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 (고전 1:18-25)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2부 No.10
성경본문[개역개정]
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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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바둑 전문 기자가 쓴 글이 아주 흥미로워서 소개합니다.
‘바둑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살이는 굉장한 불공정행위다. 세상살이에 접바둑은 없다. 살아가는 일들이 1급이건 18급이건 프로이건,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지닌 하버드박사든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빈털터리 시골청년이든 다같이 맞바둑을 두어야 한다. 머니게임에서 고단위 실력을 갖춘 외국의 금융회사가 IMF 사태로 비몽사몽이 된 한국 땅에서 하수들을 상대로 돈을 죄다 쓸어가도 사기죄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최강자들에게 세계화는 참으로 근사한 변화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둑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살이는 약자가 강자를 거꾸로 접어주어야 하는 아주 특별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서민은 국회의원을,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국내기업은 외국기업을 접어준다.
바둑에는 세력과 실리라는 서로 갈등하는 양대 축이 있다. 세력은 학벌이나 신용, 가문 등 나중에 힘을 쓰게 되는 것이고 실리는 눈 앞의 현찰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세력과 실력을 잔뜩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마이너스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살이는 어차피 불공정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죠. 이제 여기서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며칠 전 신문에 정말 가슴이 아픈 뉴스가 있었습니다. 충남 공주의 한 고등학교,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의 3학년 한 학생의 가족이 새벽 4시 반, 학교 정문 앞 차 안에 다 모여 앉았어요. 이 학생이 수원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1, 2등을 하고 공주의 이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동네 잔치까지 했는데 그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이 자꾸 떨어져요. 아버지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벌써 고3, 4월이 되었어요. ‘너는 내 인생의 절반이었다. 내가 너에게 남은 인생을 다 걸었는데 너로 인해 모든 것이 망쳐졌다.’ 그리고는 차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어요. ‘살고 싶은 사람은 내려라.’ 마흔일곱 그 아버지와 마흔네 살 엄마와 열다섯 여동생은 그 차 안에서 그대로 앉아 죽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뛰쳐나왔어요. 그리고 아침 8시에 경찰서에 나타나서 거기 얽힌, 그 기가 막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이지요. 잘못된 생각, 엄청난 비극.
여러분, 이따가 예배를 마치고 우리 진학할 학생들을 위해서 진학기도회를 가지려고 하는 의도는 우리의 생각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께 먼저 묻자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내어 보내신 하나님께서 어찌 계획 없이 무대책으로, 무책임하게 세상에 막 내어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묻지도 아니하고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한 가족도 이러하지만 우리 한국도 요즘 결코 평안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또 일본과 중국이 갈등해요. 꼭 더도 말고 100여 년 전의 청일전쟁 같아요. 그 틈바구니에 낀 우리나라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 이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더니 사방에서 온갖 학자와 여야 할 것 없이 찬성, 반대, 비판으로 나라가 시끄러웠어요. 이차원적인, 평면적인 이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미국은 ‘유비쿼터스’ (ubiquitous) 무소부재 사차원적인 전략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섣부른 전략을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가겠느냐?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지극히 불공정한 현실을 살아갈 때 약자들이 희생되는 일이 많이 있죠.
제가 한 10여 년 전에 경남 진주에 갔다가 참 기가 막힌 걸 봤어요. 저녁에 해가 다 떨어지려고 어스름할 때… 처음 갔거든요, 진주를. 그런데 저 삼거리에 트럭을 세워 놨더라구요. 뭐 하는가 보니까 트럭 앞에다 돼지를 잡아가지고 현장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더라고요. 아마 거기가 교통사고가 잘 나는 지역이니까 안전을 기원하는 나름의 방법이겠죠. 저도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참 딱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얘기 다 아시죠? 용왕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깨끗한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거죠.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인류 보편의 현상이에요. 이스라엘이나 인도네시아는 양을 주로 바치죠. 양이 과거 그들의 생활수단이었을 테니까. 한국에서는 돼지를 잡죠. 농민들의 가장 가까운 짐승이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하고 위태로운 일이 있을 때는 그 정도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우리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을 내놓자. 처녀를 내놓는 거예요. 물이 있는 곳에는 처녀를 집어넣는 그런 전설과 신화가 많이 있어요. 또 맏아들을 내놓는 거죠. 맏아들을 불 속에 던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신을 달래는 거죠. ‘이 세상의 고난과 재난과 이런 것은 모두 신의 노여움으로부터 온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난 날 때마다 끝없이 반복되는 제사를 통해서 저를 달래려고 했던 거죠.
오늘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헬라인을 얘기합니다. 종교적인 민족 중에 으뜸가는 유대인들은 영원한 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신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신, 우리 민족을 위한 신입니다. 구약시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에요. 어느 신이 강한가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강대국들에게 짓눌리고 고통당했기 때문에 메시야를 갈망하는 거예요. 그 메시야가 어떤 메시야냐?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과 같이 지략이 뛰어나서 전쟁에서 연전연승해 가지고 두 번 다시 패배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항상 승리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야를 찾는 거예요.
또 철학의 민족이었던 헬라인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인류 보편의 가치 ‘지혜’ 를 찾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민족만을 위한 그런 신을 내버리고 대신에 이 우주 모든 것을 움직여 나가는 그 어느 궁극적 존재, 제일 원리 ‘로고스’ 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세상사에는 친소 관계를 갖지 않는 비인격적인 원리일 뿐입니다. 허무주의가 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메시야 대망을 통해서 몸을 던져서 자기를 위한 신을 찾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신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거죠.
이제 그들에게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인생의 문제 해결책은 이것이다.’ 이렇게 보여주셨는데 강한 메시야를 찾는 유대인들이 볼 때는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오히려 저주 받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철저한 실패자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철학을 하는 그리스인이 볼 때는 그것은 너무나 미련한 것, 말도 안 되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하세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케리그마’ 입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택한 백성을 구원하셨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전도’ 라는 말의 원어 ‘케리그마’ 가 무슨 말이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 다른 말로 ‘십자가의 말씀’, 헬라어로 말하면 ‘호 로고스 투 스타우루’, 이것이 로고스다 이거예요. 이것이 헬라인이, 그리스인이 그토록 목말라하며 찾던 삶의 원리지요.
십자가는 희생제물과 같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에다 달아 극한 고통 속에 빠뜨리는 것이죠.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양을 잡아 드리고, 아들을 잡아 드리고, 처녀를 물에 던지고 하는 그런 희생제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서 바치는 제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제물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 십자가를 보면 끔찍해요. 문화가 다르니까요. 그러나 고대 사회에 있어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은 인류보편의 관습이에요.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죠. 이 십자가는 아래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그 몸부림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인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요, 정의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능력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다.
지난번에 노인대학 어르신들 소풍을 갔습니다. 그래서 소풍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하도 더워가지고, 그 분들이 어디 가서 지내셔야 좀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찾아 다녔어요. 저 찌부부르 근처에 ‘따만 붕아’ 라는 좋은 곳이 있대요. 저희가 찌부부르에서 한 다섯 바퀴 헤맸습니다.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내려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는 찾은 줄 알고 왔더니, 어제 확인된 결과에 의하면 거기가 아니더라고요. 잘못 찾은 거예요. 세 군데나 찾았는데 그 안에 ‘따만 붕아’ 가 없더라고요. 저는 그 중의 하나가 따만 붕아인 줄 알고 ‘옳지, 여기 오면 되겠구나’ 했는데 어제 확인한 결과 ‘따만 붕아’는 또 다른 거예요. 죄란 무엇이냐? 잘못된 생각, 잘못된 정보, 잘못된 결정, 거기에 제 아무리 충실해 봐야 고생할 수밖에 없어요. 그 안에 갇혀있는 한 아무리 해도 답은 안 나오는 것이죠. 그게 죄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오해하였도다.’ 잘못된 해석 중에 가장 으뜸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세상이 말하는 인생의 정의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그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죠.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단이 요구하지 않습니까? ‘네가 메시야냐, 메시야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이적을 사람들 앞에 보이고 그렇게 해서 메시야임을 드러내라. 능력을 구하는 저 사람들 앞에 너의 능력을 보이라.’ 힘의 유혹을 거부하신 거예요. 성경을 읽어보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을 자꾸 충동질합니다.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시기를 그토록 기대한 거죠. 그러나 거부하신 거죠. 심지어는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 나사렛 시골 구석에 계시지 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기서 베푼 그 이적들을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한번 터뜨리십시오. 그러면 형님의 뜻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심지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들렸을 때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휘두를 때에도, ‘칼을 거두어라. 지금이라도 내가 하늘의 군대를 부를 수 없는 줄 아느냐?’ 힘의 유혹을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정말 메시야라면 지금 거기서 내려오라. 그러면 내가, 우리가 너를 믿겠다.’ 끝까지 힘의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들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신 그 음성만을 들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아들이다.’ 여러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최고의 능력자가 되어 살기를 원합니까?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한국의 한 청년이 미국에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래서 피를 흘리고 차에 누워 있습니다. 경찰이 왔어요. 묻습니다. ‘Are you fine?’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만 중학교 때 공부했던 말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I’m fine, and you?’ 배운 대로 나오는 거죠.
제가 영화 한 편 봤어요. 제목이 재미있어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그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결혼 25년차인 중년의 영화배우인 한 남자가 일본 도쿄에 고아고용 필름을 찍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같은 호텔에 남편을 따라온 결혼 2년차인 한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호텔에 갇혀서, 서로 다른 시간에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데, 이 일본 사람들 진짜 영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손짓 발짓으로 의사 표현해 가면서 해결해 나갑니다. 의사소통이 안되니까 모든 게 불편해요. 그러나 그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본질적인 소통의 문제입니다. 결혼 25년차 된 남편에게 아내가 급히 익스프레스 메일을 보냅니다. 받아보니까 ‘여보, 지금 카펫을 깔려고 하는데 어떤 색깔이 좋을까요?’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샘플 열 개를 담아서 보냈어요. 집에서 카펫을 까는 일은 그렇게 중요해도 정작 그들의 대화 속에 전혀 사랑과 관심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제 결혼 2년차 된 이 젊은 여인에게도 남편은 일에 미쳐서 보기가 무섭게 또 나갑니다. 우연히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됩니다. ‘결혼생활을 더하면 좀 더 재미가 있을까요?’ ‘나도 한 때는 좋았지.’ 여러분 사랑도 통역이 필요해요.
남녀 평균 수명에 대한 통계가 있어요. 결혼한 남자는 74세, 결혼한 여자는 78세. 그런데 미혼남, 미혼녀로 혼자 사는 사람일 경우에는 남자는 65세, 여자는 69세랍니다. 어떤 분은 그러죠. ‘결혼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어떻게 할 거냐?’ 사별한 사람은 또 달라요. 배우자와 사별한 남자의 평균 수명은 57세, 여자는 54세. 그건 뭘 말합니까? 부부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라는 것이죠. 그게 성경에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부부 만족도를 물어보니까 결혼 5년차인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남자들의 만족도는 기대했던 것의 50%, 여자들은 어떨까요? 여자들은 자기 기대의 30%, 공주가 되려고 했는데 부엌데기가 된 거죠.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18개월에서 길어야 30개월이면 다 말라버리는 거죠. 그 다음 남는 것은 친밀감과 의무감입니다. 친밀감이 작아질수록 상대적으로 의무감은 커집니다. 이렇게 되면 비참해집니다. 그냥 저 사람하고 결혼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이건 비참해요. 의무감도 때론 필요합니다만 친밀감이 있어야 돼요. 이건 지혜가 필요합니다. 살려나가야 되고 키워나가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를 자꾸 저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은혜 받고 응답 받으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전 답답해요. 밤낮 집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안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결혼했으니 나를 위해 달라.’ 고 하는 그 자기 중심성, 그게 바로 죄에요. 그게 죄의 실체예요. 그 이기적인 태도, 그게 바로 죄예요.
해결책은 뭡니까?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되 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원리,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면서부터 일이 풀리는 것입니다. 지금 남편 버리고 다른 데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여자와 같이 살아봐야 아내만 못합니다. 꿈 깨야 돼요. 둘이 하나가 돼야 돼요. 그래서 서로 감정이 부딪히면 싸울 수도 있죠.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갈등이 왔을 때 어떻게 잘 해결하느냐가 해법입니다.
그것만 평생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더라고요. 공식이 있어요. ‘사랑의 방정식’,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대를 북돋워주는 말, 긍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감정이 때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요소와 5대 1의 비율을 유지해야 된다. 제가 어떤 분을 만났더니 자기 넋두리를 하시더라고요. 바쁜 사람 불러놓고. 핵심이 이래요. ‘왜 남편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죽을 때까지 뒤집어 놓을 거예요. 그건 방법이 없어요. 그 때마다 주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은혜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약속을 붙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부드럽게 말하래요. 싸우는 것도 출발이 더 중요하대요. 처음부터 너무 큰 목소리로 하지 말고 부드럽게 시작하래요. 온종일 운동하는 것보다 부부가 하루 20분 건강하게 대화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대요.
제가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합니다. 아침 5시 반에 나가서 한 40분 빨리 걷고 아령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거 해가지고 교회가 잘 된다면 왜 내가 이걸 마다하겠는가?’ 제가 건강해야 기분이 좋고 기분이 좋아야 생각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그래야 사사로운 이익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객관적으로 전체적으로 멀리 볼 게 아닙니까? 뻔한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조금 더 자고 싶은 유혹을 깨뜨리고 하루 40분 운동하면 건강한 영적 상태를 이루고 살 수 있습니다. 하루 20분 부부가 건강하게 대화를 하면 거기에 행복이 따릅니다. 그렇다고 집에 오자마자 ‘여보, 우리 20분 대화합시다.’ 그렇게 무디게 하지 마시고.
여러분 한국의 미래는 중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러시아 같이 강대국이 되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13,000명이나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돈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뭔가를 이룬 사람들도 아니에요. 성격이 좋은 사람들도 아니에요. 단 하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케리그마의 비밀을 만난 사람들이에요. 모자라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라고 모든 한인들이 가 있는 곳에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역사가 정치 경제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것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답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4.19가 내일 모레입니다. 잘 살아보자고 바르게 살아보자고 혁명을 일으키고 많은 젊은이들이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88올림픽을 넘어서서 월드컵을 넘어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내놓을 것 없는 그런 민족이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잠들어 있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신 거예요. 여러분은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약육강식의 정글 한 복판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때론 좌절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하니 우리의 무지였고, 우리의 불신앙이었고,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히 보며 오늘을 살게 하시고, 오늘 내게 맡기신 가정과 일터를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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