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시인
김기춘, 조윤선 등에 대한 블랙리스트 재판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1심 판결보다는 낫다. 박근혜도 공범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블랙리스트 실행이 우파 정권이 우파를 육성하는 일은 ‘집권 정부 정책 기조’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김기춘의 논리도 ‘정부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차별대우하는 순간 전체주의로 흐른다. 문화의 자율성, 불편부당의 중립성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바로잡았다. 조윤선은 2년이 선고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정무수석을 할 때 정무수석실은 교육문화수석실 등과 함께 블랙리스트 실행의 몸통이었다. 그는 2016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블랙리스트 실행 업무의 핵심이었다. 1심에서는 국회 위증 부분만 인정되었다. 그의 남편이 또 다른 위임되지 않은 사법권력인 한 초대형 로펌의 핵심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형량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들이 많다. 특검과 법정의 노력은 일부 인정하지만 4년, 2년 뒤에 0을 하나씩 더 붙여야 한다는 게 평범한 시민들의 인식이다.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부여되어야 한다. 1100만명이 법정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으로 ‘헬조선’을 살아가는 세상. 200만명의 청년 실업자들이 ‘흙수저’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권력자로 군림하며 살아온 그들이 우리 모두의 주권을 모욕하고 조롱한 일. 국가기구를 사유화해 범죄집단화하고, 전체주의 망상에 빠져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부정한 죄. 헌법 9조 문화국가의 원리와 21조 표현의 자유와 헌법 19조 양심의 자유와 헌법 11조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을 짓밟은 죄에 비하면 솜털 같다.
1년 가까이 대한민국 헌정이 중단되게 한 죄. 최소 1700만명 주권자들이 몇 달 동안 거리에 서야 했던 죄 등을 생각하면 4년, 2년, 1년6개월은 너무나 가볍다. 더더욱 그들의 6년 후, 4년 후, 2년 후, 1년6개월 후 도대체 우리 사회는 무엇이 바뀌는 걸까를 생각해보면 기운이 빠진다. 우리 곁에 지금도 ‘국회의원’ 나리로, 교수로, 전문가로, 건물주로, 사장님으로 있는 수많은 ‘김기춘과 조윤선’을 놔두고 도대체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재작년 겨울부터 봄까지를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무슨 말도 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정치세력의 형성과 조금은 더 나아간 급진적 의제를 꿈꾸어 보았다. 끊임없이 기존 정치세력과 싸워야 한다고도 해봤다. 4·19의 김수영처럼, 5·18의 윤상원과 그 누구처럼, 6·10 명동성당 배식대 앞에서 국밥 한 그릇을 받아들던 평범한 민중 한 사람처럼 나는 다시 패배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조의 변화까지 가기엔 우리 모두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집강소라는, 코뮌이라는, 평의회라는 그런 모든 직접민주주의는 아직은 먼 꿈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어, 근래 몇 개월 동안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일을 하고 있다. 연수입이 300만원도 안 돼 힘겨워하는 동료 문화예술인들께 어떤 우정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쯤은 이 척박한 땅에서 진정한 문화예술을 지키기 위해 가난하고 헐벗은 채로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나도 풀잎 하나 같은 마음이라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았다. 수년에 걸쳐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문체부 관료와 산하기관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국가정보원, 특검, 감사원 등의 협조도 쉽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등 국회 내 야당은 끊임없이 진상조사를 방해했다. 결국 2018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 블랙리스트의 또 다른 몸통들은 그렇게 살아 있고, 여당은 그런 야당을 실체로 인정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 참담한 일들. 여전히 문화 부분은 바뀐 게 없다. 국가는 여전히 모두를 통치의 대상으로, 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바꿔보자고 김기춘 등 전체주의자에 대한 역사적 판결이 나온 날. 한국 사회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회의’를 제안한다. ‘대토론회’를 제안한다. 1월30일 대학로에서 모이자는 제안을 해본다. 그간의 과정과 쟁점을 공유하고, 문화 쪽 적폐 청산에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보자는 자리다. 전체주의 권력의 민주화를 위해 자립과 자율의 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보자는 자리다. 문화예술 스스로를 반성하고, 거듭나보자는 자리다. 진정한 제2의 촛불항쟁으로 우리가 먼저 나서보자는 자리다.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평등과 평화를 이야기해 보자는 자리다. 이제 다시는 어떤 전체주의도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간절하게 얘기해보자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