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4강) 예정구원의 당연성! (롬 9:19-3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1

《제34강》      예정구원의 당연성! (롬 9:19-33)

 

  본문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리를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유기)이 있고, 예정 선택할 자가 있음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창세전에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결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내버리셨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바울이 주장한 교리요, 어거스틴의 신학이요, 칼빈의 예정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만들어 낸 학설이 아니라 성경에서 발견한 신학입니다.
  19-23, 하나님의 예정 구원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19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본문은 18절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고, 완고(강팍)하게 하게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7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운동을 방해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능력으로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까지 추격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는 갈라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바다에 수장하므로 전멸시키므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도록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바로와 같은 사람을 강퍅케 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어찌 바로를 책망하시고 진노하시는가? 하나님이 강퍅케 한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당연한 반론이 나오게 됩니다.
  더 쉽게 정리하면 유기된 자, 곧 내어버린 자의 범죄와 불신으로 인한 멸망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나 물건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로를 돌보지 아니하시고 내버려두시므로 바로 자신의 악한 마음이 제 멋대로 강퍅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본문은 바울이 가상으로 문제를 내고 답하는 형식입니다. 19절의 물음을 20절에서 대답합니다. 즉 하나님이 마음을 강퍅케 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게 한다면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에 답을 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가?'를 따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그 질문 자체가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19절에서 말한 하나님이 택한 자와 불 택자를 내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케 해 놓으시고 왜 바로는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가?'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그릇된 생각과 주제 넘는 판단을 하는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답변을 해 줍니다.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어느 사형수에게 형 집행 일이 내일로다가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의 특사가 내려와 특별히 용서해 줄 테이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며 그 사형수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 경우 함께 있던 다른 사형수들이 왜 저 사람만 구해주고 나는 이렇게 죽게 하는가? 하고 따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특사의 결정은 오직 대통령에게만 있고 그 이외 어떤 누구도 대통령의 결정에 대하여 따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특사가 오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죄인 인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뿐입니다. 인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인생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신데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일의 뜻을 다 알지 못하는 차이가 너무 크므로 감히 항거할 권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할 정도가 못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제일 불효 막심한 자가 누구인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보고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낳으셨냐?"고 따지는 사람입니다.
  20절을 쉬운 표현으로 하면 "야 이 사람아 네가 누구 길래 감히 하나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느냐?" 주제 파악 좀 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근본 태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신가? 아니면 인간이 창조주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분인가? 사람이 하나님께 명령하는 잔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있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있는가? 이런 문제를 지금 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인간은 종(청지기)입니다. /믿/

 

  ▶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바울은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천하게 쓸 그릇과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토기장이조차도 같은 진흙 한 덩어리로 자기 맘대로 그릇의 용도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천지의 대 주제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택하고 버리신다고 누가 감히 따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토기장이>라는 신앙사상을 창2:7절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토기장이' 신학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후4:7절에서 '인간을 질그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질그릇을 만드신 분은 토기장이 신학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토기장이 신학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하였는데 이 구절들은 질그릇같이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표현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잘 표현한 사상입니다.
  본문은 렘18: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써, 구약의 예레미야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바벨론이 왜 강해지며 또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나라는 전쟁이 없는데 하나님을 믿는 이 백성들은 왜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느브갓네살'보다는 좀 낫지 않느냐는 것이 예레미야의 생각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데 백성들은 회개는커녕 더 죄악으로 달려가기만 합니다. 또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으며 이 백성이 이렇게도 완악합니까? 어찌하여 악이 승리하게 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대답으로 토기장이 집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 집에 가보니 토기장이는 자기의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부스기도 하고, 큰 것, 작은 것 멋대로 빚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예레미야에게 들려옵니다. "보라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서 제 멋대로 그릇을 만드는데 네가 이 백성의 역사를 주관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목적이 있음을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시며 불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온전하신 그 뜻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밥그릇을 만들고 변기를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강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요강으로 만들었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에 따라 택한 백성을 내기도 하시고, 불 택자를 내기도 하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피조물은 항거할 수가 없습니다. /믿/
  '밀턴'의 실낙원에서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대하시며, 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다'고 찬양하며 천국으로 가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 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느 마귀가 지옥이 너무 뜨겁고 견디기가 어려워서 부르짖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님을 믿을 걸…" 이때 대장 마귀가 "이놈아 이를 갈아라. 네가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마귀도 마지막 하나님의 주권 앞에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22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바울은 22-23절에서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그릇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을 나타내려는데 목적이 있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나타내려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절은 진노의 그릇 즉 불 택자의 필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 택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불순종하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유기 했다. 즉 버려 두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는 유기도 예정됨을 믿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유기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유기된 완고한 사람을 즉시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을 더 알리기 위함입니다. 바로의 경우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진노의 그릇'은 이미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기 때문에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불 택자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은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①택자를 위함입니다. 곧 성화시키려는 도구로 악인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사용하십니다. 김일성을 보고 공산당이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나쁜 사람들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줍니다.
  ②하나님의 관용입니다. 세상에 나쁜 짓 하는 사람이 더 잘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왜 그럴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관용입니다. 그래야 마지막 심판이 필요합니다. 죄 지을 때마다 심판을 한다면 마지막 심판은 필요 없습니다.
  ③장차 대 진노로써 심판을 하신 영원한 형벌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완악하고 흉악한 자는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것이기에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수도, 반항할 수도 없습니다.

 

  ▶23절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본절에서는 궁휼의 그릇인 택자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택자 곧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나타내고 또 당신이 영광을 받기 위한 그릇입니다.
  마13장에 보면, 택자는 알곡이고, 불택자는 가라지입니다. 마25장에서는, 택자는 양으로, 불택자는 염소로, 택자와 불택자는 그 종류가 다릅니다.
  염소는 양이 될 수 없고, 가라지는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13절 '하나님이 야곱은 택자이기 때문에 사랑하시고, 에서는 불택자이기에 미워'하십니다. 롬8: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할/

 

  ▶24절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부르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복 받은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유대인들만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로 매여져야만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아브라함과 구주의 언약을 주시면서, 창12:3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창18:18절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했고, 이삭에게 언약하시기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22:18)고 하셨으며, 야곱과의 언약에서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할 것 없이 '네 씨와 네 자손'은 갈3:16절에서 해석한 대로 오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고 '모든 족속/천하 만민'은 전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 중 택한 자 만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마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은 곧 혈통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자가 문제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불택자가 있고, 이방인 중에서도 택자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그 사람만이 정말 하나님이 부르신 자요 선택한 백성입니다.
  저는 '예정 교리'를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부족한 것은 많고 아무 것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또 종으로 세워주신 것이 정말로 감사합니다. 만약 시험 쳐서 간다고 한다면 저는 못 갑니다. 어떤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십 중 팔구 떨어집니다.
  또 감사한 것은 내가 믿음을 가졌다 해도 부족해서 하나님이 선착순 몇 명까지 끊어버리시면 저는 꼼짝없이 밀려납니다. 그러한 저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불러 예수 안에 예정해 주셨으니 부족해도 천국은 이미 따 놓은 당상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5-26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호세아의 이름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예수와 같은 이름이 여호수아, 호세아 다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서나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 또 다른 곳에 보면 '호세아'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나 호세아는 '히'어로, 구원자란 뜻이고, '헬'어로 번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습니다. 또 마음까지 찹찹해 집니다. 호세아는 지금으로 말하면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보고 음란한 여인 고멜을 취하여 아내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요즘엔 목사가 술집 기생하고 살면 큰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장가들라고 하십니다. 이 고멜은 원래 끼가 많은 여인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고멜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들이 자녀들을 낳았는데 이름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고, 딸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란 뜻입니다.
  이 여인은 아이들 몇 명 낳고는 도망가서 다른 남자와 살았고, 또 기생 질 하다가 마지막에는 어디로 팔려가서 종노릇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누구라도 이 여인을 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보고 그녀를 찾아가서 돈을 주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호세아는 고멜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나는 너만을 사랑하니 너는 다시 나를 배반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입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한 것이고, 고멜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더러운 여인 같은 이스라엘, 죄 많은 이스라엘을 보고 "돌아 오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나는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실물 교육에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어째든 하나님께서 부정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새롭게 하고 온전케 하여 정숙한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에 관해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호1:10절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찾은 것은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 원리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으로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선택된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이어받은 약속의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만이 정통이며 진정한 정통을 이어받은 자라고 자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여 그러한 유대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1:9절과, 사10: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알 같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이라 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 이기고 승리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숫자가 그렇게 많아도 구원받은 숫자가 그리 많은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 남은 자의 비유를 말할 때,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의 열매를 추수할 때 다 따고 나면 가지 끝에 남은 두, 세 개 또는 대여섯 개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로하면 감나무에 감을 딸 때 두 서너 개는 '까치 밥'이라고 남겨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28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반드시 성취하시고 끝내신다는 뜻입니다. 마5:18절에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획일점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절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한 대표적인 도성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받게 될 심판을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씨를 남겨주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성도로 부름 받은 것, 또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이 감히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형통이 좋아서, 수양을 많이 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또 착하게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남겨두지 아니하시면"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방탕에 빠지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심판을 받지 않고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소망 삼게 된 것입니다. /믿/
  인간 별거 아닙니다. 예수 잘 믿었다가 타락하면 밑바닥까지 내려갑니다. 아주 형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은 하나님이 건져주십니다. 환난 때도, 곤고 때도, 시험 때도, 풍랑 속에서도 건져주십니다. /믿/

 

  ▶30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본 절은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적인 부분입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14절은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여졌고, 본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한 모세의 율법 속에서 의를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본문의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란 말은,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으며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의로워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말함'입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13: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곧 믿음으로 난 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의입니다. 이 의를 믿는 자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심령을 변하게 하고 생활과 환경이 변하게 됩니다. 영국의 바이킹 후손(해적)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계에서 제일가는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31절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의의 법"은 모세의 율법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좇아갔으나 끝내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를 얻기 위하여 이 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의를 얻은 대신 의의 법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32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본 절에서 바울이 무엇을 말합니까? 행위로 말미암아 열심히 의를 구한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아닌 자신들의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돌, 즉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치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믿음의 대상이 되지만 행위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부딪칠 돌이 됩니다.
  참으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온전하게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원의 은혜에 부딪혀 넘어지고 맙니다. 이 사실을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7백 년 전에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3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의의 법을 좇아 간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여기서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아니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 받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부딪혀 깨어지고 망합니다. 바위에 계란으로 치는 격입니다.

 

  ▶33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사28:16/8: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8:14절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사28:16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느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 하리로다"  
  예수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그 돌에 부딪히는 자는 깨어지고 거치는 자는 넘어진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다가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벧전2:4-5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생명이 되고, 보배가 되고 모세 반석이 되어 견고한 보호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만세 반석 안에 숨어 있으므로 원수 마귀가 손 못 대고(요일5:18),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으로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산 돌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벧전2:4-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기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놓는 초석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 된 성도들의 기초 돌이요 또한 교회의 없어서는 안 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만 알아보자!
  ①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말입니다. 건물의 기초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기초 반석을 '초석' 혹은 '머릿돌'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 하나하나의 신앙 기초가 되시고 하나님 교회의 견고한 기초 반석이 되십니다. /할/
  ②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머릿돌이란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어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위로나 똑바로 벽돌을 쌓아갑니다. 만일 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조금이라도 삐뚤거나 기울어지게 되면 모든 건물은 균형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믿음과 생활의 표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가리켜서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산 돌이라는 비유는 얼른 생각하면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이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또 동시에 돌처럼 견고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되었었습니다.
  대하 26장에 웃시야 왕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준 아주 인기가 많았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려고'했습니다. 웃시야왕은 그것 때문에 문둥병에 걸려 왕이면서도 죽는 날까지 별궁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제사장들만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는 권리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성전의 휘장은 제사장만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오도록 처 있던 것인데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그것이 찢어졌습니다.
  히10:19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찢어진 휘장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휘장을 찢어 주셨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제사장에게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과 함께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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