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성전을 깨끗이 하라[도스토예프스키 감옥에서 성경읽고예수믿음]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24. 06:42

성전을 깨끗이 하라 (11:15-18)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3 No.15

성경본문[개역개정]

11.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몇 해 전에 이스라엘 성지여행을 갔을 때 예수님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나사렛에 갔었습니다. 거기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이제 성령으로 아들을 낳으리라.’ 고 하는 사건이 있었던 그 현장을 중심으로 수태고지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교회를 지으면서 세셰 여러 나라의 교회로부터 벽화를 한 점씩 받아서 교회 벽에 전시를 했는데 거기에는 아기 예수의 그림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그림을 보면 아기 예수는 새까맣습니다. 한국에서 간 그림을 보면 아기 예수와 부모들은 다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가 흔히 이제까지 많이 보아왔던 서구화된 예수님의 얼굴이 본래 예수님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고고학자들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의 인골을 발굴해서 그것을 기초로 예수님의 얼굴을 복원하면서 이것이 1세기 유대 땅에 살았던 예수의 얼굴이다.’ 라고 제시한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베드로가 이렇게 생겼다.’ 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뭔가 거칠고 투박한 노동자의 얼굴이었거든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추측이요, 가정이죠.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늘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것이 전부이고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내리치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판을 둘러엎고 비둘기를 날려보내시면서 분노하고 계십니다.

화내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연극이 아니었고 진정한 분노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그때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다윗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시편에 있는 예언의 말씀, ‘성전을 아끼고 사모하는 그 뜨거운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성전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이러한 행동은 반대자의 눈으로 보면 완전히 횡포를 부린 것입니다. 데모를 한 정도가 아니라 돌을 던지고 다 뒤집어엎은 것이지요. 드디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저 예수를 더 이상 그냥 놔둘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죽일까?’ 하고 궁리를 하게 됩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키셨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만큼 성전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셨죠. 성전이 바로 오늘의 교회 아니겠습니까? 교회와 우리 한국은 또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지난 한국교회의 100년 역사는 특이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렇게 성장한 유례가 없거든요. 그것도 아시아 국가 중에 이렇게까지 교회가 성장한 예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죠. 우리나라가 일본, 중국, 러시아의 압제 밑에서 고통당하면서 새로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 그 통로가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통해 학교가 들어오고, 교회를 통해 이 나라에 병원이 들어오고, 교회 안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훗날 한국을 이끌어간 많은 인물들이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자라났습니다. 더욱이 6.25를 통하여 우리는 미국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고 가난과 곤궁에 빠진 백성들을 미국교회가 아낌없이 후원하고 도왔던 것이죠.

드디어 한국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던지 100만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그런 어마어마한 이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100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까 미국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놀랐을 겁니다. ? 그 사람들은 ‘100만 대의 차를 어디다 세웠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요. 우리하고 문화가 다르니까요. 그러나 차 없이 발로 걸어서 모여들었지만 100만이라고 하는 숫자는 더 이상 불러 모을래도 모을 수 없는 숫자가 되었죠.

2003년은 한국인들이 미국 땅에 이민 간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3년에 처음으로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 노동자로 나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 조선이 너무 곤궁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 땅에 가야 할 터인데 보수적인 우리 선조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광고를 해도 가려고 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그 배를 탄 사람들은 제물포의 내리감리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 내리감리교회를 담당하던 존스 선교사님이 설득을 한 거죠. ‘그곳에 가면 당신들이 이곳에서 일해서 벌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의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듯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나라다.’ 그래서 겔릭호를 타고 망망대해 이국 땅으로 떠났던 첫 배의 사람들은 마치 미국에 도착했던 청교도들과 같이 신앙인들로서 이민 첫 배를 탔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건이죠. 그래서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사실 그 가운데는 몰락한 양반들도 많았답니다. 농사라고는 지어보지 않은 양반들이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탕수수밭에 들어가 일하면서 고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또 홀로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국 땅에서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어서 신부를 구해야 되겠기에 사진관에 다 모여서 사진을 한 장씩 찍어 고국 땅에 있는 중매쟁이한테 보내면 그 사진을 보고 시집오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사진신부라는 것입니다. 단 한번도 얼굴을 대면하지 못하고 그저 사진으로 본 그 얼굴 가지고 중매쟁이의 말을 믿고 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가 가겠습니까? 거기에 동참해서 따라나선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이었냐 하면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이제 가정을 이룹니다. 사진에는 그럴 듯 해 보였는데 실제로는 10년 이상이나 늙은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복이라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갔지요. 이민교회의 시작은 참 뜨거운 눈물과 기도로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근.현대사회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이국 땅에 나와 사는 모든 한인사회는 첫발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먼저 짓고 시작하는 것이죠. 교회는 이민사회를 이루고 사는 우리들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내적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2000년 전 유대 땅 그 성전에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며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성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애창하는 찬송가가 있지요? 또 많은 성경말씀 가운데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이 있겠지요? 조사를 해보니 사람들이 마지막 죽을 때 기억하고 싶은 성경말씀으로 으뜸가는 것이 시편 23편이랍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시편 23편은 언제 읽어도 늘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진실되게 합니다. 특히 그 마지막 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인데, 성경이 다윗의 이야기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실상을 알 것입니다. 다윗은 도덕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농사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잘난 인물들도 많이 있지만 유독 다윗을 만나기를 좋아하셨고 다윗을 가리켜 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다윗에게 고백했던 것은 일찍이 다윗이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또 수많은 죽음의 고비 속에서 늘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만남으로 누구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분명한 관계를 오늘도 확인하며 살 때에만 진정 살아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법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앞으로 장래가 보장돼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집, 성전, 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한 사모가 있습니다. 둘째, 그곳에서 내가 만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어진 메시야에 대한 분명한 약속, 그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있으므로 인해서 오늘 다윗의 삶은 말할 수 없는 많은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고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었죠.

예수님이  오늘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는데 그 성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기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했던 그 헤롯이 세운 성전입니다. 헤롯은 원래 유대인이 아니었어요. 로마 식민지배에 있던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대이닝 아닌 에돔 사람으로서 로마에 정치적으로 손을 잘 써서 왕권을 쥔 것이죠. 그리고는 유대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는데 어마어마하게 지었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고 계속 지어져가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무려 46년째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정치권력이 결탁한 것이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게 되는 순간, 신앙은 순수성을 잃어버린다.그 말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우리의 삶이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여러 가지 모든 것들이 이제 살만하다 하면 그 때 위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와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는 반드시 퇴락합니다.

이것이 지금 유월절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에 의하면 모든 성인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전이 복잡했던 거예요. 무려 25만 마리의 양과 소와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네팔에 갔을 때 아직도 동물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현장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었습니다. 피비린내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사서 그것의 목을 따고 피를 뿌리는 광경을 봤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떤 일이 생겼느냐.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는 로마인의 돈은 안 되고 반드시 유대인의 돈이어야 하므로 돈을 바꿔야 됩니다. 이 돈 바꿔주는 사람들이 수수료를 챙깁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돈을 바꿀 수 있도록 돈을 받고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이런 거대한 행사를 이용해서 돈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죠. 심지어는 하나님께 바칠 제물, 양이나 소를 특정인에게 사야만, 성전 구내에 들어와서 사야만 흠 없는 것으로 눈감아주었어요. 다른 곳에서 가져오는 것은 꼬투리를 잡아 부정하다고 내쫓는 것이죠. 이런 악한 일들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예배하는 장소, 또 유대여인들이 예배하는 장소, 유대남자들이 들어가는 장소, 또 더 들어가면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방인들이 예배해야 할 그 장소에 이방인들은 없고 온통 장사꾼들이 가득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장사를 했던 것입니다.

요란한 예배의 행위는 있었지만 진정한 예배는 실종된 것이죠. 유명한 신학자 유진 피터슨<다윗> 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액세서리 영성 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분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을 교양 있는 사람의 여러 가지 조건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래도 여러 가지 종교 중에 기독교를 믿어야지.’ 이런 것을 보고 액세서리 영성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어요. ‘너희는 이 성전을 헐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리라.’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그 때에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았어요. 어떻게 깨달았느냐? 이 때 내가 다시 성전을 세우리라.’ 한 그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몸, 십자가 사건, 그 사건이야말로 새로운 성전,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신앙의 비밀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러시아의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yevsky 1821-1881) 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젊은 날 너무 방탕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술을 즐기고 도박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시 러시아 짜르(Czar) 황제의 불의한 전제정치에 대해서 불만을 토하다가 뜻이 맞는 젊은이들끼리 모여 비밀결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만 이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적발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에 끌려갔습니다.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짜르의 병사들이 방아쇠를 철커덕하고 당기는 그 죽음의 위기에 사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음에 서는 순간 더 이상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혁명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극적으로 짜르가 보낸 칙사가 말을 급하게 몰고 와서는 사형을 정지시켰습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의 앞날을 생각해서 사형을 면하도록 짜르가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시베리아로 10년 형을 가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로 끌려가면서 먼 길 도중에 만났던 한 여인이 넘겨준 신약성경을 가지고 10년을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다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그는 젊은이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격으로 자기의 삶에 다가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리라. 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은 이 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한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그 말대로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속였던 사기꾼이나 미치광이든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샛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자기가 임의로 길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냥 적당히 믿는 길. 아니오. 우리는 예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같이 내 인생에서 예수를 못박아 죽여서 그를 부정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예배의 핵심이요, 성전의 살아있는 생명력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이제 다윗과 같이 예수가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고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일터와 가정과 모든 곳마다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다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너희 몸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이번 한 주간은 조용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으로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얼치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포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그 앞에 나의 삶을 위탁하는, 그리고 그 고백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은혜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