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4)
고후7;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어떤 교회에 별명이 <큰일났다>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누구든지 만나기만 하면 자기는 큰일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 집사님이 큰일이 났다는 것을 듣고 위로와 용기를 주려고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 오셨습니까?" 인사를 하고는 "큰일났어요. 저 집 보세요, 오늘이 집세를 가지고 오는 날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요!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또 다른 큰일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막내아들이 성적이 떨어져서 큰 일이에요. 큰아들이 감기에 걸려 큰 일이에요!" 또 "목사님! 어제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는데 무슨 방언인지 모르니 큰일입니다." 이런 따위가 큰일이랍니다.
이솝우화에 <나오지 않는 늑대가 나왔다고 거짓말을 자주 하다가 정말 늑대가 나왔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양을 다 잃어버린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집사님 정작 큰일이 났더라도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뭐 또 그렇고 그런 일이겠지" 기도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큰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가장 큰일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큰일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 거하십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벌써 로마서 7장을 마치고 8장에 들어섰습니다. 저의 부족한 영력으로 이 로마서의 진가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한 것 심히 안타깝습니다.
로마서는 16장으로 되어있는데 그 중에서도 8장이 가장 중심된 장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야곱 스펜너'는 말하기를 "성경 전체가 다 귀한 보석이지만 특히 로마서는 보석 중에 보석이요, 로마서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8장은 로마서 중의 진주"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성경의 최고봉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만일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로마서 8장만 남아있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소중하고 또 은혜롭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시는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또 아무리 그 은혜와 축복이 풍성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놀라우신 축복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만큼 더욱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불쌍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잘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가난에 찌든 삶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마을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과부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아들을 생각하며 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과부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들에게서 잘 있다는 소식은 자주 옵니까? 돈은 부쳐오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마다 과부는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예, 그저 잘 있다는 소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과부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그 모습을 보다가 너무 딱해서 하루는 쌀 한 말을 사들고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아들이 집을 떠난 지가 벌써 언젠데 아직도 돈을 부쳐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소리를 듣고 과부는 고개를 푹 수그렸습니다. 목사님은 혹시나 하면서 물었습니다. "혹시 편지 속에 다른 것이 들어있지는 않던가요?"
아니나 다를까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편지 속에 종이 조각이 늘 하나씩 들어있기는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과부에게 종이조각을 가지고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들이 외국에서 보낸 Check(수표)이었습니다. 영어로 잔뜩 쓰여있으니까 과부는 그것이 엄청난 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부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푼도 쓰지 못하고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믿/
바울은 로마서 1,2,3장에서 죄악 론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한 명도 없음을 예리하게 비판했습니다. 먼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배반한 죄인들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의인이라고 봐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알면서도 행함이 없고, 오히려 교만한 죄가 하나 더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다 죄인이며 그들은 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말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전적타락, 완전 타락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완전타락의 선언이 먼저 있고 나서 다음에 4장으로 넘어가 그러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4-5장에서는 하나님 편에서 은혜를 베푸셨고, 우리 쪽에서는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면 구원의 길이 보장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길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만이 결국에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일단 의인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왕의 아들 잔치가 있어서 손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밭을 샀다, 장가를 간다, 소를 샀다는 핑계를 하면서 오지 않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음식을 많이 준비했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왕은 대단히 섭섭하여 산으로 길거리로 다니면서 거지, 병신, 장님, 가리지 않고 다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합니다. 이만하면 왕의 사랑은 무궁무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왕이 연회석에 나와 화를 내며 "그대는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뇨? 저를 밖으로 끌어내라. 슬퍼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조건 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벌을 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쫓겨난 입장에서는 할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강제로 초청해서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복이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지금처럼 옷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할 때 사람이 모이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옷이 남루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잔치에는 주인이 예복을 만들어 보내어서 손님들로 하여금 그 옷을 입고 참여하게 합니다.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보낸 옷을 입지 않았기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 상당한 신학적인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죄인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복을 입혀 가지고 자격을 갖추게 한 다음 정당하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복은 어떤 옷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으신 의의 예복입니다. 주님이 보낸 예복, 즉 의의 옷을 입은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 옷만 입고 다니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의롭다 하더라도 이 옷을 입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곳에 내 쫓겨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6-7장은 이렇게 구원받은 주의 백성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부딪치는 문제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일"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7장은 탄식하며 끝납니다. ▶그러나 8장부터는 마치 풍랑이 지나가고 광명한 아침을 맞이하는 느낌을 줍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7장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앞으로 나오는 자는 이미 죄의 종이 아니며 얽매였던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바울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끔 '오호라!'의 탄식이 터질 때도 있지만 결코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그러므로' 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의 절규입니다. '아~ 아무리 힘써도, 애써도 안 되는구나!'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주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애쓰고 힘쓰고 기도하면 부족한 것밖에 없고, 부끄러운 것 밖에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갈등 체험했지요? 저는 매일 매일 체험합니다. 그런데 대 사도 바울도 이런 갈등을 체험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몸부림치는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죽은 신앙입니다.
죄를 짓고도 감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이제 24절에서 절규했던 바울은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으나 주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입니다.
'이제'란 시제로써 현재입니다. 구원도 현재입니다. 생명도 현재입니다. 회개도 현재입니다. 믿음도 현재입니다. 지난날은 소용없습니다. 옛날에 봉사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예수 밖에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①현재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 전부 맡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용서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 저는 이런 엄청난 큰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굳게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②이런 자를 요15장에서는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15;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또 7-8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③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롬8;9(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서 우리는 큰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정죄란 법정용어로써 "당신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으므로 죄인이기에 몇 년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로 정하는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죄의 값을 치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예수 안에 정죄함이 없습니까?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고소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소할 자가 없고 하나님 역시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기 않습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①예수 안에서 형벌이 없다는 뜻입니다. ②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그 안에는 영과 육이 포함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날마다 그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육신적은 것도 복을 받습니다(요3서2절참조).
▶1절은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한 번 하나님이 선언하시면 취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정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던지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지나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피해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는 어린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멸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집에 붉은 줄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합의 집에 드리워진 붉은 줄을 보고서 그 집은 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 여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주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자꾸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간교합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를 정죄감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말씀이 좌우에 날선 한 검이 되어서 악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정죄함이 없는가? 2절 보세요!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두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내용을 6;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와 법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7;6절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영의 새로운 것과 의문의 묵은 것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법 아래 살았습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겼습니다.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100%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기쁨이 충만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봉사하며 섬깁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집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는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탕자는 마음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서 큰 죄를 저질렀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했으니까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으리오!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직도 상거가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얼른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뛰어갔습니다.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다 용서하고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잠시 뒤에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들어왔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한 것을 보고 원망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위해 지금까지 뼈빠지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탕진한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가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얘야, 너는 나와 함께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너의 동생은 잃었다가 되찾지 않았느냐? 죽었다가 되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싸울 때 누가 우리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말로는 용서해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속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써먹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깨끗하게 용서하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는 죄, 미래에 짓는 죄까지라도 이미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인생이란 죄를 범하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공포의 생애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 곧 행위 계약과 율법을 어긴 죄 값을 요구 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전 인류는 부지중에 이 법 아래 영육이 다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 죄란 마음 속에 욕심이 뛰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약1;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 "사망"이란 소멸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양 사람이 흔히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을 하늘로 올라가고 육은 땅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성경에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혼백이라고 합니다. 안식교인들은 영혼도 육체도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안식교에서 파생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상의 낙원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준 것은 사람의 육체는 죽고, 영혼은 낙원에 있다는 것을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대를 이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가 끊어지면 그 집안은 결손이 되어 죽는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개인이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라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지옥과 천국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어버리고 끝나버리면 예수 믿지 않아도 됩니다. 사망은 소멸이 아닙니다. 단절, 즉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법의 통치를 받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눅4;18-19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죄와 사망의 법에 포로 되었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믿/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끝없는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새가 저렇게 갇혀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린 아들이 어디서 잡았는지, 새 한 마리를 잡아 귀찮게 합니다. 아버지가 그 새를 놓아주라고 해도 "아버지 내가 이 새를 잡으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아버지가 돈을 주면서 그 새를 놓아주라고 했더니 놓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새 값을 치르고 새에게 자유 함을 주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와 사망의 법을 자신의 몸을 바쳐 대속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 함을 주셨습니다. /아멘!/
사람이 새보다 더 갇혀 있기를 싫어합니다. 육신의 부자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격을 무시당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거 일본 놈들에게 36년 동안 모든 것을 압제 당하고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해방은 육신의 해방이지 영혼의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자유요, 자유는 기쁨이요, 기쁨은 승리인데 참 자유가 없고, 참 기쁨이 없고, 참 승리가 없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궐 같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문명문화의 발달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가 더 큰 범죄가 일어나고,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약에 히로뽕에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 속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갖고 싶어합니다. 향락을 추구한 자는 더 큰 향락을 추구합니다. 가지고 가지면 뭔가 더 행복하고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영혼이 더 곤비함에 처하게 됨을 봅니다.
사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이야기 해보면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은 영적으로 만족하면 육적인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의 생활은 기쁨이 있습니다. 영적인 기쁨은 누가 가져다줍니까? 천하를 지으신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믿/
참된 자유는 죄에서 해방을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제일 무서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죄는 양심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썩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무서운 원인이 됩니다.
세상의 병중에 가장 무섭고 심각한 병이 바로 죄의 병입니다. 육신의 병은 앓다가 육신만 죽으면 되지만, 이 죄라는 병은 육신도 죽이고 영혼도 죽이는 무서운 병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 병은 못 고치는 병이 아닙니다. 이 병은 세상 권위 있는 의학 박사들이 고치는 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보혈로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믿/
요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1;5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본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할/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바를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응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 법대로 심판하십시오." 율법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 범한 저와 여러분을 율법은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범한 우리를 내어주지 아니하시고 대신 누구를 내어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율법의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거룩한 법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대로 순종만 하면 의롭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613). 아담의 부패한 성품이 인간의 육체에 남아 있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것을 하셨을까요?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오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말씀 꼭 붙잡고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율법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셨습니다. 즉 율법의 완성을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말씀 속에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도저히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율법의 완성의 도가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영, 보혜사 성령님의 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감동, 감화주시고 은혜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4절에서 바울은 육신과 영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육신이라고 할 때,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①인간의 몸, 살덩어리 ②인간의 생각, 판단, 인간관계를 뜻합니다. ③부패한 인간의 악함, 무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인간의 타락한 죄성인 육신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는 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 수단, 방법,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좇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멀리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초등학생들이 싸움을 합니다. 하나는 덩치가 크고, 다른 아이는 덩치가 작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작은 아이가 코피가 터지고 멍이 들었습니다. 이긴 자는 의기양양하여 의시됩니다. 이때 담임선생님이 왔습니다. 이때부터 상황은 반전됩니다. 그 힘센 주먹으로 약한 자를 마구 치던 덩치가 풀이 죽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도우심은 마치 담임선생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기 전에는 육신의 죄 때문에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고 온갖 행패를 다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죄는 맥을 못 추게 됩니다. /믿/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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