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와서 아침을 먹어라[예수님의 흑백 얼굴사진]/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25. 19:25

와서 아침을 먹어라 (21:1-14)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2 No.11

성경본문[개역개정]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여러분, 예수님의 흑백 얼굴사진을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눈 녹은 산을 찍은 모습인데 그 안에 예수님의 얼굴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의 특징은 어떤 사람은 그 사진 속의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도 못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 네 식구 중에 두 사람은 한 눈에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얼굴이 보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제가 오랫동안 그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예수님의 흑백사진 얼굴에 담긴 예수님의 눈동자와 제 눈동자가 딱 맞는 순간 그 시간이 오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이게 콧등이 아니냐, 이게 눈이다.’ 가르쳐 주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눈의 초점끼리 맞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친구 집에 갔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가 그 액자 속에 담긴 예수님의 눈과 제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어디에 앉아 있든지 항상 그 얼굴은 저를 꼭 바라보고 따라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 흑백 얼굴 사진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중국 오지에 어느 한 사진사가 눈이 녹아 있는 산언덕을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그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믿음이 약합니다. 나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구하기를 아주 소박하게 예수님의 얼굴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어디선가 사진을 찍어라.’ 하는 그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가 사진사이고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를 말씀하시는지 알 길은 없었습니다만 자기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 눈 녹은 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현상을 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찍을 때 보지 못했는데 그 앞에 나타난 눈 녹은 산의 모습에 예수님의 인자한 얼굴이 담겨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흔히 액자에 담아서 팔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이 그 예수님의 얼굴사진을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진을 매우 좋아합니다. 흑백으로 되어 소박하고 그런 신앙고백의 스토리가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 작은 글귀가 있는데 그 글귀가 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다.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아무리 그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그러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뒤집어놓고 왕이 되실 줄 알았던 예수님이 덜커덕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걸 보고 제자들은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기 바빴어요. 그리고 숨어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들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는 그 소식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는 그 사건보다 더 큰 혼란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건 우리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요, 슬픔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 죽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의 갈 길이요,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것은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릅니다.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더더욱 체험한 적도 없습니다.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미리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겪어본 일이 없기에 너무나 혼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몇 번씩 만나면서도 그들이 신중히 내린 결론은 이제 다 그만두고 갈릴리 고향으로 가서 고기나 잡겠다. 원 위치 하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까지 예수님을 3년 따라다니고 이제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나의 사고기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기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3년 동안의 모든 걸 다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도, 예전의 고기 잡던 그 자리 그 배에 올라서 그물을 붙들어야 내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내 위치, 내 인생의 좌표를 다시 한번 바로잡아 보겠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내 앞에 펼쳐진 일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기 위해서 다시 갈릴리 그 옛날 바닷가 그 자리 그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그 복음서를 읽어 보면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고 이해할 수 없어하고 당황해하고 심지어는 숨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신 새벽을 기억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어지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믿어진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다시 주님이 고기 잡고 있는 그 호숫가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왜 그러셨죠? 다시 나타나서 다시 만나주시고 다시 보여주시고 다시 말씀하시고 저들과 함께 하는 그 만남을 통해서 부활의 사건을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앙은 그렇게 천지가 개벽하듯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되기까지는 준비작업이 상당히 오랜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오랫동안 흔들어놓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어요. 병원에서 환자가 퇴원합니다.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 합니다. ‘의사 선생님 덕분에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아니지요, 선생님의 의지력이 강하니까 걷게 됐지요.’ 환자가 말합니다. ‘, 무슨 말씀을요. 치료비 때문에 차를 팔았거든요.’ 동문서답이지요. 병원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래요.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물었어요. ‘여러분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거 쉽게 알기 어렵거든요. 고민하다가 한 분이 용감하게 손을 들어 대답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먼저 죄를 지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지혜로운 거 같지만 사실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선뜻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믿음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 왜 내가 이렇게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하느냐? 때로는 이렇게 섭섭하셔서 책망도 하셨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리와 앉아라. 노트 펴라. 연필 들어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보니 고기 잡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들은 밤을 세워 고기를 잡느라고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나 철학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셨습니다. 이리 와서 아침을 먹어라. 주님이 벌써 숯불을 가져다가 준비를 하시고 고기도 구워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수준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부활하시면서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천사들을 동원해 나팔을 불지 않으셨습니다. 요란하게 만찬을 펼쳐놓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요구하신 것도 아니요, 거기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요, 먼저 배고프고 지쳐있는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부활절 점심을 푸짐한 뷔페로 준비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일상의 평범한 식사에 동참하십니다. 조금 전에 그랬죠?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정말 그렇게 하는데 식탁에 자리를 하나 더 준비해 놓으시더라고요. ‘이게 뭐냐?’ 그랬더니 이거는 예수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굉장히 상징적인,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식탁에 함께 하신다.

여러분, 식사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이것 다 먹자고 하는 일이데, 굉장히 철학적인 말입니다. 식사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적인 필요를 채웁니다. 오죽했으면 가족을 뭐라고 말합니까? 食口, 먹을 식, 입 구,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 식구예요. 육체적인 필요를 채우고 식사를 통해 하루에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사회적인 필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함께 살되 남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솥밥에 둘러앉아서 거기서 함께 식사하면서 사랑과 정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식사를 통해서 그 집안의 전통이 전달되고 그 집안의 가치, 인생의 가치가 식사 자리를 통해서 전달이 되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식사는 거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날마다 하루 3번 준비해야 합니다. 펼쳐놔야 합니다. 함께 와서 먹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먹었으니 이제 치워야 합니다. 우리 하루 일과에 자그마한 일들의 연속이 식사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식사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식탁에는 고기도 올라오고, 야채도 올라오고, 또 여러 가지가 올라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의 식탁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소가 죽고, 돼지가 죽고, 희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가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날마다의 식사를 아주 거룩한 예식으로 기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베풉니다. 오늘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세끼의 식사는 자그마한 성만찬입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영적인 생명의 역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식사를 통하여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지만, 식사기도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것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오늘도 이 음식을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식사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로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다.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는 이시라.’

 

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어난 일이기에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떨고 심지어는 해석할 수 없어 혼돈 가운데 빠지고 멀리 고향으로 자기의 옛 자리로 달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우리에게 식탁을 베푸시고,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루 세끼 우리의 식사 속에 함께 하시고,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고, 결국 우리 가정에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주님과 오늘 하루를 기쁨으로 살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