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예술은 기억한다, 존재를 / 이다혜 작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12. 17:46

예술은 기억한다, 존재를

등록 :2018-01-11 19:24수정 :2018-01-11 20:10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국내 처음 소개된 플래너건 작품 둘
논픽션 작가 특유의 구체적 묘사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문학동네·1만5500원
굴드의 물고기 책/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문학동네·1만4500원


나이 든 이의 시간은 원형으로 흐른다. 양방향으로 기찻길처럼 뻗어 있어 뒤를 두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인식이 불가능하게, 시작과 끝이 반지처럼 맞붙는다. 모든 시간이 동시에 머릿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언제나 튀어나오고, 경험을 반추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2013년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그 주인공은 이제 일흔일곱 살의 도리고 에번스. 오스트레일리아인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일본군 포로가 되어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노역했다.

도리고 에번스는 유명한 전쟁영웅이다. 도리고의 과거를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뒤 그의 얼굴이 담긴 기념주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죽음보다 삶에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잘나가는 외과의사였고, 아내와 아이들과의 가족생활은 실패했으나 남들이 그 사실을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도리고에게는 그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되돌아올 과거의 사건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고모부의 두 번째 아내 에이미와 사랑에 빠져 보냈던, 전장으로 향하기 직전의 시간, 다른 하나는 일본군 포로가 되어 철도 건설 현장에서 병들고 다치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다. 도리고는 매일 아침 그날 노역에 동원 가능한 오스트레일리아인 포로들의 수를 일본인 장교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그 노력은 많은 경우 실패했다. 소설은 그 전장의 풍경을 공들여 담고 있다. 아니, 여기에 전투는 없다. 끊임없는 노역이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 제목에 쓰인 ‘먼 북’(deep north)은 철도 공사 현장을 뜻하는 동시에 아득하게 먼 곳이 된다.

그곳에서 예술은 모두를 견디게 하고, 또한 견딜 수 없게 한다. 일본인 장교들은 하이쿠를 주고받으며 일본의 정신을 찬양한다. 도리고는 키플링을 암송한다. 죽은 이를 위해 나팔을 부는 이는 혀가 고래처럼 부어도, 고통을 참고 부은 혀를 피해 숨을 쉬며 나팔을 분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책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라 그것을 암송하며 정신수양을 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 병사도 있다. 도리고는 강렬했던 에이미와의 사랑을 떠올린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로 2014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리처드 플래너건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출신으로 논픽션을 쓰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며 소설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논픽션으로 기반을 다진 작가의 특징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눈길을 끈다. ⓒ Joel Saget, 문학동네 제공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로 2014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리처드 플래너건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출신으로 논픽션을 쓰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며 소설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논픽션으로 기반을 다진 작가의 특징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눈길을 끈다. ⓒ Joel Saget, 문학동네 제공

소설은 도리고의 시점에서 목격한 세계만을 담지 않았다.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대목을 갖고 있다. 조선인 일본군 역시 그중 하나.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소설 후반부에서 드러나는데, 리처드 플래너건은 같은 현장에 존재했던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의 시점 역시 담아냈다. 승리자인 연합군은 일본 귀족들과 연줄이 있는 일본 장교들은 거의 석방했다. 그들의 죄까지 뒤집어쓴 이들 중 하나가 최상민이었다. 그는 전범재판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최상민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최상민과 그의 최후를 묘사하는 플래너건의 방식은, 그가 일본인 장교들의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보다 차갑게 느껴진다. 이것은 최상민의 특성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해명할 지적 방법을 갖지 못했던 이에 대한 냉소인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굴드의 물고기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뒤 논픽션을 쓰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며 소설을 준비했다고 한다. 두 권의 소설 모두, 논픽션으로 기반을 다진 작가의 특징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눈길을 끈다. <굴드의 물고기 책>은 윌리엄 뷜로 굴드라는 유형수(유배형을 받은 죄수) 화가를 중심으로 19세기 영국 식민지이자 유형지였던 태즈메이니아를 그리는데, 이곳 역시 ‘먼 북’과 같은 곳이다. 그는 태즈메이니아에 서식하는 물고기들을 그려 영국으로 보내는 일을 맡게 되자 감옥섬에서 진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기로 마음먹는다. 폭력의 기록을.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헨드릭스라는 병사가 나온다. 콜레라로 죽었음에도 그의 물건이 소각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억이 정의입니다.” 여기 우리가 있다. 아름다움도 존엄도 없는 곳에. 존재를 기억하라. 그것이 예술이고 기록이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7406.html?_fr=mt0#csidxdb12358d3fab3f5a79e9d77073371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