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쏟아지는 이재용 2심 판결
합병·순환출자 고리 해소 과정서
정치권력이 도운 사실 드러났지만
재판부 “전형적 정경유착 없었다”
합병·순환출자 고리 해소 과정서
정치권력이 도운 사실 드러났지만
재판부 “전형적 정경유착 없었다”
‘특혜대출’ 방식→‘경영권 편법승계’
정경유착 양상 변했는데 눈감아
5일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문을 나서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정치권력과 뒷거래를 통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 거액의 불법·부당 대출, 공적 자금 투입 등 전형적 정경유착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가 지난 5일 2심 판결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2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과 의미를 짚는 대목에서 1960~90년대에 벌어졌던 과거의 정경유착 방식들만 ‘전형적 정경유착’으로 규정지으면서, 1990년대 후반 이후 만연한 우리나라 재벌의 편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나타난 정경유착 방식에는 아예 눈을 감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항소심 재판부가 밝힌 정경유착의 유형은 과거 정치권력의 힘이 재벌을 압도할 때 나타났다.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경영 은퇴까지 내몰린 사건에 대해 아들인 고 이맹희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주기로 하고 이뤄진 일”이라고 회고록에 밝혔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일해재단에 약 600억원을 낸 대기업들이 각종 특혜를 받았고,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정부 고위층에 150억원을 준 한보그룹이 수서택지개발지구를 특별분양받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런 개발연대 시기의 정경유착 방식을 잣대로 이번 정경유착 사건을 재단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정권과 재벌의 힘이 역전되면서 정경유착은 새롭게 바뀌었다. 몸집을 키운 재벌의 주요 관심사가 사업 확장이나 특혜 대출보다 편법·불법 승계로 바뀌었다. 이 역시 삼성이 ‘선두 주자’였다. 1996년 이재용 부회장 남매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매입, 1999년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인수 등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수백억원을 들여 매입한 두 회사의 사채는 2014년 나란히 상장하면서 이들의 보유 지분은 수조원이 됐다. 2008년 법원은 삼성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사채 인수 목적과 관련해 “증여세 등 조세를 회피하면서 이재용 등에게 회사의 지배권을 이전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 항소심에서 인정하지 않은 ‘경영권 승계 작업’을 10년 전에 일찌감치 인정한 것이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는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더 빨라졌다. 또 재벌친화적인 박근혜 정부에서 최대한 진행하려고 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그중 하나다. 제일모직 지분이 많은 총수 일가에게는 이익을 주고, 국민연금공단 등 삼성물산 주주는 손해를 보는 합병비율이었다. 엘리엇 등 해외 투자자가 끼어들면서 합병 성사가 불투명해졌다. 이에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지시로 이뤄진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합병 찬성이 합병 성사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합병으로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대주주가 되고, 삼성물산 보유 삼성전자 지분(4.06%)까지 지배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직권남용과 배임 등의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밖에도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생긴 신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려고 팔아야 하는 삼성물산 지분을 1000만주에서 500만주로 줄이는 데 도움을 줬다.
이에 1심 재판부는 “일련의 개별 현안들의 전개는 승계 작업”이라며 “삼성이 경영권 승계를 대가로 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뇌물을 준 정경유착 사건의 전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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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건의 본질이 이 부회장 승계 작업을 위한 정경유착이라는 사실은 2015년 당시 증권가 보고서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2심 재판부의 판단은 재벌과 정치권력이 유착한 편법승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