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롬 8:5-11)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산중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배고 푼 김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여우를 잡아먹고자 덮치려고 합니다. 여우는 큰일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호랑이 형님!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있는데 나를 잡아먹으면 아마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호랑이가 생각하기를 제 딴에는 자기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알았는데 이 여우가 제왕이라니 약간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여우는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산 속에 있는 짐승들이 벌벌 떨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우의 뒤를 따라 산 속을 따라 다녀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짐승들이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을 칩니다.
이때 여우가 "보셨지요! 형님 제 체면도 있으니 한번만 봐 주십시오!" 호랑이는 여우의 말을 듣고 여우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 짐승들이 누구를 보고 도망갔을까요? 여우를 보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여우의 뒤를 바짝 따라온 호랑이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크고 무섭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사도 바울은 8장으로 넘어와서 제일 먼저 선포한 말씀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부부와 같이 몸이 둘이지만 마음이 하나인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비유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가장 깊은 관계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란 말은 사도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문 1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좌함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고후5;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하자 큰 아이는 무심결에 벌을 쫓는다고 손을 내저었더니 깜짝 놀란 벌이 갑자기 큰 아이의 눈덩어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겁을 먹고 아버지 뒤에 숨으면서 "아빠! 벌이 나를 쏘려고 해요"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어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니!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여러분!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로 정죄 받지 않는 새 사람이 됩니다. /믿/ 지난 시간에는 1-4절까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란 제목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목소개!▶
본문 5-11절 사이에 육신이란 단어가 6번, 영이란 단어가 9번나옵니다. 생의 두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끊임없이 연구 되어온 과제입니다. 어느 철학,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인생이 무엇이냐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소위 '인간학'이라고 합니다.
*이 인간학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①인간을 완전히 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사상을 학자들은 '유물사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상은 사람들에게 정신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정신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만 육체에 매여 있는 하나의 기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학설입니다.
즉 정신을 육체의 기능 중에 하나로 보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은 육체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②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이 사상은 헬라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해 왔습니다. 불교사상이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 몸과 영혼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봅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이원론적인 입장이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가치를 정신적인 가치에 비해 아주 낮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인 것은 속되고, 더럽고, 추하다하여 입산수도를 하고 정죄하며 육체적인 욕망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욕망은 나쁜 것이요, 생식본능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이원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신만이 본질이요, 육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통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것은 모아 놓으면 이상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③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학은 어떤 것입니까?
즉 신앙적인 인간학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인간을 <정신이다, 물질이다>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육과 영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고 합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육신도, 영혼도 종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원론적 방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도 사도 바울이 인간을 이원론적 입장에서 혹은 헬라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참 생명, 진정한 생의 실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후 죄악에 물들어 있고, 타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과 타락되어진 인간을 놓고 볼 때는 둘로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생의 원리를 실제적으로 소개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5-6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은 한 사람에게 영에 속한 부분과 육에 속한 부분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소속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며 산다고 합시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이부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면 운명까지 달라집니다.
남편은 주일날 세상으로 가고 싶고, 아내는 교회를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 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인간의 속 사람은 마음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여행 도중 버스가 아름다운 산을 지난다고 합시다. 이 산은 관광객들이 다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 다릅니다. 광산업자는 저 산에 석탄이 얼마나 있을까? 미술가는 한 폭의 그림으로, 음악가는 전원음악을, 역사가는 그곳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군인은 군사적인 지형을, 신혼부부는 달콤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생각할 것입니다.
잠23;7절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여기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타락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 죄(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갈5;19절 이하에서 육의 생각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영을 좇는 자"란 예수 믿고 중생한 자로써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세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고 평안히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은 원어 적인 해석에 보면 '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요, 표현입니다. 생각이 가면 마음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선물'이란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겨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을 좇는 자는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안히 온다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재를 의미합니다. 또 평안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즉 화해의 결과로써 얻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면 평안히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평안히 찾아옵니다. 집에 있는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부모와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따라 살았는가?'에 좌우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평안히 없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살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업상 어떤 불이익이 와도 주일날은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굳게 고백을 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지난날 성령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고 주일날 장로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골프 모임에 가면 자신의 마음에 평안히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빼먹고 가족이 모여 산이나, 들로 소풍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성령 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성령 님이 탄식하시는데 그들이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면 저절로 축복이 따라옵니다. 6절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할/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한 바울은 7절에서는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됨으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굴복할 수도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전적 부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마음먹지도 못하며 먹을 수도 없으며 전적으로 영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원수 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인간은 전적 부패한 속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베푸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밖에 구원은 절대로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
▶한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 잘해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생활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도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는데 교인들은 그의 신앙은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의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를 안수집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랬으면 열심을 내야 되는데 그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손을 드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 져 누어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는데 위암 3기였습니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생명이 까물까물 꺼져갑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구나! 이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안수집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 봐 하나님은 내 육신은 불러 가시고 내 영혼은 구원해 주셨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그의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의 사람처럼 육신의 생각에 골똘할 때, 우리를 쳐서라도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본 절의 말씀은 '7절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에게 나오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약4;4절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말을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니며 애를 태우면 어떤 부모가 그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부모는 그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바로 서야 축복도 받습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고, 전12;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①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②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하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일상생활에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백성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불평이 없습니다.
③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롬7;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고, 렘15;16절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고 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십시다. 시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였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음미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너무나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선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행11;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명칭으로 교회 밖에 사람들에게 불리 움을 받게 된 것인데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명칭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천주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항의하는 종교개혁의 무리들에게 '항의하는 자'란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게 된 것이 지금의 개신교(기독교)의 일반적인 명칭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명칭을 살펴보면 <⑴거룩한 영 ⑵하나님의 영 ⑶진리의 영 ⑷그리스도의 영 ⑸중재자, 위로자, 약속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①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②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헬라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꼭 '안에'라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그 말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안에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요15;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성품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집니다. /아멘/
③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는 아직도 육에 머무는 잡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잡니다. 수없이 많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핍박을 받고 또 순교까지 했습니다.
④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자 처자식과 배와 그물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살전5;19절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가도 성령을 소멸해 버리고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 중 <최후의 만찬>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모델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삐에뜨로 반디엘'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모델로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이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다 그렸는데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만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죄로 마음이 무디고 찌들어진 얼굴을 찾아 나서기 10년 되는 날 로마의 뒷골목에서 아주 보기 만해도 역겨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가롯 유다의 모델로 그렸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돈을 지불하면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몇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예수의 모델로 그린 '삐에뜨로 반디엘'입니다."
성령이 거한 사람과 성령이 떠난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납니다.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죽는 것과 산 것입니다. 죽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고, 살 것이 아닌 산 것입니다. 완벽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그때 벌써 죽었다는 것이요, 부활하실 때, 곧 하나님의 법대로 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마28;20절에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도의 몸은 아직도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 영은 성도들의 중생의 영을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영은 의로 인하여 중생 하여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도 죄와 사망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살리시리라' 이 말은 '살리다'라는 동사의 미래형입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몸을 다시 살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10절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11절에서는 우리 육신을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은 죽어 이 땅에 묻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 오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우리 육신이 부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고전15;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20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였도다" /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영과 육의 갈등 속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의 사람처럼 육신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의 행실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 맙시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생명이요, 평안입니다.
'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28강)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 (롬 8:18-25) (0) | 2011.07.31 |
---|---|
[스크랩] (제27강) 하나님의 후사! (롬 8:12-17) (0) | 2011.07.31 |
[스크랩] (제25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4) (0) | 2011.07.31 |
[스크랩] (제24강) 성도의 내적 싸움! (롬 7:14-25) (0) | 2011.07.31 |
[스크랩] (제23강) 율법에서 자유! (롬 7:1-13) (0) | 2011.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