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체성경 말씀 묵상
지하 주차장은 언제나 만차滿車였다. 날씨가 나쁠 때나 특히 주말은 주차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박 장로는 주일에는 교회를 나가는데 갔다 올 때 조금 시간이 늦으면 거의 주차하기가 어려웠다. 직장을 은퇴하고 이곳 공기가 좋고 인구가 적은 도시로 옮겨온 지 이제 10년이 넘었다. 입주할 당시에는 주차가 수월 했다. 그런데 갈수록 힘들어진다. 아내가 대퇴골 골절로 잘 못 걷게 되자 지하 주차장의 101,2동 입구에 주차를 하면 좋은데 그런 행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입구의 기둥 옆에 딱 한 자리 좋은 주차 공간이 있는데 그곳은 옆으로 직진해 가는 길과 앞에서 직진해 오는 길이 만나는 T자로 된 곳으로 그 자리가 쉽게 비는 일이 없다. 그래서 늘 주차해 놓은 차 앞에 차를 세우고 경고등을 켜 놓은 다음 박 장로는 아내 신 권사를 하차시켜 승강기 앞에까지 부축하고 가서 기다리게 한 뒤 다시 돌아와 주차하고 함께 올라가야 했다. 10년 동안 교회까지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별 불편은 느끼지 않고 다녔는데 박 장로는 아내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이런 일들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곳 뿐 아니라 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신 권사는 이제는 교회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했으나 40년 넘게 다니던 교회를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교회는 주일 대예배에 맞추어 나가야 하는가? 교회의 장로직분을 은퇴한 지 15년이 넘어 강대상에서 대표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인도하지 않고, 거리가 멀다고 새벽기도는커녕 교회도 주일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인데 꼭 성수주일 해야 하는 것인가? 오래 다녔다고 그 교회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까운 교회에 나갈 수도 있고 또 방송예배를 드릴 수도 있는 일이다. 박 장로는 생각다 못해 담임 목사에게 신 권사가 몸이 불편한 동안 당분간은 가나안(안 나가) 교인으로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목사는 “‘그래도 교회는 나오셔야지요.’라고 하고 싶지만 거리도, 나이도, 날씨도 만만찮아 꼭 그렇게 운전하고 나오시라고 말할 수가 없네요. 그러나 권사님 몸이 회복 되면 봄에라도 나오십시오,”라는 답을 받았다. 그래서 당분간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순회하고 있는데 후배 장로 두 분이 찾아왔다. 장기간 교회를 멀리 하고 있으면 다시 나오기가 서먹해 지기 때문에 교회출석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박 장로는 이곳 교회들도 거리는 가깝지만 주차장으로부터 예배당까지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곳이 아니어서 자기 혼자 나가야 되는데 책을 읽듯 성경을 해설하는 설교에도 감동이 없고, 성경은 한 구절 읽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설교도 마뜩치 않아 결국 TV를 통해 안방교회에서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예배는 목사나, 교회를 보고 가는 곳이 아니며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지 않아요? 교인들도 장로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신방 온 장로들은 말했다. “저도 압니다. 신 권사가 아플 때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 하셨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을 이룬 많은 지체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각양 은사를 주셔서 교회공동체 각자에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게 하신 것을 압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교제하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사실 안방 교회에는 그런 교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교제하던 교우들을 떠나려고 하십니까?” “안 나가보니까 너무 편합니다. 교회도 안 나가고, 친구도 안 만나고, 설거지나 하면서 사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구원 받은 장로님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교회는 졸업했으니 안 나가도 구원은 예약해 놓았다는 말입니까?” “사실 나는 핑계가 없어서 그렇지 교회의 율법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고난 받을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억지로 40일 새벽기도에 나가고, 릴레이 중보기도에 이름을 등록하고, 노방전도에 나가지 않으면 소외되고, 십일조 헌금을 안 내면 손가락질 당하고, …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교회생활입니까? 나는 스트레스 받는 교인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건 원로 장로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닌데요?” “바울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는데 교회는 성도들에게 너무 많은 멍에를 메 준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요즘은 광적으로 교회에 열심인 사람이 많아서 ‘눈이 손더러 쓸 데 없다’, ‘머리가 발더러 쓸 데 없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비난을 받은 사람들은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풀이 죽어 있어요. 그들도 각각 받은 은사가 있는데 이를 개발해서 함께 일하자는 동역자同役者가 없는 겁니다. 결국 교회는 자생력을 잃고 하나님의 생기를 소멸하고 큰소리치고 활개 치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더욱 장로님이 나오셔야 되지 않아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저도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베드로는 교회에 지도자, 장로들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장하는 자세만 있지 본이 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훌륭한 지도자의 예화만 들고 그렇게 되라고 가르치면서 막상 자기는 딴 길을 걷고 있어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무거운 짐을 미리 진 지도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동역자들을 측은히 여기고 기쁨으로 이 고난에 동참하자고 격려하기는커녕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강요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장로님이 시무장로였을 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다시 교회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같이 온 장로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다. 아마 박 장로가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라고 생각 되었던 것 같다.
인도에 있는 두 청년 철학도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의문만 생기는 철학에 궁극적인 답을 얻고자 멀리 떨어진 티베트의 현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120세가 된 이 현자는 인생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간난신고 끝에 그곳에 도착해 깊은 산 속에 은둔해 있는 현자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인생의 모든 비밀에 대해 가르쳐 주기를 간청했다. 긴 침묵이 흐른 뒤 현자는 운을 떼었다. “인생은 깊은 우물이다. 그 우물을 스스로…”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다른 청년이 물었다. “현자여, 우리는 당신에게 인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간난신고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겨우 ‘인생은 깊은 우물이다’입니까?”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던 현자는 놀라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반문했다. “그럼, 인생은 깊은 우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묻지만 말고 자기가 깊은 우물을 찾아 그 우물물을 떠 마셔야 한다는 예화였다. 박 장로는 말했다. “지도자는 자신이 우매한 교인들을 깨우쳐 구원의 참 뜻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오만한 지도자의식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각자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의 본을 보이는 것이 교회공동체에서 우리들 자신이 할 일입니다. 지도자도 그것이 할 일이구요.”
박 장로는 두 후배 장로들이 떠난 뒤 자기는 정말 교회를 안 나가니 마음이 후련한가를 생각했다. 자기는 무교회주의를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교회주의자들도 결코 자기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한다. 내세를 믿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한다. 또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는 필요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조직은 법을 요구하고 법은 교인들을 구속한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가 조직한 조직체의 법의 노예가 되고 그 법을 교인들에게 강요한다. 교회에는 세속화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안 된다. 교회는 돈은 없을수록 좋다. 건물도 없는 것이 낫다. 사람이 없고, 돈이 없고, 건물이 없는 교회가 가장 바람직한 교회라고 무교회주의자는 말한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금요일에 박 장로는 이 작은 도시에 전통적으로 열리는 ‘금요시장’에 다녀왔다. 말하자면 가정부로 장보러 간 것이었다. 지하주차장의 101,2 동 입구 쪽을 향해 차를 몰고 들어오는데 이게 웬 일인가? 승강기 앞 주차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한 차가 비어 있는 주차 공간 쪽으로 왼편에서 T자형 길로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혹 그 차가 주차하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그 앞을 지나 자리를 비워 준다. 고마운 생각에 박 장로는 빨리 전진 주차를 하고 나와 입구 문을 통해 승강기로 아파트에 들어왔다. 그러다 생각하니 그 때 앞을 지나던 승용차가 직진해서 곧 바로 지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기가 주차한 공간에 후진주차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박 장로는 자기가 너무 얌체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후끈거렸다. 후진주차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는 바로 전진주차를 하고 후안무치하게 걸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오자 신 권사에게 그 말을 하고 다시 내려가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내려간다고 그 사람이 지금까지 있겠어요?” “아니야. 나는 주차하는 순간 그가 후진주차하려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차가 서 있으면 왜 바로 내려서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만일 만났다면 우리는 웃으며 좋은 해결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얌체가 되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고. 너무 찜찜해.” “노인이, 좀 얌체가 되면 어때요? 그게 어때서요?” “예수님 말씀은 ‘우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보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잖아?” “그래, 그 순간에도 전도를 못해 마음 아파서 그래요?” “아니야, 나는 너무 마음이 찔려 견딜 수 없을 뿐이야. 내려가 봐야겠어.” “왜요?” “그 자리에 차를 세워 둘 수 없어.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가 아니야. 좋은 자리를 누구에게든 양보하기 위해 비워두어야지.” “누가 그러면 알아 준데요?” “나는 지금 아음이 아파 이러지만 내 뒤에서 나를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 있어. 그분을 믿고 그분 뜻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야? 어디 있던지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해.” 그러면서 박 장로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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