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딸에 대하여
김혜진 지음/민음사(2017)
김혜진 지음/민음사(2017)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하는 기본적인 도리, 나와 다르기 때문에 더욱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뜻을 표하는 태도. 예의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이런 대화가 그렇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아침 시간엔 말이에요.” “아시겠지만 저도 제 몫의 월세를 내고 생활비도 부담해요. 불편하다고 하시니까 조심은 하겠지만 저한테도 그만한 권리가 있는 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나이가 많다고, 동거인의 어머니라고, 집주인이라고, 상대에게 눈에 띄지 말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동성애자를 이해할 수 없어 불편하더라도 그들을 없는 존재로 무시할 권리도 없다. 소설은 적어도 이런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보편적 동의를 반듯하게 지적한다. 아주 오래,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숱한 소설들에서 여러 어머니의 형상이 제시된 바 있지만, 이 소설처럼 어머니를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충실하게 그려낸 소설은 흔하지 않다. 딸을 키우기 위해 교사직을 그만두고 온갖 저임금 노동을 거쳐 요양 보호사의 일을 하는 어머니. 임금은 점점 낮아지고 신분은 점점 불안정해졌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삶을 고단하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마땅하고 정당하게 지켜야 할 것들을 정하고 행한다. 젊어서 국가나 사회의 안전망이 감당하지 않은 이주자, 입양아들을 위해 헌신했으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치매 노인이 된 젠에 대한 예의가 그렇다.
성의를 다해 돌보고, 그가 버려지듯 죽어가는 것만은 막기 위해 어머니는 최선을 다했다. 타인인 젠을 이해하는 것보다 딸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믿고 아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싸우고 설득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며 불편하게 계속, 공존한다. 그 공존의 방식이란 또한 질문과 의심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컨대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 말고”라고 말하는 “헤아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혹시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지 의심하는 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젠과, 젠의 장례식장에 모인 어머니와 딸과 딸의 애인으로 이루어진 유사가족을 화해나 이해의 결말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젠을 돌보고 그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어머니의 일이었다면, 시간강사 일을 하며 동성애자 차별에 반대하고 부당해고와 싸우는 일은 딸의 일이었다. 그들은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의 조건 하에서 각종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사회를 매개로 겨우 마주쳤을 따름이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걷다가 겨우 ‘다시’ 만났고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결말은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물들에 대해 소설은 최선의 예의를 다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각각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말을 찾는 과정을 섣부른 봉합과 화해의 희망 없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어색하게 장례식장에 서 있는 어머니와 딸의 얼굴. 거기에는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각각의 삶이 가득하다. 그들은 아마 서로의 얼굴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서영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