라는 것.
한승동 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