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3강) 하나님의 절대 주권! (롬 9:14-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0

《제33강》    하나님의 절대 주권! (롬 9:14-18)
 
  1-13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민족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고 너무도 고통스럽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사도가 되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족 중에 믿지 않는 자가 너무 많고,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너무 많아서 마음이 너무 괴롭고 아파서 하나님 앞에 차라리 내가 예수 안에서 저주받아 끊어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노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절한 마음, 괴로운 마음이 하나님의 섭리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 그는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니(조직적인 신학)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한 자 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13절의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같은 에서와 야곱 중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야곱이 에서보다 훨씬 교활한 자였습니다. 에서는 꾀는 없어도 남자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속담에 '엿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개에 100원씩 하는 사과를 살 때 500원으로 5개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6개, 7개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반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500원 내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과를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고 파는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유업을 물려받은 백성을 선택하실 때,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결정권입니다. 이에 대하여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제목소개!▶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아무 조건,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느냐? 이런 말들이 나올 것을 예상해서 바울은 자신이 묻고 자신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생각해 보십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종교입니다.
  ①선택의 주권이 있습니다.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입니다. '선택'이란 말은 '선택했다. 택했다. 택정했다'는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론 두 가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세 가지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즉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에서, 과거의 구원이 있고 앞으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는 미래 지향적인 영원한 구원이 있고, 그리고 매일 매일 당하는 현실에서 건짐 받는 현실적인 구원,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택도 ⑴사명적인 선택과 ⑵구원적인 선택이 있습니다.
  ⑴사명적인 선택이란 주께서 그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의미의 선택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들어서 쓰신다는 뜻이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과는 상관없이 다만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을 만방에 전하는데 사용하신 것입니다.
  확실히 이스라엘은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유일신 사상이 이스라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방에 소개한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이스라엘의 공로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예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가정을 택했고, 그 씨를 택했고, 그 민족을 택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이 쓰신다는 뜻입니다. 사울 왕은 선택되어 쓰임을 받았지만 영혼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⑵구원적인 선택이란 한 사람을 택하셔서 부르시고 믿음이 생기도록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쓰러지면 일으키고, 잘못가면 바로 가게하고, 억지로라도 잡아 당겨 믿지 않을 수 없게 이끄시는데 이것이 선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정론에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장로교와 감리교). 사도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기회주의 신학자들은 구원받는다는 입장에서 구원받는 것만 선택하고 유기(버렸다는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회주의 신학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선택과 유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상 질문에 '예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선택이 예정이면 버림도 예정이요, 천국 가는 것이 예정이면, 지옥 가는 것도 예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이중 예정론'입니다. 14절의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가 불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②하나님의 주권은 사랑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습니다.)
  ③창조적인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 계획의 주권에 의해서 만드시고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상황윤리가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전라도에 송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저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그곳에서 우리 부모 밑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것, 바로 한계 상황이라는 것은 우리의 출생과 사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합니다. 내가 감히 하나님께 왜 그렇게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따지지 못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이 말씀을 사29:16절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패리 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쉽게 말하면 만들어진 물건이 물건을 만든 사람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어떠한 선택을 결정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차를 가지고 계신 분은 가끔 느끼는 상황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그만 길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처칠 경이 방송국에 방송하기 위하여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느긋하게 달리고 있는데, 그만 그 차가 '웨스터민스터' 사원 앞에서 펑크가 났습니다.
  이때 영국 수상이지만 처칠도 차의 펑크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절대로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처칠 경이 다급해졌습니다. 방송시간은 임박해있고 시간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주위에 영업용 택시가 한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차에 올라타 운전사에게 방송국에 가자고 했더니 운전사가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갈 수 없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으면 처칠 경의 연설이 있는데 그 연설을 듣기 위해서랍니다. 처칠 경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호주머니에서 돈 한 뭉치를 끄집어 주면서 가자고 했더니 그 운전사 하는 말이 처칠의 연설이고 뭐고 돈이 최고지 하면서 차를 운전했습니다. 처칠 경은 그 날 연설을 죽을 써 버렸다고 그의 어록에 남겼습니다.
  처칠도 차가 펑크가 나는 것, 운전사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에 대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선택하실 수 있고,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①하나님은 자존자이시고, 인간은 의존자입니다.
  출3: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야훼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 자'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그분은 공기를 주시고 태양을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바람을 주셔서 우리는 삽니다.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만 인간에게 등을 돌리시면 한 사람도 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지 않으시면 온 국민이 난리가 납니다. 농작물은 타 들어가고, 공업용수도, 식수도 딸리고 전기도 딸리고, 물가는 올라가고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가끔 정부에서는 가뭄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이 풀어주셔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의지합니다. 백성은 정부의 치리 자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115:9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할/

  ②인간과 만물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 성도 구원받으며, 히스기야 왕은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 받았으며, 또한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불의한 생명을 일찍 데려가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숙명이 아닙니다. 또 팔자소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믿/
  ③인간의 계획과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잠16: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잠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6: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으로 보이는 형식을 통하여 인간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대통령을 뽑는 것, 국회의원을 뽑는 것, 흔히 투표라는 것을 취하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와 예수 믿게 된 것도 사람에게 전도를 받기는 했으나 우리의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뽑으시고 불러내어 예수님을 믿게 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겠습니다.

 

  ▶15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4절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불공평한 것이 아님을 밝힌 바울은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을 합니다.
  즉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본문은 출33:19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본문을 인용한 것은 그 당시 상황을 연구하고 이해한 다음 그 근거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33장은 당시 상황을 모세는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체험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는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답변에 하나님께서 출33:19절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모세를 택하여 하나님은 당시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모세가 머리가 좋아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칼  싸움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모세가 무술을 잘할 때는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40세 때에 무술을 잘해서 애 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피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80세, 인간의 황혼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애굽에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때 모세는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다 늙은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나는 부족한 자를 쓸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노력, 공적, 어떤 가치에 의하여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 의지에 따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 편에서 긍휼을 베풀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사랑할 자를 사랑해 주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좋은 뜻을 가지고 고아원을 방문해서 양자 한 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원장님의 소개로 많은 고아들 중에서 한 아이를 택하여 자기 차에 태워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고아는 이제부터 부자 집 아들이 되어 양부모 재산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때 고아원에 있는 많은 고아들이 이 부자에게 나를 택하지 않았느냐고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사랑과 긍휼은 오직 한 자를 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의지나 도모가 개입되지 못합니다.   ▶16절은 15절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본문을 세 단락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그런 즉 원하는 자들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여기서 원하는 자란 인간의 소원과 요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데 그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에 가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 사람들이 더 지독합니다. 왜? 그들은 소위 가정을 버리고 속세도 버리고 절간에 들어갑니다. 그들의 불심은 굉장합니다. 그들은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도 굉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뜻은 그런 영혼을 자기들이 사모하고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소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②"달음박질하는 자는 말미암음도 아니라" 달음박질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수단과 방법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대로 노력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고 허우적거리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큰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을 찾아보겠다고 애쓰다가 마침내 우상을 섬기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밖에서 줄을 던져 주어야 살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③"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멘!/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장로회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개혁교회라는 말입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칼빈주의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를 칼빈주의라고 하면서 다른 감리교에서 공격을 합니다.
  왜? 칼빈이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서 주의라고 했으니 사람주의가 무엇이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 자신은 한번도 칼빈주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1618년 11월13일에 네델란드의 '도르트'란 곳에서 대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네덜란드신학자들을 비롯해서 영국, 스콧트란드 장로교, 독일, 스위스의 신학자들, 73명이 모였습니다.
  회의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예정>이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가 앞서는 것인가? 이 문제를 토론한 회의에서 결론이 난 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강령'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무릎을 치는 것은 칼빈주의가 바로 성경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성경을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많이 연구했습니다.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가장 뛰어난 주석입니다.

 

  ▶칼빈이 세운 큰 교리 다섯이 있는데 그것을 칼빈 5대 교리라고 합니다.
  ①인간의 전적타락 ②성부 하나님의 절대 예정 ③성자 예수님의 제한 속죄 ④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⑤성도의 궁극적 승리(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으로 출발하여 성도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①인간의 전적 타락은 로마서 1,2,3장에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타락의 결론은 롬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은 생각하는 지성도 타락, 감정도 타락, 의지력도 타락해서 전적타락, 전적 부패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타락된 사람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 전부를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지식이 타락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우상을 찾았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것이 머리가 타락되었음을 뜻합니다. 어찌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보고 절하고 숭배합니까? 이것이 인간의 이성, 곧 지식적인 욕구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감정도 타락되어서 기뻐해야 될 것을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걷어차고, 치고,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권투할 때 피가 터지는 것을 보고 잘한다고 박수를 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면 별로 기쁘지 않고 넘어지면 고소하게 생각합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지금은 이웃이 자가용 사면 교통순경 한답니다.
  또 의지력도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조석변개, 작심삼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남에게 덕을 세우고 살지는 못하면서 괴롭히고 아프게 하며 삽니다. 의지력의 타락 때문입니다.
  롬1,2,3 인간의 완전타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인간을 성부 아버지께서 '절대적으로 예정'해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절대 예정' 즉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면 깨달아지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저와 여러분을 무조건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실 때 우리의 어떤 자격이 있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해서, 돈이 많아서, 배경이 좋아서, 또는 열심이 있어서, 우리가 선택되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조건 없는 선택, 그래서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무조건 선택하신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두 가지로 존재합니다.
  그 하나는 긍휼이 여기시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 바탕이 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15절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기서 '긍휼히 여기고'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리라'는 말씀은 이 긍휼의 행동의 바탕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③성자 예수님이 오셔서 '제한 속죄'를 해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만 속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세상 모든 죄를 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것은 예정된 사람만 믿기 때문에 예정된 자에게만 적용됩니다.
  요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위해서 죽는 다고 하셨고,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 장자의 축복을 받고자 애를 썼습니다. 정말 심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팥죽을 쒀서 배고파하는 형 에서에게 보이고는 형이 갖고 있는 장자의 축복의 자리를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그 축복을 받고자 형인 것같이 위장하고 그 축복을 몽땅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런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원해서 된 것보다 이미 그런 모든 소원을 주시고 그런 모든 열심을 주시면서 그가 큰 축복을 받도록 따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선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쌍둥이 형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자 별미를 만들기 위해 산을 달리면서 사냥하느라 뛰어 다녀서 사냥해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달음박질해 왔지만 그가 달음박질했어도 장자의 축복은 동생에게 이미 넘어갔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긍휼, 그 분의 사랑의 초점이 누구에게 갔는가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누구를 불쌍히 여기 겼는가에 달렸던 것입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축복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랑으로 말미암고 긍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다 헤아려 알 수 없고 따라서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을까?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속죄의 은혜로 구원받는 제한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할/
  ④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그 분의 속죄의 피 공로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보혈의 공로를 적용시키시는데 이 구원운동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을 막게 하셨습니다(17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출9:16절 "네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이미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출4:2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뜻은 두 가지 면이 다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데 그 강퍅한 마음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측면은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질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에서 자기 백성을 빼내어 오시는 해방의 일을 하심으로써 바로의 마음에 격분함과 강퍅함이 일어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로는 그의 죄가 드러나고 그의 속이 드러나고 그의 행위가 결국 하나님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격의 바로를 택하시고 세우셔서 그의 행위가 강퍅해지도록 두심으로써 결국 그 바로 자신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은 크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포하시는 도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따라서 불가항력,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출애굽은 이 불가항력적 은혜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세상 권세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위대하게 선포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인들 마음속에 있는 저항적인 세력도 그러합니다. 우리 속에 바로와 같은 옛사람, 강퍅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합니다. 설교가 듣기 싫어집니다. 교회가 하는 옳은 일도 못 마땅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구원운동이 못마땅해서 반대하는 마음들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스스로에게 오는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에, 예수님의 속죄의 복음 앞에 무너지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 곧 성령의 감동을 사람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래야 안 믿을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역사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저와 여러분 모두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을 마음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 믿고는 못 배기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몰아넣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는 법학도로서 크게 유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친구와 함께 오솔길을 가는데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벼락이 자기의 친구를 치더랍니다.
  깜짝 놀라 고목 나무 밑으로 들어가 고백한 것이 "하나님! 저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급한 나머지 한 고백입니다. 지나고 나서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던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서원한 것이기에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성령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였음을 알았습니다. 결코 루터 자신이 루터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루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⑤성도의 견인,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듯이 끝까지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8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끊을 수 있으리오? 아무도 끊을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가 바로 로마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성도의 견인은 성도들의 믿음의 인내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인내의 은혜가 있습니다. 인내로 인해 모든 역경이 바뀌어 지고 놀라운 축복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약5: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모든 물질을 잃었던 욥, 심지어 가정까지 파괴되었던 욥, 온 몸이 병들었던 욥, 결국 조강지처 마져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극단의 말까지 들었던 욥, 그러나 결국 욥은 모든 것이 회복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인내할 때 욥에게 주신 결말은 가정의 회복, 전보다 더 큰 경제력의 회복이었습니다.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17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5-16절 택자에 대해 증거 했으나 본 절에서는 불택자를 대신하여 구약시대의 바로를 들어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출9:16절의 인용인데,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을 박해하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10가지의 재앙, 다시 바로를 강팍케 하여 홍해까지 추격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킴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온 땅에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강팍한 바로를 사용하였습니다.

 

  ▶18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사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행하십니다. 긍휼히 여겨서 예수 믿게 해 주시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바로처럼 강팍케 만들어서 떨어뜨리는 자가 있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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