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 (롬 8:18-25)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가전제품의 광고가 있었습니다. ▶우연한 한 걸음이 인생을 결정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국의 '킹스톤' 대학 법대를 두 친구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장을 받아 교문을 나서는 순간 한 친구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공부만 하다가 놀지를 못하고 고생만 했으니 쌓인 스트레스나 풀 겸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유혹합니다.
이때 다른 한 친구는 "아니야! 난 그동안 공부하느라고 너무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어. 난 오늘부터 열심히 부흥회에 가서 은혜를 받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두 친구는 교회냐? 술집이냐?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교회에 갔던 청년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클리브란트' 대통령입니다. 한편 술집에 갔던 친구는 나쁜 여자를 만나 같이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살인까지 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백악관과 교도소, 대통령과 살인자, 순간의 선택이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 우편에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죽기 불과 몇 분전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낙원에 들어갔고, 한 강도는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아차의 순간에 영원한 갈림길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망하기 전에, 교회 나와 주님을 믿고 천국 가는 것은 복중에서도 가장 큰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아멘!/ ◀제목소개▶
▶사람은 일반적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과거 지향적인 사람; 언제나 과거에 매여 사는 잡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어" 자랑을 합니다. 과거의 좋은 시절을 꿈속에서 그리며 지금의 어려움은 괴롭고 힘든 것이며 팔자소관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②현실 중심적인 사람; 과거도 미래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가 무슨 소용이고, 또 보지 못한 내일이 무슨 소용이냐고 오직 오늘뿐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찰라 주의요, 향락주의자들입니다.
③언제나 앞을 보는 미래 적인 사람; 오늘보다 내일이 더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고생하지만 내일은 무엇인가 보일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믿어집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지만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고난이 우리에게 부딪혀 옵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고난에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쓴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강철 한 묶음을 그대로 팔면 5달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의 편자를 만들어 팔면 10달러를 벌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어 팔면 300달러를 벌 수 있고, 또 그것을 더 두드려서 날카로운 면도칼을 만들어 팔면 3,000달러나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으로 시계 속에 들어가는 정밀한 스프링을 만들어서 팔게 되면 30,000달러의 값어치가 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들겨 연단 할수록 그 강도는 더 높아집니다. 값어치도 점점 더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연단 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더 귀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들이 언제나 최상의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 연단 시키시는 것입니다.
18절은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고난 너머에 있는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우리가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은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본문에서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고난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엄청난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난의 고백을 한번 들어 봅시다!
고후11;23-27절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지금 바울은 저울의 한쪽에 현재의 고난을 올려놓았습니다. 다른 한쪽에 장래의 영광을 올려놓았습니다.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본문 끝 부분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에 비해 너무나도 가벼웠습니다. 반대로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그 둘을 저울 위에 올려놓자마자 저울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이 땅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입을 열어 담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가 분노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음 가운데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감격 가운데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노라!"고 외쳤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의 확신입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철을 똑같은 쇠붙이인데 다른 쇠붙이보다 무려 2500도의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온 것입니다. 고난은 강하게 만듭니다. 사람도 고난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성도를 온전케 합니다. 또 믿음을 굳게 하고,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케 합니다. 고난은 인생을 연단 하는 시련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고귀한 가치와 영광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를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현재를 부정하고, 현재를 희생하는 것, 이것이 고난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받는 핍박, 능욕,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일제시대 때, 성도들이 신사참배 문제로 재판을 받을 때의 일화입니다. "너희들은 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못한다." "그래, 이놈! 안되겠구나!"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런데 너는 왜 절하지 않느냐?"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마음이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징역 15년, 너는 징역 10년"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이 말했는데 왜 10년이냐?" "이놈 바보 아냐? 5년 적게 해주면 고맙다 할 일이지, 따지냐!" "아니다. 나도 15년 달라. 하늘나라 상급이 깍 인다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면 상급이 더 크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의 자리를 내놓았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주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하루를 굶으면서도 엽전 두 푼을 바쳤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혔고,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고귀한 영광을 얻기 위한 대가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평생 감옥에서 7년 동안 옥살이 하다가 1944년 4월21일에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난은 7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은 칠 천년, 아니 영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신앙적 삶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 집 대문 앞에서 헌 대를 앓으며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개들이 와서 핥아주는 위로 속에서 잠을 자는 이 나사로는 부자의 호의호식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불만도 없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자신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장막이 부럽지 않은 것은 주님이 준비한 처소가 있음을 알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에 황금처소를 지어 놓으셨습니다. /믿/ 나사로가 부자의 장막이 탐하지 않은 것은 신령한 하늘의 양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입고 있는 비단 옷이 부럽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새 마포 옷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몸으로 한번 비교해 봅시다. 우리들의 육신은 대단한 것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보약을 먹고, 화장도 하고,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병들고, 노새하면 죽고, 썩을 몸입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몸은 영생의 몸입니다. 영원히 사는 부활 체입니다.
또한 소유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소유는 천국의 소유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삼성의 총수 이병철 회장도 돈 한 푼 못 가지고 갔습니다. 삼성에서 만들에 내는 TV 한 대 못 가지고 갑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잘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인색하다면 없는 거나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물질도, 명예도, 권력도, 인기도, 건강도, 학식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 하나만 가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멘!/
▶미국에 유명한 오페라 가수 '할 버튼'은 어느 날 이웃집 아이들이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대화하며 노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자기 아들을 보고 "우리 아버지는 시장을 잘 아신다."고 자랑하니까 자기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신다."고 자랑합니다.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감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 아버지를 떳떳하게 자랑할 줄 아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또 유명한 성자 '토마스 아킴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남겼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킴퍼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데 구하라!" "하나님, 아닙니다. 구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세 번씩이나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 후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아킴퍼스야 너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다. 그대로 족하게 살아라!" 하면서 음성이 그쳤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함께 한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이 있습니다.
▶17-18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우리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이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 됩니다. 바울이 한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지하게 핍박했습니다. 한참 열이 나서 다메섹으로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입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자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성도의 고난은 바로 주님의 고난으로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때문에 오늘도 고난이 왔습니까? 참으십시오. 인내하십시오,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다. 벧전4;13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9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란 '이마에 손을 얹고 먼 수평선 너머로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라는 뜻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간절히 기다리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어떤 여류 시인은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믿/
주님은 이 세상에 꼭 다시 오십니다.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시려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 예수님은 심판 주로 오십니다. 이때 양과 염소가 나뉘어 지고,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집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은 하나님의 후사인 '믿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피조물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20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한대로 이끈 것이 아닙니다. 그에 지배 하에 있던 다른 피조물까지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피조물도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하고 범죄 하는 일에,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우상 섬기는 일에, 돼지머리 앞에서 굴복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일에, 범죄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요'란 말은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는 것은 피조물의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어느 성도 가정에서 닭을 잡아 대접할 때, 이 닭은 복 받은 닭이라고 했습니다. 이 닭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음식이 되어 영양과 힘을 공급하여 그 힘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전하는데 닭이 일조한 것이기 때문에 복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닭이 우상 섬기는 제사상에 놓이게 되었다면 하나님께 저주받은 일에 이용당하므로 탄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1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앞 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피조물도 인간의 죄로 인하여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곧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조물이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종과 같이 억지로 끌려서 이용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해방되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불의한 일에 이용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자유로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용당하여 자녀의 영광에 참례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대로 이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에 이르는 것'은 피조물의 자유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용됨으로써 자녀들의 영광에 참례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엡1;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그 날, 피조물들도 더 이상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상속하게 되는 그 날, 옛 하늘과 옛 땅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피조물도 우리가 누리는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허무한데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은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어느 수필에서 화초를 가꾸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화초를 가꿀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명랑하게 가꾸면 화초가 잘 자라고 어둡고 울적하고, 화난 얼굴로 화초를 가꾸면 그 화초가 잘 죽는다고 했습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사람이 꽃나무 12그루를 심어놓고 예수님의 제자 이름을 붙여서 그 나무 앞에서 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나무들이 잘 자라 꽃을 아름답게 피었는데 오직 한 그루 가롯 유다 나무는 저주를 했더니 나무가 자라지 않고 매 말라 죽었다는 예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피조물의 세계에서도 마음은 통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하고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므로 탄식하고 고통 당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 속에서 잘 자라서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사용된다면 그 나무는 하나님의 영광에 첨예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이나 산 당을 짓는데 사용되고 범죄 하는데 사용된다고 하면 탄식을 하며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전1;8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할 때, 탄식이 오고 고통이 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사용하면 피곤이 오고 고통이 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을 피조물이 그 일을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고 신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바울은 19-22절까지 만물의 탄식을 말씀하고 23절부터는 성도의 탄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성도가 탄식합니까? 내 몸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치 못하는 것을 볼 때, 탄식이 나옵니다. 바울은 고전9;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대 8;2절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씀했고, 또 13절에서 성령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여주신다고 말씀했고, 14절에서는 성령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6절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많은 열매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이미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주실 궁극적인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23절 하반부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양자 될 것'이고, 둘째는 '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속사정을 다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의 후사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아직은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직은 소망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실 마지막 열매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패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구속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병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생각 때문에, 죄의 유혹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영적인 사람도 7;24절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의 자녀 치고 이러한 오호라의 탄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오시는 그 날,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육신도 구속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변화 받게 될 것입니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어 지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주실 열매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첫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 죄와 사망에 법에서 건져내신 것, 중생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죽음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으며, 성령으로 믿게 하셨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바쳤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단순한 열매라고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한 것을 보면 둘째, 셋째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도 첫 열매가 있고, 중간 열매가 있고, 끝 열매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열매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불러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그 기도의 역사를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 의의 열매, 입술의 열매 등을 맺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구원의 귀한 열매가지고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탄식은 성도만이 아는 탄식입니다.
▶탄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지 못하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랴!" 했던 사도 바울의 탄식이 곧 우리의 탄식이 되어야 합니다.
②본문의 '탄식한다'는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탄식을 단순히 비통해서 터지는 그런 탄식이 아닙니다. 산모가 아이를 분만할 때, 새 생명을 얻는 다는 기쁨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희망과 기쁨이 솟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탄식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잉태의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몸은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의 영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중생하고 살아났으나 몸은 아직 죄와 사망에 있다고 8;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 있는 몸은 성령과 중생한 영혼이 합심하여 건져내는 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부패성을 점점 벗어버리고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 나가는 것, 이것은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에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미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실 마지막 열매인 양자 될 것, 우리 몸의 구속은 아직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소망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 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고시에 합격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고시에 이미 합격했다면 이미 합격한 것을 바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소망은 미래 적이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의 요소 중 그 마지막 단계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꺼지지 않는 소망과 꺾기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①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생활에서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땅위의 행복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망은 물질적이거나,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②소망은 성도의 힘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 백성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없고, 꿈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 소망을 삼고 삽니다. 부모가 자식의 출세를 힘으로 알 듯이 성도의 소망은 하늘나라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와도 참고이기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여기서 ▶보이는 세상적인 소망은 ⑴재물입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⑵지식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1;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③인기, 명예입니다. 유명해 지기를 원합니다. TV 탤런트 등 인기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벧전1;24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④권세입니다. 전4;1절 하반절에 보면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⑤남녀의 사랑입니다. ⑥자녀에 두기도 하고, ⑦장수하는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요,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세의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고후4;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25절은 결론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미래 적인 일, 곧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그저 막연히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장래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되겠습니까? 참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 잠시 잠깐 당하는 고통은 참고 견뎌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과 시련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참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깨문"입니다. /할/
'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30강)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0) | 2011.07.31 |
---|---|
[스크랩] (제29강)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30) (0) | 2011.07.31 |
[스크랩] (제27강) 하나님의 후사! (롬 8:12-17) (0) | 2011.07.31 |
[스크랩] (제26강)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롬 8:5-11) (0) | 2011.07.31 |
[스크랩] (제25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4) (0) | 2011.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