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신앙의모델=요셉의순종 인내 겸손]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23. 14:44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 (41:37-43)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2 No.14

성경본문[개역개정]

36.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모처럼 냉장고에 뭐가 좀 있나하고 열어보니까 사과 두 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아주 맛있게 생겼고, 또 하나는 조금 상했는데 조금만 더 내버려두면 이건 먹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랬을 경우 여러분은 어느 것을 먼저 먹겠습니까? 저는 예전에는 상하기 쉬운 거, 이제 조금만 더 지체하면 상하게 되는 그것을 아까워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먹으면 평생 맛있는 건 못 먹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제가 생각을 아주 바꿨습니다. 그런 건 치워버리고 맛있는 걸 먼저 먹겠다.

좀 짓궂게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한번 잘못 배우면 평생 간답니다. 차라리 맨땅에 집을 짓는 게 낫지 그 헌 집을 어떻게 고쳐 써보겠다고 이리저리 손대다 보면 모양도 우습게 되고, 엉망이 돼 버리는 거죠. 의미 있는 얘기입니다. 짧지만 어제 오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를 하고 오늘 이 예배는 수련회를 마무리하는 클라이맥스입니다. 우리 학생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무척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것이 왜 소중하냐 하는 것은 제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또는 대학생 시절에 종종 교회에서 우리 교회 뿐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심령부흥회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몇 차례는 부흥회를 가게 됐는데 모태신앙인으로 신앙이 있는 부모와 환경 속에서 자랐던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부흥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가 통성기도, 작년에 우리가 월드컵을 할 때 시청 앞 광장에 모인다든지 아니면 이렇게 외국에 나와 계신 분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하는 것. 이건 아주 우리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일이었습니다마는 글쎄, 통성기도 할 때마다 제가 느꼈던 갈등이 이런 것입니다. 뭐 별로 기도할 내용이 없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끝까지 기도하는지, 무슨 내용이 그렇게 많은지, 또 하나 기도하다 보면 내 기도는 어디로 가버리고 남이 떠드는 소리만 내 귀에 들어와 가지고 도대체 내 기도는 갈 길을 잃어버리는 거죠. ‘꼭 이렇게 기도해야 되나?’ 그러다가도 아니야 이런 건 불신앙이지, 열심히 기도해야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또 기도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통 그렇게 집회를 마치고 기도를 더 할 사람은 남아서 기도를 더 하라고 불도 끄고 기도하고 하잖아요? 그래서 모처럼 이번 기회에 좀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하고 남아서 기도하다 보면 옆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때로는 방언도 하고 또 소위 입신도 했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드러눕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저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지루하고 따분하고 굉장히 갈등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보통은 마지막 날 쯤에 교회가 건축을 해야 되는데, 헌금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서 헌금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꾸 유도합니다. 그 때, 제 고등학생 시절에 , 이래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런 것을 다 감수하고 그래도 받은 바 은혜가 있는데 그리고 이제 이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 좀 제대로 믿어야 되겠다.’ 라고 하지만 지내보면 일주일을 못 가더라고요.

그 은혜가 말이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70년대, 80년대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때, 그 때 모토가 뭐였습니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하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하던 그 시대적인 분위기와 이게 딱 맞는 거죠. 그 한 시대의 환경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 때 우리의 신앙이 보다 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가기보다는 다분히 우리의 가난과 어려움을 넘어서고 잊어버리고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교회도 성장했지만, 그 교회의 신앙의 스타일과 색깔이 이건 심령부흥회로 대표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하나의 신앙모델이었지만 좀 미성숙한 모델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어디 심령부흥회가 있다면 여러분 흔쾌히 가십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그건 이미 시대와 문화와 상황과도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도 좀 거리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IQ가 몇이십니까? 다 잊어버리셨지요? 자기 IQ 잊어버리신 분은 두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바꾸어 가지고 IQ보다 그 사람의 감성이 얼마나 더 풍성한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IQ보다 이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고 표현하는 감성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감성지수는 얼마입니까? 한걸음 더 나가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돈 많이 번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때는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분명 아닙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배부른 돼지겠지요.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내게 채워주시는 그 부분으로 충족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삶의 만족을 누리게 되거든요. 이것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영성.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신앙의 모습, 그 사람의 신앙의 색깔, 이것을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 사람의 영성지수는 또 얼마입니까? 뭐 어떻게 해서 측정한다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분명 영성지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알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너무너무 풍성하고 감사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그는 영성지수가 높은 것이죠. 그러나 분명 교회를 출석하고 분명 나는 교인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은 했습니다만, 내 마음에 공허함이 있고, 뭔가 불안함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면 적어도 오늘 나의 영성지수는 내려온 것이지요.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나를 발견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 그 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델이 중요해요. 우리 친구들 중고등부 주보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소개를 하는 난이 있어요. 어떤 친구는 그랬더라구요. ‘소망이 뭐냐?’ 고 했더니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렇죠. 모델이 중요합니다. 왜 그러냐? 모델이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헤매고 방황하지 않고 그가 한 그 모습 그 목표와 방법을 우리가 집중해서 따라가기 때문이죠. 모델이 있을 때,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정력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이죠. 또 하나, 모델은 이미 결과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라고 하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뒤따라가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일을 해도 확신을 가지고 일할 때 의욕이 있고 신나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가운데 이건가 저건가 하면서 일을 한다면, 거기에는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학습효과가 있죠. 또 틀림없이 그것이 바른 모델이라면 끝까지 가지 않고 어느 정도만 해도 벌써 내 몸이 아는 것이잖아요.

규칙적인 생활하시는 분들 그리고 규칙적으로 식사하시는 분들은 벌써 한번 그 리듬을 깨뜨리고 과식을 한다면 벌써 그 날밤 아주 몸이 불편할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 몸이 벌써 그 룰에 적합한 몸이었는데 잘못된 것이 들어옴으로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죠. 고통스럽죠. 그러나 이 고통이 있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나는 나를 바로 고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 전에 밥을 먹고 잤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이건 아주 골병 든 사람이죠. 둔감한 사람이죠.

우리 신앙의 모델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모델이죠. 그러나 우리가 벌써 예수님 그러면 나하고는 다른 별종 인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오늘 요셉, 요셉의 영성, 요셉의 신앙, 요셉을 모델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형들과 말할 수 없는 불화를 극복하고 용서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아주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은 그 개인의 연약함, 그리고 삶의 고통을 통해서 배운 영성입니다. 오늘 바로가 이렇게 묻죠. 요셉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요셉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말합니다. ‘아니 너는 어떤 꿈이든지 꿈을 들려주기만 하면 그것을 척척 풀어낸다면서?’ 그 때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많이 오해하시더라고요. 무슨 운동 수련해 가지고 이런 주먹으로 저런 기둥을 한 주먹에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어떤 초능력을 갖추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신앙생활의 본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내 삶에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그런 연단을 겪고 세셰의 황제라고 할 수 있는 바로가 칭찬할 때 제가 뭐 좀 합니다.’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은 우리가 맘먹는다고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죠.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을 때, 그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러다가 모처럼 기회가 왔어요. 바로를 섬기던 장관이 감옥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장관이 꿈을 꾼 것을 요셉이 해몽해줬어요. ‘당신은 앞으로 3일 후에 나갑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가면 내 억울함을 꼭 좀 풀어주십시오.’ 그 장관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자 이제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이제 뭔가 좋은 소식이 오겠지.’ 그런데 성경을 보니 2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뭔가 아주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죠? 혹 사업을 놓고라도? 또 우리 자녀들 공부하는 문제를 놓고? 또 제가 보니까 우리 친구들은 좋은 대학가게 해주세요.’ 가 소원이더라고요. , 그런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응답은 갑자기 오늘 기도했는데 내일 응답이 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해 보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그렇게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구하는 것은 보통 진실한 마음에서 구하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발등에 불 떨어져서 급해가지고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그런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장 들어주시지 아니하시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게 하십니다. 기다리세요.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이 곧바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 말할 수 없는 재난이 오기 전에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을 불러내도록 하나님이 2년을 기다리게 하신 거죠. 그러니까 그 2년의 기간이라는 것은 그저 의미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작품을 빚어가는 시간이었죠. , 이제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 오늘 나의 기다림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시간이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요셉의 신앙은 전체적이고 긍정적인 영성을 가졌다 라고 하는 거죠.

제가 참 오래 전에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의 폴란드에 있었던 사건이에요. <신문>(訊問)이라고 하는 영화였습니다. 어떤 여가수가 어느 날 갑자기 노래를 멋지게 부르고 무대를 내려와서 무대 뒤로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그를 체포해갔어요. 그러면서 왜 그러냐고,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아무리 부르짖고 말해도 대꾸도 안 해요. 그를 옥에다 집어넣습니다. 아무도 그가 왜 여기 들어오게 됐는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그 연극단이 우두머리를 모함하는 그 음모에 하나의 희생양으로 말려들어간 거죠. 아무 죄도 없는데. 감옥에 들어간 이 여자는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막 철문을 흔들면서 외칩니다. 그런데 먼저 감방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대꾸도 안 합니다. 이 여자는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어서 부르짖다가 아무도 응답을 안 해주니까 자기 팔뚝을 자기 이빨로 물어뜯습니다. 막 피가 터집니다. 그리고는 쓰러집니다. 기절합니다. 그제서야 간수가 달려와서 끌어내가지고 의무실로 데려가서 치료해줍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다시 집어넣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체념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더 이상 나갈 희망을 포기하고 이미 들어와 있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루하루 그저 주어진 현실에 그냥 함께 동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오늘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혹시 누가 나에게 해롭게 했던 그 일을 마음에 품고 두고 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봐라.’ 이러고 살아갑니까? 요셉은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감옥에 들어가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 돌아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와 함께함을 알았다고 성경은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면서 그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그것을 성실히 감당함으로 경제를 배웁니다. 그리고 왕의 감옥에 들어가서 장관들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아런 것들을 통해서 이 바로의 정치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치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얘굽의 문화를 배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때가 되자 불러서 혼란에 빠진 애굽을 일으킬 수 있는 경제전문가요, 정치가요, 그것을 총괄할 수 있는 총리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라고 고백하는, 영성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는 마라톤 열풍이 불었어요. 마라톤대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인터넷을 찾아보면요 그야말로 매 주말마다 뛸 수 있는 그런 마라톤이 전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답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또 이번엔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 마라톤이 좋아서 뛰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매일 10km를 뛰어야 잠이 온대요. 의사들이 말합니다. ‘그거는 운동중독증입니다. 그거는 또 병에 갈린 겁니다.’ 운동이라는 건 우리 삶을 윤택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자기 하는 일을 다 제쳐놓고 이게 좋다고 운동에 빠져가지고 하루에 10km씩 뛰어야 하루 산 것 같고 잠이 온다면 그거는 또 다른 중독에 빠진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교회를 잘 섬기고 봉사하는 건 중요합니다만 가정은 저리가고 교회 안에만 빠져있는지, 간혹 그런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지, 세상의 경제 정치 그런 건 나는 몰라. 아니요. 그래선 안 됩니다. 나라의 흐름도 우리가 알고 그것을 놓고도 기도해야 합니다. 꼭 내 남편, 내 자식만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됩니다.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깨어있어야 됩니다. 나 하나 은혜 받는 어떤 체험적인 신비주의만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걸 이원론이라고 그래요. 교회 안에 있는 건 다 거룩한 것이고, 교회 밖에 있는 것은 그저 대충대충 해도 되고아닙니다. 여기서 은혜 받고 나아가서 세상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는 학생수련회를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도 반듯하게 클 뿐만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요. ? 하나님이 원하시니까요. 적어도 우리를 학교 보냈으면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되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신앙의 균형.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하신다. 오늘 나의 문제 속에, 고난 속에 때로는 이 아픔 속에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고 나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길을 따라 살겠다. 영성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능력과 체험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요셉에게 부어주셨던 그 은혜와 믿음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 중고등부 친구들에게 더욱 더 그러한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