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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하시는 일(2월18일 주일 설교)(요9:1-12) / 서대장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2. 25. 05:03

하나님이 하시는 일 9:1-12

오늘 주신 말씀 요9:1-12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제목으로 함께 귀한 은혜의 시간되기 원합니다.

요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가 설날 열려 금메달을 딴 최민정 선수가 온 국민을 기쁘게 해주고 있네요. 지난번 500m경기에서 두 번째로 들어와 은메달인줄 알았는데 실격이 되어 울먹이던 선수가 이번에는 활짝 웃네요.

나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고 기쁨이 한껏 업 되었지요.

그런데 남자 선수들이 한꺼번에 넘어져 그만 남녀 금은을 휩쓸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었나 했는데 금메달 하나 동메달 하나로 족해야하네요.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선수들이 참 아름답네요..

가슴 졸이며 안타까워하고 함께 기뻐하며 응원하는 것 이것이 팀코리아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언제 빙상경기에 관심이 얼마나 있었다고 실상 스케이트는 소위 때 잠간 타본 것이 전부인데 뭘 알겠어요?

우리나라 선수니까 그냥 응원하고 기뻐하고 안타까워하고 하는거죠.

워낙 변수가 많아 넘어지고 실격되고 판정이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것이 마치 인생살이 같습니다.

우리인생이 끝나고 최종 판정을 받을 때 금은동은 아니지만 천국행인가 지옥행인가 결정되는 그 순간 저렇게 초조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아니 예수님과 함께하면 이미 판정이 끝났으니 걱정 염려 두려움 없이 오직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되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7대표적중 여섯 번째 표적으로 소경 거지의 눈을 고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치유하신 것은 소경이 아무 이유 없이 악성 댓글로 비난 받고 있는 모습을 측은히 여겨 그가 소경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시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이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1-4)

요즘 전직 대통령이 불법 댓글 조작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권세가 살아 있을 때는 조카도 형님도 부하도 기업도 모두 한편이더니 이제 죽은 권력이 되니 내부에서부터 폭로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하는가 봅니다.

오늘의 사건은 AD29년 초막절과 수전절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1-2절에서 제자들이 그 소경된 사람이 소경된 원인이 그 죄 때문인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가 자기 죄 때문이라고 자기를 학대하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신자들 중에도...교회안에서 조차...

사람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죄하고 징벌을 내리신다는 구약의 말씀(20:5,14:18,...)이 있지만, 하나님은 조상의 죄 때문에 그 자손까지 불행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비의 죄를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않을 것(18:20)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상의 잘못된 죄악의 풍습을 악습을 답습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때 만 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조상의 선행은 천대까지 축복이 되고 악습은 3-4대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핍박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기에 그들이 정죄를 받을 것이라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불행이 모두 죄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욥의 큰 시험은 그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시험하고 그의 신앙을 더욱 성장시키려는 선한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42:5)

이웃이 불행을 당하거나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죄 때문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이웃이 불행을 당하게 되면 사랑으로 위로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절이 되는 거겠죠.

3절은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그가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시는 귀감으로 쓰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 소경된 거지는 소경이라는 불행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만나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주님과 친절하게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셔서 구름이 일어나면 온 이스라엘이 군장을 메고 출발하고 멈추면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함께 해셨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성령께서 임하실 때 생기를 얻고 담대함을 얻고 능력을 소유하며 진실한 교제와 나눔을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예배 중에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고자 결단하게 되고 어렵고 낙담한 사람까지도 예배를 통해 소생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견고해지고 삶이 바뀌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영혼의 목마름과 상함이 해결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부요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택한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시고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둘째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5-8)

때가 아직 낮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며,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물리치고 악을 물리치고 구습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사물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언제입니까?

소경처럼 장애가 있으면 보지 못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에는 볼 수 없지요.

늙어서 눈의 기능이 퇴화하면 볼 수 없지요

예수님은 소경을 보면서 너희들도 저 소경처럼 보지 못할 때가 이르리니 지금 볼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충성해야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맨 먼저 잃는 것이 시력입니다.

운동하는 순간도 눈이 빨라야 합니다. 일을 할 때도 눈썰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를 포착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 받아야 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바리새인처럼 내가 이 교회를 개척했는데 내가 목사인데 내가 장로인데 권사인데 하며 맹인이 되어 교만해지고 스스로 본다고 으스대고 있습니다.

육체의 눈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의 눈입니다. 육체의 눈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말씀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불러 주시고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일 하라고 은사와 사명을 주실 때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 영혼이 찾아 안수하시거나 와 주신 주님의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바로 이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6절에서 주님은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 주십니다.

다른 소경을 치유하실 때는 말씀으로만 치유하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서 최선을 다해 그에게 치료의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소경이 뭐래도 발라주면서 말씀해야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귀머거리는 손가락을 그 양귀에 넣거나 벙어리에게 침을 그 혀에 대거나 눈에침을 밷으시거나 수족을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는 말씀만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하신 것은 각 사람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주님의 사랑과 치유의 손길을 가장 확실하게 체험하여 확신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임하시시고 은사를 주시는 방법은 각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저사람하고 나하고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사와 사명이 있으니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명절 이 후 주변 온천이나 스파가 대만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구자도 있고 몸이 잘난 사람도 있습니다.

벌거벗어 놓으니 누가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문밖에서 구걸하는 사람조차 우수한 유전자가 있어던 것 아닐까?

수 만년 동안 아니 세대론자들의 말대로 수 천년동안 저렇게 대를 이어 생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보기에 못나고 잘못된 것 같지만 이 땅에 930회가 넘는 전쟁과 약탈과 핍박과 학대를 이기며 살아난 위대한 사람들이다. 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일그러지고 지저분한 사람조차 귀하게 보입니다. 대단해 보입니다. 넘어진 심석희도 황대현도...

7절에서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실로암 못은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예루살렘 성의 식수원이 되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전도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소경이 실로암에 가서 씻고 고침을 받은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소경이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아 구원에 이른 것처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 천국으로 보냄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입어 그 죄를 씻음 받는 사람을 주님은 아버지께로 보내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눈을 떠 보게된 소경되었던 자가 주님을 찾아온 것 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천국의 소망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 합니다.

 

셋째로 증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9-12)

사람들이 눈을 뜬 소경을 보고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자이다 아니다하고 논쟁하자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로다 (에고 에이미)라는 요한 복음 특유의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밝히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소경되었던 자의 자기 선언입니다.

논란에 휩싸이면 자기에게 비난이 쏟아질 것이 자명한데도 특별한 체험을 한 이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바로 그 소경 거지였던 자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Ego sum, I am the one)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할 증거해야 할 말입니다.

부끄러운 과거, 밝히고 싶지 않은 전력일지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밝히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하시는 주의 능력과 예수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알게되는 좋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허물투성이의 과거가 누구에게도 자랑 거리가 되지 못하나 중요한 것은 새롭게 변화된 현재의 모습이므로, 과거의 자신을 밝힘으로써 전혀 새롭게 변화된 현재의 모습에 대한 벅찬 감격과 그렇게 만들어 주신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증거하는 삶인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단들에게 빼앗긴 말중 증인의 삶을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빼앗기고 이런 말을 하면 혹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오해받을까봐 우리가 자랑스럽게 사용해야 할 말을 쓰지 못하거나 위축되면 안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인간 이성으로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기에 소경이 내가 그로다고 자기 선언을 하자 군중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또다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사람의 인생에 나타난 놀라운 변화의 근원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의문불변사인 포스(Πϖς)는 어떻게(how), 어떻게 하여( in what way)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원인과 방법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누구의 죄 때문이었는가에서 그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라는 강력한 의문과 호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게 마련이고 살아야 하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로부터 어떻게변했느냐는 질문에 이 변화의 경험인 예수님으로 인함임을 그래서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증인의 삶을 살아내야 될 줄 믿습니다.

10절 말씀처럼 예수라 하는 그 사람 즉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분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아직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만큼, 내가 받은 은혜만큼, 내 달란트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차용하지 않고 덧입히지 않고 진솔하게 증거하는 겸손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인의 삶이란 현란한 미사여구나 허풍이나 과장이나 합리화가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진솔하게 사실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방법과 과정 , 그리고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가감없이 설명하였을 뿐이듯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삶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으며, 내가 어떻게 순종하였고 ,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 물을 때 알지 못한다(우크 오이다 Ούκ Οδα)고 답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예수를 사귀어 알거나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여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단순한 지적인 앎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통하여 알게되는 인격적인 앎을 말하는 오이다(Οδα) 라는 동사가 말하듯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그 사람 메시야라고 구세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야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1-4)

둘째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5-8)

셋째로 증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9-12)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과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시기 위해 예배를 통해 교제하십니다.

세상을 죄악으로 멸망한 세상에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승천 하셨습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다시 오마 약속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증인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진심으로 감사하며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 오늘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서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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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9:1-12) / 서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