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1강) 유대인들이 받은 약속! (롬 9:1-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58

《제31강》     유대인들이 받은 약속! (롬 9:1-5)

 

  우리나라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보다는 내 가족이, 타국인보다는 자신의 동족에게 더 애정이 간다는 표현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상식을 뛰어 넘지 못한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도입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수고했지만 항상 그에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민족애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민족애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민족, 이 백성으로 태어났기에 민족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므로 이 민족이 잘 되어야 한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번영과 안일을 바라기보다는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신앙적 차원의 애국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동족을 사랑했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계속 핍박을 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14;19절에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안디옥,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이 먼 길을 달려와 그 동네 사람들까지 선동해서 돌을 던져 다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바울의 생애 마지막도 자신의 동족들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히고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유명한 신앙의 선배들은 빠짐없이 애국, 애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에스더, 예레미야, 다니엘, 특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유대민족을 바라보면서 크게 우셨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교만하고,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1-2절을 보면 동족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고통 하는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의 가슴속에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근심과 고통이 어떻게 다른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두 가지 다 비슷합니다. 바울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인간의 인간 됨이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적 존재로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은 율법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는데 그 양심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알게 하고 불의와 의를 알게 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내 속에 있는 양심 이 두 가지는 나를 점점 놀라움으로 채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1;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모든 것이 파선됩니다.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그의 잠4;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 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마음의 양심에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요(롬2;15), 내 마음에 등불이요(시18;28),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벧전3;21)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무엇일까요? 사실 바울처럼 고생을 많이 한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11;23-29절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참으로 바울의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통들이었습니다. 늘 감옥에 갇히고, 매 맞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을 맞았고, 물에 빠져 죽을 뻔하였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자연 재해를 만나기도 하고 하여튼 모든 어려움이란 어려움은 다 당한 것 같은 바울이었습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며 입지 못해 떨었던 적이 다반사였습니다.
  진정 바울의 속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나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자기 동족이 구원받지 못함으로 오는 고통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예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이요,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신앙의 연 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을수록 고통스럽습니다. 자기 식구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통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 지방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은! 골육은 도무지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핍박을 하고 괴롭힙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돌아오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양심과 심령 깊은 곳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 그를 찔렀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더라도 내 가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즐겨 쓰는 용어로써 주님과의 사귐, 교통, 연합을 의미합니다만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여기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에 대한 고통입니다. 그가 얼마나 진실 되게 동족을 사랑하는 가는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 진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했고, 또 성령으로 "거듭난 내 양심이 증거" 한다고 했고, 또 참되신 "성령 안에서" 이렇게 4종으로 거짓이 아닌 참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를 부릅니다. 창조주 되시는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참 하나님을 국민 각자 마음 속 깊이 모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복을 받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어느 도시를 침략했습니다. 그 도시의 시장과 간부들은 당황하여 항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바로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부활절이니 우선 기쁘게 예배를 드린 다음 항복을 결정합시다." 이것은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시장을 비롯한 시의회 의원들과 간부들이 목사님들의 의견을 따라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정한 시간에 일제히 교회의 종을 쳤습니다. 이 소리에 나폴레옹 군대의 군마들이 놀라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군대가 겁을 먹고 퇴각하므로 나폴레옹 사전에 불가능이 있다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 진실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입으로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부르면서 각종 행사나, 공무원 채용시험 등을 주일에 함으로 진실 된 성도들의 예배 참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동족의 구원 문제 때문에 근심하고 고통 하는 것이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맹세요, 성령 안에서의 맹세요, 또 성령으로 거듭난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근심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멸망하는 것은 근심하는 거룩한 고통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육신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잘 살아봐야 7-80년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물체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체입니다.
  김일성이도 카터 만났을 때, 앞으로 한 10년은 더 산다고 큰 소리 쳤지만 그는 갔습니다. 그의 육신은 미이라로 만들어 졌다고 하지만 그의 영혼은 벌써 지옥 음부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귀합니다. 주님은 한 육체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지 않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복음을 배척함으로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림받는 것을 알고 근심과 큰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 중, 부모 형제 중, 복음을 배척하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영혼이 있다면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가족의 구원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내 민족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도 선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믿지 않는 부모 때문에, 형제 때문에, 이웃 때문에 아파하는 거룩한 고통을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할/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후에 홍수가 날 것을 대비하여 산으로 올라가 배를 지을 때, 그동안 얼마나 근심하고 고통 했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바라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습니까? 이런 눈물이 거룩한 눈물입니다.
  오늘 바울은 이 거룩한 영적인 근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라!"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 근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바울은 지금 근심하고 있습니다.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빌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근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잠15;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근심은 뼈를 깎습니다.
  ▶'로버트 존슨'이란 사람은 <근심이여 안녕>이란 저서에서 말하기를 세상적인 그 어떠한 방법도 이 근심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길이 이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좋은 사도 바울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있습니다.
  고후7;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근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적인 근심입니다. 이 세상 적인 근심을 말라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세상 근심, 걱정, 우수사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6;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 목사님은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 염려와 근심이 끝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 신앙이 끝난다"고 말씀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이 근심은 영적인 문제, 신앙의 문제, 교회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이러한 근심은 회개의 열매를 이루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바울의 근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애통하며 근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근심은 고후11;28절 이하에서 또 나타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교회 때문에 걱정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 때문에, 또 실족해서 떨어져 나간 성도들 때문에 심장이 눌리는 그런 고통을 했습니다. 오늘 이 고통은 주의 종들에게 다 있는 고통입니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동족애를 보세요! 이것이 그의 신앙적 애국심입니다. 얼마나 자기의 골육의 친척을 사랑하였으면 자기는 버림을 받아 저주를 받는다 하여도 형제만 구원받는다면 괜찮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우리가 품는다면 영혼 구원은 이미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아니 이런 마음 있는 그 자체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 축복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막연히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내 몸을 내어주는 것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느니라" 여기 '형제'는 믿음의 형제가 아니라 혈통으로 유대인 된 자를 말합니다. 그 혈통은 아브라함의 혈통입니다.
  또 "골육의 친척"은 가까운 친척을 뜻함이 아니고 같은 동족으로써 사랑의 유대를 느끼게 하는 호칭입니다. 또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끊어져 멸망됨을 의미합니다.
  여기 "끊어질지라도" '끊어진다는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말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아 버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의 결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끔찍이 동족을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지라도" 나 한 사람이 저주를 받는 생명이 되더라도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 지옥 가더라도 나만 천국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고백에서 구약의 모세의 기도를 연상하게 합니다.
  출32;32절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지 얼마 안 되어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 산으로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이 아론을 설득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제부터 저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하신 신이라고 하면서 먹고, 마시고, 음란한 춤을 추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창대케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통 사람 같으면 "다 진멸하시고 나 하나만 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격할 것인데 모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쉽게 표현하면 만일 이 백성을 다 멸하시고 나만 살려주신다면 나도 살고 싶지 않으니 이 백성과 함께 죽을 수 있도록 생명 책에서 이름을 지워달라는 위대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사람입니다.
  에스더에 보면 그 당시 페르시아가 인도에서 구스(에디오피아)까지 127도를 치리하고 있을 때, 하만이란 대신이 유대인 모르드개를 아니꼽게 보고 전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때 왕의 부인인 유대계의 에스더에게 그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와서 무서운 경고를 내렸습니다. "너만 면하리라고 생각지 말라! 너만 왕비 자리에 있다고 목숨이 안전하다고 생각지 말라! 전 유대민족을 위해 기도하라!"
  기독교는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셔도 벌써 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아직까지도 돌아와야 할 영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될 때, 주님은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저주의 뜻은 그저 단순한 손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의 저주는 '아나데마'인데 '천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나, 시간적인 손해, 또는 육신 적인 죽음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아울러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 바로 오늘 바울이 말한 저주 '아나데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이란 육신의 병드는 것, 재물의 손해, 배상 당하는 것, 그런 아픔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끊어짐으로 받는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는 자들 때문에 고통을 해야 합니다.
  사실 바울이 이러한 심정을 가졌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왜?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일생동안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을 평생 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의 동족들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동족이요, 태창으로 때린 사람도 동족입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둔 자도 동족입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까지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이를 갈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사랑했습니다. 왜 그가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온 천하 만민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바울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롬10;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바울은 그의 민족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최고의 고통이요,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바울은 자신의 민족, 자신의 형제를 위하여 애타는 심정으로 그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나라 이 민족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참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생명을 죽이는데 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근심과 고통 없이, 다시 말하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딤후4;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견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열정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준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큰 근심과 큰 고통은 "내 형제 곧 골육 친척"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자기 백성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바로 이방인과 임금,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행9;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준 이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열을 다해 이일을 이루기 위해 생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얼마나 자기 백성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열정을 가집시다. 삶에 대한 열정, 사명에 대한 열정, 비전에 대한 열정,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집시다. 어찌 보면 인류가 누리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들이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학을 하면 과학자로 열정이 필요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축전기를 만들기 위해 무려 2만 번의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2005년 9월23일 동아일보에 보면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와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두 스타가 모교인 서울대에서 만나 생명공학기술(BT)과 정보기술(IT)의 융합 및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 등에 대해 특별대담을 가졌는데 그 분들의 좌우명이 참 멋있어서 소개합니다.
  황창규사장의 좌우명은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반듯이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듯이 죽는다>는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의 일사각오의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았고, 황우석교수의 좌우명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자! 하늘을 감동시키자' 즉 <최선을 다하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 진다>는 믿음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예술을 하면 예술가로 열정이 필요합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최소한 하나의 곡을 쓰기 위해 10번 이상 다시 쓰며 정열적으로 작곡했습니다. 하이든은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8백 개 이상의 곡을 작곡했습니다.
  불후의 명곡 '천지창조'는 66세 때 발표한 곡으로 나이를 초월한 그의 창작 열정의 산물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무려 10년에 걸쳐 그렸는데 그림에 너무 열중해 하루 종일 먹는 것조차 잊을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인으로 열정이 필요합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G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캔들러'는 의지력이 나약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 선언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하며 사업에 열중하는 열정의 사람이 되어 코카콜라를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맡겨준 일에 열정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열정으로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다윗의 열정이 골리앗을 무너뜨렸고 엘리야의 열정이 이방 선지자 850명을 굴복시켰습니다. 바울의 민족 사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였습니다.
  바울은 딤후4;7-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마지막 하나님 앞에 갈 때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정열이 있다. 그 정열은 주님, 주님, 한 분뿐이다." 그의 열정은 결국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 조직체의 하나인 '모라비안' 교회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할/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선민 유대인들이 받을 유산이요 약속입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지금 바울이 볼 때, 너무도 당당한 것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 말씀은 '선민이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개념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 백성 중에서 특별히 뽑은 민족이란 뜻입니다.
  시135;4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구주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2;6절은 미5;2절을 인용해서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를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그들은 혈통으로만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이 계통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오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통곡의 벽을 치면서 이미 오신 메시야를 믿지 않고 메시야를 보여 달라고 울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찌 기막힐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되지 말고 영적인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민 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믿/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특권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①양자 됨: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시는 것,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     신14;1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양녀로 입양시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가치고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자로 삼았으니까 이스라엘 편에서는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②영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과 만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그 영광을 누린 민족은 없습니다.
  ③언약, 약속: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속 약속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④율법: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⑤예배: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할 수 있는 영광과 특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세계 모든 민족에게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항상 지정된 성막에서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⑥약속: 구약의 말씀 전부가 약속.
  ⑦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⑧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8가지 기득권을 가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민족보다 먼저 예수 믿을 수 있는 기득권을 가진 민족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방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울분과 원통함과 근심과 걱정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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