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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우병우 아래 사법부였나 / 석진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24. 13:59

[한겨레 프리즘] 우병우 아래 사법부였나 / 석진환

등록 :2018-01-23 18:57수정 :2018-01-23 19:01

 

석진환
법조팀장

지난해 초에 들은 이야기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만나 식사를 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의 최대 현안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신설이었다. 별도의 3심 전담 법원을 만들어 대법원의 부담을 덜려던 게 양 대법원장의 구상이었고, 그는 임기 내내 이 문제에 매달렸다. 우 수석은 그 자리에서 상고법원을 빗대 “집안에 ‘첩’을 들인다고 ‘본처’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요”라고 했단다. 비유 자체도 저급하지만, 검사 출신인 그가 사법부 고위 법관들 앞에서 설마 그렇게 모욕적인 표현을 썼을까 싶어 그땐 흘려들었다.

22일 공개된 법원 추가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랬을 수 있겠구나. 우 수석은 청와대 관심사였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2심의 ‘항소기각을 기대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할 만큼 오만했다. 행정처는 ‘사법부 진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하며 쩔쩔맸다. 그러니 ‘첩’을 들먹이는 우 수석의 비아냥은 모욕 축에도 못 끼었을 것이다.

추가조사위의 보고서에는 사법부가 만든 문서라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 수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다. 행정처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겨냥해 “비공식적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정보를 수집하도록 함. 다만, ‘법관 사찰’ 등 큰 반발이 예상되므로 철저한 보안 유지가 필요함.” 나쁘고 위험한 일인 줄 알았다는 거다.

법원 내 학회 모임을 ‘사찰’한 보고서는 한심했다. ‘참석자 인적사항과 의견’ 등을 상세히 쓰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법관들이 뒤풀이에 합류한 사실 및 해당 법관들의 이름’도 적었다. 보고서를 쓴 판사는 친분이 있는 참석자에게 ‘누가 왔고 어떤 의견을 냈는지’ 캐물었을 것이다. 그러곤 은근슬쩍 “근데 뒤풀이에 누구 더 안 왔나?”라고 염탐해 행정처에 일러바친 것이다.

판사들이 쓴 댓글을 수집한 보고서도 있다. “징역 3년 법정구속, 속이 시~원하다!!”, “간만에 속이 확 풀리는 소식이네요.”(원세훈 2심 선고 뒤 판사들이 모이는 다음 ㅇ카페 댓글 22개 중 일부)

이 보고서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접한 국정원의 그 어떤 문건보다 ‘한 수 위’였다. 디테일하고, 여러 변수를 고려해 조심스러운 접근을 주문하며, 다양한 대안을 제시한다. “개설 3개월 만에 가입 법관이 300명을 넘고, 매주 30명 이상 증가할 정도로 급증세. 2월 들어 1주당 10여명 선으로 증가세 다소 둔화.” 이렇게 동향을 분석한 뒤 ‘운영자의 카페 폐쇄 유도’, ‘선배 법관이 대거 가입해 내부 변화 모색’, ‘전체 법관에게 익명글 작성 주의 공지’ 등 여러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좋은 머리’를 이렇게 ‘나쁘게’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금 법원은 과거에 겪어보지 않은 대형 위기를 맞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고민도 클 것이다. 그런데 23일 대법관들이 긴급회의를 한 뒤 내놓은 일성은 “외부 기관에 특정 사건이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 언론 보도에 깊은 유감”이라는 게 전부였다. 일선 법관들뿐 아니라 국민들이 받은 충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대법원의 이런 대응이 더 큰 역풍을 부를까 걱정이다. 우병우 수석과 당시 청와대도 처음엔 ‘국정농단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정권이 풍비박산 났다. 청와대에 매달려 대법원장이 그토록 만들려고 했던 상고법원도 물건너갔다.

“위기가 닥치면 꼬리 자르기를 하지 말라. 대중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충격적인 수습책을 일거에 내놓아야 겨우 수습할 수 있다.” 기업이나 정부, 정당이 위기를 맞을 때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사법부라고 예외가 아닐 것이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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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9073.html?_fr=mt0#csidx3b1e7b12d7f4f7ba3841fdacf740b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