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5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롬 10:1-1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1

《제35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롬 10:1-12)

 

  공자의 제자들이 하루는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죽음이라고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자가 "내가 아직 사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 진리를 아침에 깨달았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요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생의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통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우리의 신앙'안에 있습니다. ◀제목소개!▶

 

  9장에서 '선택과 유기'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진흙을 가지고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을 각각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듦을 받은 그릇, 곧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항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선택과 유기가 포함되었음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10장에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근본 이유를 또 하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믿음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택받고 예정된 자도 주의 복음을 들어야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전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자기 동족은 원수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 원수입니까? 바울을 핍박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요, 바울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이유는 유대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오해입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면 꾸벅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핍박이 심했는가하면 고후11:24절에 보면, 사십대에서 한 대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태장이라고 하는 것은 매의 끝에다가 납덩이를 달아서 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매를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신25:3절에 보면 사람을 사십대 이상 때리지 말라고 해서 40대 이하를 때린 것 같은데 얼마나 무서운 핍박입니까?
  우리가 참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를 갈만한 일인데 바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소원을 가진 가슴에 아픔이 있는 동족애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1-3절까지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을 지적'했고, 4-12절에서는 '믿음으로 의와 구원을 얻게 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형제들아!"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일방적인 애칭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형제들아'는 예수 밖에 있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부름 속에는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회개를 촉구하는 애끊는 동족애의 발로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의 구원을 놓고 뜨겁게 기도한 사람입니다.
  롬9: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원하는바'란 사도 바울의 마음의 소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동족들에게 배척을 당했지만, 오히려 그는 동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사도입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국경이 없어도 신앙인 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수 안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형제자매이지만 신앙 인으로서 개인의 조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천리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동시에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며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의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가? 동족이 다 구원받는 것입니다. '네 마음에 원하는 바라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이런 동족애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내 민족을 위하여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참다운 열심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하나님 앞으로 그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를 두고 전도를 해도 믿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계속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마음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어느 부흥 강사님의 외침입니다. <당신들의 돈지갑이 빈 것을 가슴 아파 하지말고 하나님나라에 자리 빈 것을 애통하십시오. 하늘나라 빈자리를 채우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할/ 하나님의 나라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은 섬기는 교회의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열심에 빠져있기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으나 잘못된 열심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누구든지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마음이 미지근한 믿음, 뜨거워져야 합니다. 불 꺼진 엔진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듯이 열심 없는 신앙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열심이라고 해서 다 건전한 것은 아닙니다.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헛된 열심,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부질없는 노력에 비유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때에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을 가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쏟느라고 하더라도 그 열심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잘 못된 열심 몇 가지만 생각해 보자!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보행 거리 제한을 엄격히 지켰는데 2km 이상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잎 두개 이상의 무게를 들면 짐(노동)으로 간주했고, 요즘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등 스위치 켜는 것을 일로 보고 자동장치를 하거나 이방인을 고용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 자체는 훌륭한 일이며 칭찬 받을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의 정신에서 어긋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한 때 잘못된 열심을 가졌었다고 고백했습니다(행22:3).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향하여 기차를 탔으나 반대방향의 기차를 타고 말았기에 가면 갈수록,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열심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지식입니다. 지식과 열심은 함께 가야합니다.
  그들의 열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신앙 지식에 기준을 둔 열심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인 유전을 지키려는 인간적인 열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는 것인데 그들은 율법을 잘 알므로 또한 종교적인 행위를 거룩하게 지킴으로 또한 도덕적으로 행위가 바르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종교적으로 열심인 민족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십일조 생활도 충실히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얼마나 열심입니까? 지난 88올림픽에 참가해서도 그들은 음식을 가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체 종교행위 때문에 올림픽 본부에서 굉장히 신경을 썼다고 그 당시 올림픽위원장으로 있던 박세직 집사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토요일만 되면 불을 피우지 않으며 세상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모르고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여러분, 무지한 것은 죄입니다. 이스라엘의 무지함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거리가 먼, 다시 말하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바른 지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무지한 사람들은 무슨 종교든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이 땅에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는 도로로 달려야 합니다. 기차는 선로를 이탈하면 탈선하고 맙니다. 성도의 열심은 말씀에 기초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믿/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 웨슬러'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지식이 없는 열심을 가졌으나, 우리들은 열심 없는 지식만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3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열심이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얻은 의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요구는 구원의 동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신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자기의 의란 자기의 머리대로, 판단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18장에서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리세인의 기도를 보자! 눅18: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굉장히 자기를 들어내고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자기의 죄를 원통히 여기며 통회 자복하는 세리와 의를 뽐내며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은 여러 가지로 자신의 의를 나타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바리새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착각했고,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은 어떤 선을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가 의인된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의 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가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할/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기서부터 바른 지식을 가르칩니다. 믿음으로만이 의를 이루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마침"이란 '율법의 끝이란 말로써 율법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써 본문에서 한번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의인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 된 모습으로 돌아가시어 죄인을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마침이란 율법의 요구가 다 채워졌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율법 자체가 예표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는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순서를 보면 제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뒤에 오신 것 같지만 의미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미리 율법의 표를 보내주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본 절에서 바울은 율법은 일시적인 것이요, 미완성의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필요했으며,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는데 까지만 필요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실제(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예표적으로 주어진 제사는 끝이 났습니다.
  갈3: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식법과 도덕법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많은 의식 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으로 이제 다시 제사(피)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 도덕법은 십계명을 들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이 율법은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의 마침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5:17-18절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치명적인 무식은 율법에 대한 곡해가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는가를 몰랐습니다. 물론 율법을 다 지키면 의를 얻고 그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율법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고 의로 인정함을 입어 영생을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고 열심을 내다보니 하나님의 의를 복종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으로써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교를 이단으로 보고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인 줄 알고 맹렬히 핍박했습니다. 빌3: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유대교에서 예수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연구해보니 인류구원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어 그로부터 오직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교리가 바로 로마서의 주제 이신칭의 교리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레18:5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그 율법을 행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이를 이루어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율법을 다 행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2:10-11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였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율법은 613가지입니다. 아무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6-7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씀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신 분이 만치 않습니다. 말씀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30:12-14절을 읽고 비교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신명기의 내용을 다 인용하지 않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라는 말 한마디만 따로 떼어 인용을 했기 때문에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30:12-14절을 보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려고 하늘에 올라가서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보려고 죽은 자들 세계를 돌아다녀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고, 이미 전파되어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 속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것 같은 열심을 다하여 천국가야겠다는 그런 잘못된 열심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요, 또 지옥까지 내려가서 고통과 괴로움을 다 당하여 어떤 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어떤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행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빌3:9절에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했고, 롬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나, 롬10: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고, 또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믿/

 

  ▶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무엇을 말하느뇨?"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말인데 무슨 말씀인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의를 완성해 주셨고 또 부활하심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겨주신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입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날마다 읽을 수 있는 말씀이요,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또 '믿음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기 때문에 성경 66권을 의미합니다.
  히11: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딤전4:6절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후3: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원래 성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책을 말할 때 '사서삼경'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중국에 이 사서 삼경이 있다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성경이 들어왔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서 읽어보니까 '사서삼경'보다 훨씬 더 심오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에 이름을 붙이기를 사서삼경보다 격을 더 높여서 '성경 또는 경전'이라고 붙인 것이 오늘 이 성경책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 성경이 처음 한국에 소개된 것은 1832년에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에 의해서입니다. 옛날 문헌을 보면 그 당시에 귀츨라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국의 임금에게 처음으로 성경을 봉정하는 영광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언젠가는 그 일을 후회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신하 중에는 성경을 받은 이들도 있다. 그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한국에 설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고증이 있습니다.
  ▶1866년에 영국의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배를 타고 황해도 해안 지방을 거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 근처로 들어와 그해 8월 11일날 신장포에 닻을 내립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한창 쇄국정치로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있을 때이므로 평양 감사 박규수는 그들이 타고 온 배에 총격전을 벌려 '셔먼호'는 그만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면서 이 토마스 선교사는 붙들리게 되었고 평양 감사 박규식으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해 9월 3일날 사형장으로 끌려간 토마스 선교사에게 칼을 휘두른 사람이 묘하게도 김일성의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사형을 당할 때 이 토마스 선교사는 품속에서 한문 성경책을 꺼내서 그에게 주면서 '예수 믿으십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전도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들이 '김혁직'인데 그가 나중에 평양 숭실대학교에서 기독학생 회장이 됩니다. 그리고 졸업 후 칠곡 출신인 믿음 좋은 '강반석'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해서 마침내 김일성을 낳게 됩니다.
  얼마나 묘한 인연입니까? 김일성은 후에 어머니의 고향인 칠곡에다 교회를 짓고 그 교회 이름을 '칠곡 교회'라고 명명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얼킨 그 옛날에 있었던 사연들입니다.
  ▶한국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75년에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로스' 목사가 만주에서 서상륜이라는 한국인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1882년 처음으로 누가복음을 3천 권을 내놓았는데 이 번역된 성경책을 들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역사적으로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이 땅에 성경책이 반포되게 된 시점입니다.
  그러다가 1900년 5월 9일 날에 가서야 신악성경 전체가 완역 출간되어 반포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경은 1910년 4월 2일에 가서 완간되었고, 다음해에 가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함께 묶어서 '성경전서'로 합본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5년 만에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구약성경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비로소 '성경전서'로 출간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이 오늘에 와서는 세계 200여 나라에 수출되고 있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성경책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할/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반듯이 구비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몇 가지 조건은 본문의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절대적으로 생명 바쳐 충성하고 순종해야 할 주님으로는 고백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이런 고백을 못 드립니다.
  두 번째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를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였기에 나의 주가 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의 참 믿음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마음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 믿음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신앙은 고백입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입으로 증거 하는 것은 행위의 첫 걸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곧 말라죽습니다.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미래 완료형입니다. 구원은 이루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성도가 죄악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이고, 영이 점점 자라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인격에 점점 이루어져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처음 믿을 때는 신앙이 어리고 영성도 어려서 어린아이 같다가 점점 자라나서 장성한 자와 같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자라나야 합니다.

 

  ▶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28:1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롬9:33절에서도 인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절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①성경은 나를 상대하는 책입니다. 딤후3:14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했고, 15절에 "또 네가", "너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너'라고 하는 개인을 상대하는 것은 구원이 개인적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시대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상대하고,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②성경은 철저히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하라'는 말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라는 말입니다. 계속적인 거주를 의미합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예수를 알고, 성경을 배우면서 영생을 알고, 성경을 배우면서 천국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어야 될 것을 알리는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영생의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책이요, 죄인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책입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생명을 다루는 책입니다. 죄인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영생문제는 천하를 다루는 문제보다 크고, 급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다가 사람들이 변화를 받습니다. ■독일의 사상가요 신학자이며 의사이며 음악가였던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자라난 사람이었는데, 그는 성경을 통하여 참된 삶의 교훈을 받고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칭찬을 받은 성자입니다. /믿/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물론 어떤 민족도 차별이 없으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요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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