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9강)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3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56

《제29강》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30)

 

  철학자 '조렌 캔캐골'의 철새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겨울의 찬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에 내려 마음껏 먹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모두 날아갔는데 유독 한 철새만이 "야! 옥수수 맛이 너무 좋구나. 내일 하루만 더 먹고 떠나자!" 그런데 이 철새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 떠나자 외치던 철새는 그냥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명적인 날이 왔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 온 것입니다. 이 철새는 얼어죽을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러나 날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옥수수를 그 날 눈 속에 파 묻혀 죽고 말았답니다. 내일 미루자던 그 습관이 그 생을 망쳤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금 현재입니다.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봉사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을 읽고, 전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할/ ◀제목소개!▶

 

  인류의 역사에는 두 종류의 큰 사상의 흐름이 있는데 그 하나는 헬라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인간의 죄와 애통에 대하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삶의 최고의 개념은 감각적인 향락과 쾌락과 육신의 가치를 최고의 것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사상과 정반대 되는 위대한 부정을 하며 나타난 한 사상이 있고, 한 인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 사상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헬라 사상의 중심을 깨뜨린 이 기독교 사상은 자기 쾌락대신에 자신의 봉헌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만족대신에 자신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감각적인 향락과 인생의 쾌락보다는 인간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용서를 원하는 애통함이 늘 있어질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자신을 죽이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일은 오직 기도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기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쉽고도 어려운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훈련입니다. 지금 시작해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성령 님이십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가리켜 '인간 조건의 총체, 또는 피조물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질그릇으로 비유하십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지기를 잘합니까? 조그마한 감기에도 우리는 꼼짝 못합니다. 또 죄에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조석변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이 연약성은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유전된 타락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 되었다고 해서 이 연약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약성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 던질 수 있는 겉옷이 아닙니다.
  또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육적으로도 약하지만 영적으로도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한없이 연약합니다.
  그런 우리를 성령님께서 도우신다고 하십니다. "도우시나니"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는 의미가 있고, '함께 나누다. 함께 취하다'라는 뜻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나약함을 도와서 그 연약함을 함께 나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학자들은 기도와 관련된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전반적인 연약함을 가리키는 말로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고난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칼뱅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리 신실한 자라도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입니다. 여기 돕는다는 뜻은 함께 담당하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맞잡아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거운 통나무를 지고 가는 사람을 돕는 것은 통나무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셨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함이 금방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초자연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을 그대로 두시고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도움을 따르려고 할 때, 도우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께서 특별히 기도를 도우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기도의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몸에 조금 열이 나면 기도를 못하고 누워버립니다. 기분이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기도를 제대로 못합니다.
  또 신앙생활에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을 들면 우리의 영혼이 캄캄해지고 기도는 막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한 생명 줄과 같습니다. /믿/
  기도가 끊기면 신앙생활은 파산입니다. 기도가 끊기면 영혼은 병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특별히 돕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①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빌 바를 알게 해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모시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절하면서 무엇인가 구하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뇨?"하자 살로메가 "주여!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정당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또 기도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빌 바를 알게 해주십니다. 쉽게 표현하면 인간의 욕심으로, 정욕으로 구하지 않게 막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인도하십니다. /믿/
  ②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간구를 들을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언제 탄식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저버리고 죄악으로 달려갈 때, 은혜의 자리를 벗어나 무지로 달려갈 때, 세상 좌우로 치우칠 때, 원망 불평으로 달려갈 때,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때,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하지 않을 때, 이럴 때 탄식하십니다.
  22절을 보면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탄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안 들리지만 분명히 성령님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기도할 때, 형식적인 기도할 때, 죄를 숨겨 놓은 채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귀한 진리는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탄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령님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중을 날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처럼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이 있기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성령님은 자신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게 도우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뉘우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그래서 가슴을 치며 탄식의 기도를 드리게 도우십니다. /아멘!/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100%일치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서툴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고쳐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 속에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또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를 잡아당겨 주시고, 성령께서는 밑에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20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할 때, 요한, 야고보, 또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나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이때 우리 주님은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22절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욕심대로 구한다는 말입니다. 23절에서 주님은 "내 좌우편에 앉은 것은 너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이 모자는 자신들의 뜻대로 무조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이기에 응답이 없습니다.
  약4;2-3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해야 합니다. 마26;42절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본문을 정리해봅시다. 성령님은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빌 바를 알게 해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주시는 성령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아멘!/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망 적인 외침입니까? 희망이 없으면 끝장입니다.
  미국에 살던 인디언들 가운데 '아파치'라는 유명한 부족이 있었는데, 미국 남서부 지방에 주로 살았던 아주 강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과 백인들 사이에 있었던 아파치 전쟁은 미국의 서부 개척 사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부족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는데 절대로 추장직은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부족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제나 추장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어느 추장이 나이가 많아서 은퇴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를 뒤이어서 추장직에 오르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들이 후보자로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추장으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말타기, 창던지기, 활쏘기 시합도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세 명으로 추려지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마지막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추장은 세 사람에게 멀리 바라보이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와라. 그리고 내려올 때는 너희가 정상까지 올라갔다는 증표를 하나씩 가져오도록 해라."
  대단히 가파르고 험한 산이었습니다. 아무도 올라가 본적이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추장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죽을 각오를 하고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이제 부족 앞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증표를 보일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풀을 가지고 왔고, 둘째 사람은 산꼭대기의  매끈매끈한 돌 하나를 가지고 왔으나 셋째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증표를 하나 가져오라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아닙니다. 저도 분명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 마을의 반대 방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멀리 아주 크고도 아름다운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의 땅은 너무나도 비옥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족의 거주지는 즉시 그곳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간 증표로서 그 비옥한 땅을 제 마음에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던 추장은 그 즉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나 다음의 추장은 바로 너다!" 왜 그랬겠습니까?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마음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족의 추장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문의 말씀입니다. '슈페너'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석인 로마서 중에서도 8장은 보석 중에 보석이요, 28절은 최고의 보석이라고 그 말씀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요, 즐겨 사용하는 성구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만 믿기만 하면 우리가 좌로 가나, 우로 가나 만사가 잘된다는 말씀이구나!' 생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에 주 포인트는 "누군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 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각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나쁜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많이 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을 따는 해녀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다 속에는 파도가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다 표면에만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을 흘러가는 물줄기는 표면의 파도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바라다보면 고난의 물결이 쉬지 않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가 도도히 한쪽 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까?
  ①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요일4;10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치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자식이 반작용으로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도와의 관계는 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 지식, 재능, 행동 이 밖에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 인격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모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의해서 결국 선을 이루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십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요일5;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고 그 명령대로 살면 축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로 바꾸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란 말 대신에 사랑하는 자로 바꾼 것입니다.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시금석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만 있으면 기쁨으로 순종하고, 기쁨으로 감사하고,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②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자신의 마음과 계산법을 내세우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에게 함께 하십니다.
  성경은 수 없이 많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말하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엡5;17-20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대로 입은 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살전4;7-8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거룩한 삶, 성별된 삶, 덕과 본을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입니다. 
  ③'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이란 우리의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밝은 날, 비 오는 날, 깜깜한 날과 바람 부는 날, 추운 날과 더운 날, 잘 될 때와 못 될 때, 기쁠 때와 슬플 때, 살 때와 죽을 때, 건강할 때와 병들 때, 부할 때와 가난할 때, 우리의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요셉을 봅시다. 그는 형들에게 벌거벗겨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 집에서도 그 부인의 유혹을 거절한 죄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죽도록 매를 맞습니다. 여기까지는 요셉의 고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넣으시고 꿈 해몽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부어 주셔서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게 하여 애굽을 살리고, 자기 부모 형제들을 살리고, 죄수의 몸에서 애굽의 국무총리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고백은 창50;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 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었으며, 그의 세 친구들도 풀무 불에서 선하심을 입었고, 욥의 경우도 처참한 환경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했더니 오히려 환경을 선으로 바꾸시어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삶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축복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부르셨는데 부르실 때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교회의 머리요,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위치를 혈통적으로 의미를 바꾸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빌2;9-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목적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9절 이하에 구원의 과정이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리 아신'입니다. 둘째로, '미리 정하셨으니'입니다. 셋째로, '부르시고'입니다. 넷째로, '의롭다 하시고'입니다. 다섯째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독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고리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다섯 가지 단계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사람인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도 하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고리는 절대 끊어지는 법이 없고,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시기는 하셨는데, 의롭다고 하시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일단 의롭다 하셨으면 반드시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섯 가지 단계를 일명 '황금의 연쇄고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구원이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좌우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믿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열심도 붙었다 떨어졌다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에 따라서 결정되어진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홀로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그렇게 확정하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되신 하나님은 시작하시면 반드시 끝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그 자식을 키워서 그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또 효도를 하면 호적에 올려주고, 또 아이가 말을 잘 안 듣고 효도도 잘 하지 않으면 호적에 올리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나서 키우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 받는 자녀로 키워 양육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5장에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지 못할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단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①29절 '미리 아시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결혼 대상자도 미리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할 사람을 오다가다 길바닥에서 줍는 물건처럼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으시고 미리 알아보시고 구원하십니다.
  ②30절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소명입니다. 엡1;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여기서 부르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도록 이끄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내가 잘나서, 아니면 똑똑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선택해 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세상의 선택의 기준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호11;1절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요10;3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왜 불렀습니까? 29절에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③'의롭게 하시고'(칭의)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옷을 바꿔 입어야 합니다. ▶마22장에서는 왕의 혼인잔치에 왔던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가 내어쫓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옷을 새 옷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던 사람이 이제 순종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④'영화롭게' 하셨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은 죄의 제지 하다보면 거룩함을 얻은 것은 덕의 극치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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