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하나님의 후사! (롬 8:12-1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의미를 소극적으로는 '죄로부터 자유 함을 받은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이웃을 형제로 여기며 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 가지 관계에서 예수 안의 자아의식을 설명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그리고 이웃을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형제자매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관'입니다.
여기에서 귀한 것은 이웃을 볼 때도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이웃을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입니까? 물론 나 자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엄청난 지불가치를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보면 소중한 나의 존재가 보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감동이 되어서 외치기를 "이 말씀은 차라리 황금문자로 기록되었으면 더 나을 뻔하였다! 너무나도 위로가 넘치고 큰 소리로 찬양할 만하다!" /할/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목소개!▶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앞에 구절을 설명한 말씀을 다시 끌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말씀은 "너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할/
육신에 살 때는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성령이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이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넘어졌다"는 이런 말은 말아야 합니다. 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의 빚이 아니고 영적인 빚을 말합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사명적인 의무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시대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일을 했습니다.
빚은 어떤 빚이건 갚아야 합니다. 잠22;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빚진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됩니다. 이 빚은 저 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이요, 설음입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빚진 자가 있다면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 가리지 않도록 하루속히 갚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할/
성경에 보면 용납하는 빚이 한 가지 있습니다. 롬13;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빚은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선생의 사랑의 빚은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있고, 긍휼히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합니다. 선생님에게도 겸손한 자세를, 하나님에게도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2절의 빚이 바로 이런 빚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자로써의 참다운 심정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자진 자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육신의 빚(죄)을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빚을 다 탕감 받았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빚진 자처럼 육신의 인도함을 받고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에게 빚지지 말고 우리 속에 죄를 짓게 하는 마귀의 유혹에 얽매이지 말아야합니다. 죄를 지으면 이상하게도 죄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닙니다. 죄를 짓고 나서라도 빨리 회개하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13절에서는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 그 결과가 비참하다고 말합니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빚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신의 인도함에 따라서 육신으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빚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물론 내 힘, 내 의지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5;29-30절에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육신대로 살아갑니다. 결국은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던 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거부하면서 육신대로 살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근심하시며 탄식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세워놓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이것은 영적인 죽음과, 육신의 죽음과 지옥에서 멸망 받은 영원한 죽음을 전부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엄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13절 중간부분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죽이면'은 현재 동사입니다. 한번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이는 반복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아래서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육신의 소욕을 죽일 수 있습니까? 기도 밖에 없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자신을 죽이는 훈련입니다. 자신이 죽어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남아있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믿/
또 여기 '죽이면'이란 헬라어로는 '정복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정복하면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중심적인 생활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마음을 억제하고 성령의 뜻을 따르려고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엎드려서 자신을 죽이는 자에게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맨 마지막이 바로 절제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사람을 가리켜 도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의 욕망을 뿌리치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이 욕망과 정욕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승리합니다. /할/ 약1;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욕심에 끌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삽니다.
여기 '몸의 행실'은 단순히 행동만을 따지는 말이 아니라 언행심사 전부를 포함합니다.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 말로 죄를 짓는 것,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 습관으로 죄를 짓는 것', 이 모두가 행실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말씀으로 충만하십시오. 시119;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할/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갈 때면 경호원들이 그의 주변을 호위해 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갈 때는 누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줍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갈 때는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믿어지면 크게 아맨!/
그러니 누가 감히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보살피심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우리를 영원한 가나안 복지(천국)까지 안전하고도 무사히 인도하고야 마십니다. /할/
▶아까 잠시 말씀드렸지만 마틴 루터가 이 구절을 읽다가 너무 감격해서 이 본문을 황금문자로 써서 머리 위에 걸어 두어야겠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 심령 안에 거하여 우리 삶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에 붙잡히는 삶,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기도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을 주시며 깨닫게 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붙잡혀 가듯이, 소경이 인도자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가듯이 겸손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소경은 인도자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신앙생활은 맡기는 것이요,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업하다 부도를 맞으면 뛰어다니며 부도를 막아야지, 성전에 와서 기도한다고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금식하고, 기도 받는 다고 병이 낫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3;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는 '많이 알아서, 많이 배워서, 많이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넓은 의미에서 예수 밖에 사는 사람, 즉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히2;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②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영입니다. 곧 죄를 다스리는 사탄의 영을 뜻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양자란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헬라와 로마에서는 양자의 제도가 널리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양자는 법적으로 당당한 아들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친아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습니다. 사생자는 핏줄을 받았지만 아들로써는 권리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자는 혈통은 아니면서도 법적으로 아들 자격에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양자는 양부의 재산뿐 아니라 사회적은 모든 지휘까지도 상속받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과 말소할 수 없음을 증거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바'란 아버지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말씀을 사용하셨으며 당시 초대교회에서도 기도할 때, 이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큰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이므로 하늘의 무수한 보화가 다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보화를 얻는 비결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진리 몇 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①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분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들은 촌수가 없는 상놈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의 촌수가 없습니다. 히12;9절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②어린아이처럼 기쁘게 아버지를 부르며 섬겨야 한다는 교훈이 있으며
③사랑의 마음을 품고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벧전1;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또 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십니다.
▶15절은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아버지를 좀 더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아빠', 영어식으로 하면 'papa'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자라고 하니까 친아들과는 달리 차별대우를 받을 것 같고, 천대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 들어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 한 인물이 있습니다.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움을 할 때 사울 왕도 죽었고, 또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사울 왕에 속한 남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발 다 절뚝발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블레셋을 무찌르고 나라를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자기의 사랑했던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면서 요나단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속했던 모든 밭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식사할 때면 언제나 그를 불러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이와 같이 일단 양자로 입적이 되면 친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 사회에서는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던지 딸을 낳던지 상관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아이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문에 속한 모든 권한은 양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황제 '네로'도 양자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 '클라우디우스'황제가 죽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난 뒤에 양자였던 네로가 로마제국의 5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만큼 양자라고 하면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인정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양자는 오히려 친아들보다도 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마지막 절에 '부르짖는다'는 말은 뜨거운 감정을 담고 소리내어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끈질기게 재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좋아서 부르는 소리요, 반가워서 터지는 소리요, 급해서 찾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행복해서 부르는 이름이요, 즐거워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 속에는 용서와 자유 함과 평안함이 보장된 생활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즐거운 비명으로 부르짖는 이름입니다. /할/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당시에는 양자가 되면 막대한 권한이 양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양자를 삼을 때는 반드시 증인을 세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누가 증거해 주십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관공서에 가서 중요한 서류를 받을 때나 또 은행에 가서 현찰을 찾을 때 신분증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도, 아무리 많은 현금이라도 그냥 내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할/
그러니까 15절 말씀을 보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의지적인 작용이라면, 16절은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로 증거 하는 것은 '성령의 외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성도와 성령의 연합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고후1;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사람들은 인간들이 발행하는 보증수표를 믿는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보증하신 것은 믿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기 '후사'란 말은 '기업을 물려받는 자'란 뜻으로 '상속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후사입니까? "곧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후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기업의 회장자리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또 한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사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납니까? 우리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중에서 최고로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이어받을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모든 영광을 우리도 다함께 똑같이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유업을 자녀들이 나누어 갖습니다. 그래서 자녀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는 몫은 적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한합니다.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후사인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빠짐없이 충만하게 무한대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①마28;18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상속받을 후사"요,
②고전15;20절 "주님의 부활의 승리를 상속받을 공동 후사"요,
③계20;4절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할 것이며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후사"입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잇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조혈의 공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란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만큼 후사가 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것만큼 하나님의 것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장차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될 엄청나고 놀라운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주와 더불어 받는 잠시 잠깐 동안의 고난은 얼마든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고 일평생 동안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순교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알려주기 위하여 성도에게 합당한 자격자로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자격은 고난 중에서 믿음을 지킴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고난을 받게 합니다.
롬5;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가치와 영광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를 고난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이 있습니다. '되고 싶은 본능, 먹고 싶은 본능, 하고 싶은 본능, 보고 싶은 본능, 사랑하고 싶은 본능'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의 본능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본능을 억제하는 것,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잠자고 싶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새벽에 깨어서 일어나 기도하고, 세상 유혹 뿌리치고, 주일 예배 지키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다가 당하는 핍박, 손가락질, 비웃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회사의 중역 한 분이 신앙 때문에 그 자리를 포기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사장이 불교신자인데 구로 공단에 공장을 다시 짓게 되어 그 공장 문을 여는 날 고사를 지낼 때, 사장님과 함께 절을 해야 한다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사표를 낸 것입니다.
사장은 오히려 그의 진지한 신앙의 양심에 빠져 말하기를 "당신처럼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나에겐 절대로 필요합니다. 절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걱정 마시오, 대신 내가 두 번 하겠소"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갈1;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이런 저런 고난이 수없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난을 감사하면서 맞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뒤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1;7절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례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고난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28;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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