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거룩하라(An Everyday Exhortation : Be Ye Holy)
A. 토져 (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성경을 부지런히 진지하게 연구하는 자는 반드시 "개인의 거룩에 관한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다!"라는 분명한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자세히 살펴보고 생각해 보았는데, 안 살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인지를 분별하기 위하여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오래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항상 명령하는 말씀 보다 권면하는 말씀을 좋아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과 행실의 거룩에 대해 강하게 권면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둘째,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도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주장이 너무나 단순한 나머지 그 주장에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도이며, 지금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구약성경의 진리와 완전하게 일치할 뿐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과도 일치하는 명령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간과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그러한 사도의 명령을 무시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양자나 교회가 이 사도의 명령을 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우리가 "너희는 거룩하라"는 이 명령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의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 명령을 다루어야 하며, 어떤 그리스도인들 같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에게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문제에 관해서 성경을 조사한 후 오늘날의 어법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고려해 본 후, 좋으면 사겠다. " 라고 말할 권리나 특권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것을 사지" 않아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경솔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독교와 영성에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로부터 받은 명령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 스스로 그분의 원하심과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을 우리의 판단으로 가늠질 한 후 원하는 바를 결정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에 관한 지위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명령들을 내게 적용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멍에를 매어야만 한다거나 우리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무시해도 됩니다.
이 점에 관한 신악성경의 기록은 단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시 예수님을 따르다가 떠났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남은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오늘날 여전히 나의 대답이 될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님,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오매, 저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 말씀은 지혜로운 말씀이며, 참으로 사랑과 헌신을 낳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에서 억지로 복종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영적 성숙에 있어서 많은 점에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권능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그분의 말씀을 거절한다면, 어느 길로 돌아서야 하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서 돌아선다면, 누구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나요?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대하여 옛 방식을 고수합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생각한다면, 스스로 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며 장차 올 가혹한 심판을 얻는 것이라고 확고히 믿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앞에서 거룩의 문제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거룩(holiness)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몇 번 나오는가를 직접 색인(Concordance)으로 상세히 조사했는데, 그 결과 650번이 쓰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거룩하게 하다(sanctify)"와 "거룩케 된(sanctified)" 등과 같이 영어에서 유사한 의미를 갖는 단어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동일한 의미를 갖는 단어를 모두 세었다면 거의 천 번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거룩한(holy)"이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천사들의 성품, 하늘의 특성,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천사들을 거룩하다고 칭하며, 사람의 일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사들을 "순찰자(watcher)"와 "거룩한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늘에 대하여 부정한 것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형용사 "거룩한(holy)"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거룩한 성령, 거룩한 주님, 거룩한 전능 주 하나님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들 단어들은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 대해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님께 부여될 수 있는 최고의 형용사와 하나님께 부여될 수 있는 최고의 속성이 거룩이며,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천사들조차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로 거룩이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나는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는 구절에 관한 어이없는 해석들을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 나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이 고안해 낸 거룩에 관한 이론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것을 오용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 성경 구절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 조건을 어떻게 만족할 것인가를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거룩"이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며 피했던 일종의 소극적인 경건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거룩은 도덕적 완전함, 곧 실제적으로 친절, 긍휼, 순결, 도덕적 무흠, 경건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속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항상 적극적인 정도와 순수함의 정도에서 고려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기록된 구절은 항상 하나님께서 거룩과 순수함의 정도에서 친절하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순결하시며, 흠이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처럼 절대적인 거룩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거룩의 정도에서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거룩이 적극적이며, 왜 거룩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거룩한 사람도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건의 소극적인 표준, 곧 다른 사람들이 만든 방식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어려운 시험의 때에 자신들의 경건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수한 거룩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이 실패한 경우는 모두 처음부터 참된 거룩의 정도가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 교회사의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겸손한 사람들의 증거와 주석을 읽고 마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들로부터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와 그 개념이 도덕적 의미를 우선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순결하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의 어근(語根)은 초경험적인 것, 이상하고 신비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고찰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것, 경외로 가득한 것, 신비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관하여 말합니다. 거룩이 하나님과 관련될 때 이 임재는 지고(至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더욱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로 세웁니다.
거룩은 어떤 사람들에게 임하여 머물렀던 것으로서, 다른 세상과 신비한 속성과 차이를 아는 감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의 의미를 알았지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면, 그는 마귀의 속임수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사탄은 진리를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 때마다 모조품을 만들어냅니다. 사탄은 그 진리를 그러한 악한 빛 가운데 놓고는 열심히 그 진리에 순종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서 그 진리를 떠나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사탄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를 모방하는데 있어서 매우 교활하고 노련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조품을 진품으로 저당을 잡히고는 이내 진지한 마음을 가진 성도가 두려워서 달아납니다.
나는 자신들을 거룩한 자처럼 칭했던 자들이 교리를 회개에 장애가 되는 딱딱한 공식으로 만들도록 한 사실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천박과 탐욕과 교만과 세속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결과들을 보았습니다. 거룩을 외친 후 이기적이고 자만에 찬 삶을 산 자들로 말미암아 진지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거룩의 모든 개념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전히 사도의 명령의 거룩한 권위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를 요구하시며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교리는 자주 심하게 상처를 입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결하시고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명과 영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긍정적인 답을 줍니다.
이 특별한 속성과 신비한 임재를 지닌 선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바르며,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길을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이 세상 왕국보다 훨씬 뛰어난 왕국의 향기를 나를 때, 나는 언제든지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예(例)로써, 모세가 산에서 내여 왔을 때 이러한 표(標)와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모세는 40일 낮과 밤을 산에서 있었으며, 그가 돌아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세히 설명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 그의 얼굴에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거룩한 임재의 이 신비한 속성은 우리 시대에 이 땅을 완전히 떠나버렸습니다. 오래 전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의로운 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 넘치며, 또한 두려우며,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며, 놀라우며, 하늘에 속한 의미에서 의로운 것으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신비스러운 불이 찬란한 빛으로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나는 이 후자의 속성이 이 땅을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용어로 격하시킨 자들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잡담하듯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의(義)에 대해 말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과 그 빛나는 속성이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에서 기억하듯이, 이 신비한 불은 떨기나무에 있었습니다. 작은 불은 그것이 번져서 겉잡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가 두려워하며 작은 불이 타고 있는 떨기나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렸던 것을 봅니다! 모세는 그 신비한 속성을 만났습니다. 그는 밝히 드러난 임재로 인해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후, 혼자 산에서 나팔 소리를 들을 때, 모세는 떨며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되풀이해서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그 세키나(Shekinah)에 관해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세키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이 거룩함을 훌륭하게 요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선명히 보이는 덮는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중기로 만든 것이 아닌 신비한 구름으로서, 신비하게도 전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습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그 구름은 빛을 내기 시작하며, 어둠이 내리면 이스라엘 위에 걸린 한 거대한 등불과 같이 밝게 빛났습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진영 안에 있는 각 텐트는 그 위를 덮은 이상한 세키나로 인해 밝게 비쳤습니다. 그 누구도 그 불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연료를 더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불을 지피거나 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시계(視界) 안으로 친히 오셔서 자신의 임재로 이스라엘을 비추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진영을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 작은 아이에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엄마가 놀라운 것을 보여주고 싶단다. 저것을 봐!"
아마도 그 아이가 대답했을 것입니다. "저게 뭐예요, 엄마?"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저것은 하나님이시란다. 하나님이 저기 계신단다! 우리의 인도자이신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저 불을 보았단다. 나중에는 저 불을 산에서 보았단다. 우리가 이집트를 떠난 이후, 저 하나님의 불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왔으며 몇 년 동안 내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단다."
"그런데 어떻게 저것이 하나님인지 알 수 있어요, 엄마?"
"저 불 안에 있는, 다른 세상에서 온 신비한 임재 때문에 알 수 있단다"
이 하나님의 임재인 세키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특별한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세키나는 공경과 놀라움과 엄숙함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영광스러운 것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 있었던 것이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다시 오순절에 내려왔습니다. 그 동일한 불이 각자 위에 임했으며, 보이지 않는 가시체(可視體)로 그들 위에 머물렀습니다. 만약 그곳에 사진기가 있었더라도, 그 불의 혀들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불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불은 이 거룩한 요소 안에 계시거나 또는 이 거룩한 요소로 둘러싸인 분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서, 그 불이 너무나 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을 때, 마치 늑대들이 밝은 야영 모닥불(campfire)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듯이,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았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 "그들이 감히 함께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가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금하거나 제한했을까요?
아무도 겸손하고, 무해하며, 순결하고, 더럽지 않은 이들 기도하는 사람들 가까이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나올 수 없었으며, 몰려와서 그 곳을 짓밟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행각 멀리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는 이들 무리 안에 있는 거룩한 속성, 신비하고 거룩한 임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후에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신비한 충만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몇 사람은, 너희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 믿지 않는 이들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한 후 ,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한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한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거룩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듯이 그러한 임재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합당하게 세워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내적 생명으로 시작하는 우리의 삶 전체가 더욱 하나님을 닮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닮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러한 신성하고 신비한 속성과 임재가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이러한 거룩한 빛을 받은 몇몇 하나님의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겸손과 온유로 인해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과의 교제가 이전에 받았던 모든 가르침보다도 더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만난 성경 교사들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머리만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하고 신비한 속성과 하나님의 인격과 임재를 아는 형제들은 내 마음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주(主) 안에 있는 형제에 대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를 아십니까?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유창한 혀보다도 더 귀중한 이 신비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임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날마다 그 임재를 인식하며 조용히 확신 있게 살 뿐입니다!
실제로 나는 모든 유창한 혀를 두려워합니다. 언제든지 성경을 신속하게 펼치며 어떠한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질문을 다 해결하며, 많은 경구(警句)를 인용하며, 영적인 문제는 무엇이든지 답을 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떠한 사람의 말보다 더 감동을 주는 침묵이 있습니다. 때로는 의미를 띤 얼굴과 고개를 숙인 인사가 최고의 유창한 설교자보다 더 신성한 진리를 전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도덕적으로 일치시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이 당신 위에 머물게 하시도록 당신의 영적인 삶을 일치시키십시오. 당신 위에 기묘하시고 신비하신 분의 그 속성이 머물게 하시도록 당신의 영적인 삶을 일치시키십시오.
당신은 그 속성을 배양할 수 없으며 심지어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이 겸손의 속성입니다.
오, 매 순간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망하여, 사람이 스스로 배양하거나 힘들게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증거에 의미를 주는 이 속성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기를! 하나님의 임재는 달콤하고 빛나는 향기입니다. 나는 우리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기를 제안합니다.
이제 잠시 멈추고, 누가 "토져씨, 당신은 감정으로 판단하지 않는군요. 그렇죠?"라고 물어오기를 기다려야겠습니다.
글쎄요, 나는 감정의 문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것에 관해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감정은 지식의 기관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지식의 기관입니다.
이 사실을 전개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해 보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실지로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혀 들은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나 종족은 이 세상의 모든 사전에 있는 정의들을 기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가 크고 곱슬한 붉은 색 머리를 가진 주근깨가 있는 한 순진한 소년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의 감정이 온 존재의 모든 부분에 이를 때, 그 소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즉시 그 소년은 사랑에 대하여 온갖 사전이 부여한 의미보다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사랑은 단지 그것을 느낌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태양의 따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오늘 날씨가 따뜻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는 결코 당신이 말하는 바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따뜻하게 비추는 날 외출한 정상적인 사람은 곧 날씨가 따뜻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당신은 태양에 대하여 설명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느낌으로 더 많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는 지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오직 가장 깊은 존재인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속성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감정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옛 작가들이 신앙적 감정(religious affection)이라고 칭했던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신앙적 감정에 대한 기초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기초는 회개와 순종과 분별과 거룩한 삶입니다.
이 기초를 놓을 때마다 다른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놀라운, 실로 놀라운 실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기도에서 "오 하나님,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시옵소서!"라는 표현을 듣습니다.
나는 뒤로 물러가 심판에 이를 수 있는 자들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서 그리고 산 위에서 모세가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교회가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느낄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에 가까이 오셨으며, 그 결과 믿지 않는 이들이 놀라 나가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출처: 예수님이 주인된 백암전원교회
제공자: 조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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