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2강) 누가 선택받은 자녀인가? (롬 9:6-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59

《제32강》    누가 선택받은 자녀인가? (롬 9:6-13)

 

  ▶사람들은 일생동안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의 부름을 받습니다.
  ①출생의 부름이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름이 있습니다. 주께서 부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습니다. 거듭남의 부름입니다.
  ③사명 자로서의 부름 즉, 제자로서의 부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선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집사에게는 집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장로도, 권사도, 목사도, 직분에 맞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각각 주어진 사명이 다릅니다.
  ④심판대 앞에서의 영원한 부름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 모두는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부르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를 불렀느냐 입니다. 친구가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정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부를 때는 효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는 국민으로서의 법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명 바쳐 죽도록 충성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합니다. 예수 믿는 다고 금방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방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변합니다. 바꿔집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제목 소개!▶
 
  옛날에는 대부분 가정에서 자녀들을 많이 낳아 키웠습니다. 보통이 서넛이요, 많게는 12명까지 키우는 것을 봤습니다. 그 많은 자녀들을 키우느라고 한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저는 보기도 했고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애써 키웠는데도 부모에게 효도는커녕 늘 불평만 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별로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받지도 못했는데도 늘 부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자식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 있듯이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있고,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늘 감사하며 감격하는 삶을 살지만 은혜를 모르는 자는 불평과 불만 속에 삽니다.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앞장에서 상고했듯이 바울에게는 ▶몇 가지의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①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을 쓰시려고 선택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멘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들에게 성경도 허락하셨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었습니다.
  이토록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그들이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축복임에 틀림이 없지만 오히려 그 일이 이스라엘에게는 불행의 씨가 되고 심판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복이 화가 된 것이요, 은혜가 저주의 시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귀하게 쓰시려고 선택한 일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아니 하면 하나님은 버리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버림을 당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장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 계시는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배척하고 결국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영적인 무지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저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아집과 교만으로 일관함으로 불순종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요 진노의 길임에도 한사코 그 길을 고집한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 이를 바라볼 수 있었던 바울의 고뇌와 근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사도 바울과 같은 고민을 체험하게 됩니다. 진정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적은 사람일수록 남편의 구원, 아내의 구원, 부모 자식의 구원은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여러분,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옥에 확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 구원을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3절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아 버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만 구원할 수 있다면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동족애입니까?

  ②그의 고민은 동족들이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박해까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만 해도 큰 죄인데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죄 중에 큰 죄를 그들의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누가 방해했습니까? 자신의 동족 유대인이 했습니다. 바울은 일생 동안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돌로 친 사람이 동족이었고, 태창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고,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었고, 감옥에 넣은 사람도 동족이었고,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이 동족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를 갈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사랑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신령한 통찰력으로 인한 고민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핍박을 받을 때, 핍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도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마5:10-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핍박을 받는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핍박하는 그 사람들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③그의 고민은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고민이었습니다.
  선민이 왜 이래야 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자신의 동족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한 결과 그는 신학에 근거하여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6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4절에서 언급한 언약이나 약속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시고 계속해서 "네 자손으로 더불어 하늘에 별처럼 바다에 모래알처럼 창대한 복을 주실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은 창21:12절 하반절에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벌써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의 육신의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언약을 받은 백성이 구원의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또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다 이루어집니다. /믿/
  사도바울은 이 큰 고민을 푸는 열쇠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가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패하여 질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수의 다수를 막론하고 선택 자가 있고, 믿는 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선택과 유기(버림)'의 학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그리고 7절로 이어집니다.

 

  ▶7절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고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동족의 구원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고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왜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이 왜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고 돌아오지 않을까? 연구하고 고민하다가 그 문제의 성경 적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구약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그 결과 얻은 해답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 같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는 다는 사실을 선택과 유기, 선택은 택하는 것이요, 유기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여기서 참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말씀, 믿음)의 자손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지금의 아랍족속이며, 이삭은 유대 민족입니다. 한 아브라함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선민)과 이방민족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창18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0이 넘었습니다. 아들도 딸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들도 딸도 그 씨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늘의 별같이 땅의 모래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신앙입니다. 믿음은 어떤 과학적인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갑니다. 이때 부인 사라가 "여보! 암만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나이가 이렇게 많아 아이 낳기는 예전에 틀렸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약속을 이루실 것이 아닌 것 같소. 머리를 써 봅시다. 내 몸종 하갈은 아직 젊고 예쁘니 당신이 그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이루어져도 되고, 저렇게 이루어져도 되지 않겠소. 하갈이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는 내 몸종이니 내 이름으로 호적하면 내 아이가 될 것 아니오"
  이때 아브라함은 마땅히 "사탄아 물러가라!" 고함을 쳤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그 소리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도 엉뚱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 당신 말이 일리가 있소. 아무래도 젊은 여자여야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당신처럼 늙은 몸으로 무슨 아이를 낳겠소. 고목 나무는 절대로 꽃을 피울 수가 없다오. 아마도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르니 그렇게 합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갈과 아브라함이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때부터 하갈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라를 주인으로 신중히 모시던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고 나서는 주인행세를 합니다. 아예 사라를 업신여기기까지 합니다.
  이때 사라의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수모! 이런 것을 가리켜 자업자득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놓은 올무에 자기에 걸렸습니다. 자기가 판 우물에 자신이 빠진 것입니다. 둘이 뚝하면 싸움을 합니다. 화가 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호소합니다.
  "여보! 저 여자를 쫓아내시오. 저가 낳은 자식으로 우리의 기업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 같소!"
  언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니 또 이렇게 바꿔집니다. 아브라함만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제 얼마 있으면 그렇게 그리던 자식을 볼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이 쫓아내었더니 가다가 도로 돌아왔습니다. 하갈이 잘못을 빌고 돌아와서 아이를 낳아 잘 길렀습니다.
  그 아이가 이름하여 '이스마엘'입니다. 그의 후손이 지금 통일 아랍 족속입니다. 그때 한 번의 실수가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갈4장에서 바울도 이스마엘을 가리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 자가 이스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수단으로 아이를 얻으려고 했으니 인간의 노력 곧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 신기하게도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 이삭이 약속의 아들이요,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 아들이 믿음으로 받은 아들이요, 참 이스라엘의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씨는 같으나 어머니는 다릅니다.
  본문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하면서 한 혈통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택함을 받았고, 어떤 자는 버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본 절에서는 언약의 후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란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은 가리키는데 그는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낳은 아들, 이삭을 가리킵니다. '약속의 자녀'인 '테크나'는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에서 '이삭으로부터 난 자, 이삭 안에서 난 자'란 뜻입니다.
  본문에 '이삭으로부터'란 원문에서는 '엔 이사악'(en Isaac)입니다. 즉 '이삭 안에서'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란 말씀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란 '약속의 말씀'안에서라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롬8:1-2절 말씀이 더욱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 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서'란 '그분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란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놀라운 힘을 얻습니다. ▶바울 사도가 외칩니다.
  빌4:11-13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씨는 7절의 아브라함의 씨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손이요, 참 이스라엘의 백성입니다.
  요1: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구원받는 데는 혈통, 곧 누구의 핏줄에서 어떤 나라에서가 필요치 않고 육정, 곧 인간의 노력도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혈통이란 피를 말하는 것이요, 육정이란 인간의 힘과 노력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원리는 그런 혈통과 육정 속에 있지 않음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9절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창18:10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에 앉아 있는데, 소돔,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러 가면서 세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그들을 극진히 선대합니다. 물을 떠다가 발을 씻기고, 떡을 굽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여 그들을 대접합니다.
  이때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이 천사가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아 기한이 이를 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소리를 몰래 숨어서 사라가 듣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아이를 낳는다니... 고목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다니..." 웃었습니다.
  이때 사라는 숨어서 웃었지만 천사는 사라를 보고 책망합니다. "왜 사라가 웃느냐?" 그러면서 창18:14절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 놓았지만 정말 천사의 말대로 기한이 되어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나왔습니다.

 

  ▶10-11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본 절에서 13절까지는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10절은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인데 그가 이삭으로 말미암아 쌍둥이를 잉태한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태중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리브가는 태중에 쌍둥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야곱과 에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신앙을 한번 집어 봐야 합니다. 결혼하고 바로 임신한 것이 아니며 이삭이 또 늦게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삭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엉뚱한 생각도 안 했습니다. 이삭은 돈도 많았습니다. 얼마든지 딴 생각을 품으면 가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딴 생각 안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통해서 땅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안 주시니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아들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이 안 된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쌓을 곳이 없습니다. /아멘!/ 주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들이 선을 행하면 무슨 선을 행할 것이며, 악을 행하면 어떤 악을 행하겠습니까? 선악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했다고 택한 것이 아니고, 악을 행했다고 버린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어떤 선을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택하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의 의미를 알아봐야 합니다.
  ①'가린다, 분리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가리시고, 분리시킵니다. 그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것은 창30:32절에서  마치 야곱이 라반의 양 떼들 중에서 점 있는 양과 검은 양과 아롱진 양을 골라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②택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을 의미합니다. 이 택함은 인간의 욕구나 소원으로 말미암는 성질이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을 통해서 모세, 바울,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③'빼내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이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 빼 냄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택함 받은 은혜는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믿/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원 적이신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께서는 어떤 행위를 보고 우리를 선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12-13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또 1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기록 된 바'는 구약성경을 인용했다는 말입니다.
  말1:2-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고, 에서는 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선택과 유기를 이삭과 이스마엘을, 또 에서와 야곱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가졌을 때 배가 자꾸 아팠습니다. 왜 그런 고하니 태중에서 쌍둥이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태중에서 아이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십니다.
  생일도 같고 부모도 같은데 하나는 선택, 하나는 유기, 큰 자는 에서고 작은 자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호전적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이 장자의 복을 받으려고 형의 발꿈치를 물어뜯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치사한 방법입니다.
  오히려 에서는 신사적이었습니다. 배신도 않고 속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오늘날 야곱의 후손은 정통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를 믿어 영적 이스라엘이 된 기독교인들입니다. 에서의 후손은 에돔으로 선민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벌을 받아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어 솔로몬과 그의 후예들에게 해마다 공물로, 양털로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선택의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인간의 이해 밖의 설명입니다. 한 마디로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야곱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특별한 공로나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 야곱이야말로 뱃속에서부터 날 때, 전 생애가 연약과 간사로 얼룩져버린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①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은혜 ②스스로 있는 자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정론의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엡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⑴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영원한 계획입니다. 곧 미리 계획된 목적지라는 의미로 롬8:29-30절에서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과 같은 구원의 여정을 두고 말합니다.
  ⑵하나님은 선택의 주체이시며 믿는 자가 그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택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입니다.
  ⑶예정의 시기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 기초를 놓으시기 전에 벌써 인류에 대한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무런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시139:14-16절은 다윗이 예정론을 잘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도대체 이해 못할 만큼)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정론의 교리, 택함 받은 교리'를 가지고는 전도 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택함 받았으면 믿을 것이고, 버림받았으면 안 믿을 것입니다" 한다면 큰일납니다. 전도는 택함 받은 자들을 찾는 것이므로 우리는 누가 택함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택함의 교리를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상당한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달아지는 교리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교리를 가지고 이론적으로 따져서는 안 됩니다. 왜? 성경은 모든 교리를 이론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 단위로 선택하신 것은 개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어떤 임무를 맡기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명적 선택과 구원적 선택이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기신 사명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오시는 그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민족 단위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모든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 왕은 왕으로 선택을 받았으나 영혼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의 은혜가 따라야 됨을 바울이 깨달은 진리입니다. /할/
  ▶본문(12-13)의 말씀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논란이 되는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 그리고 웨슬리 사이에서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달리하는 본문입니다.
  '칼빈'은 본문을 가지고 '예정론'이라는 신학적인 이론을 세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조금씩 달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예수를 더욱 잘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서는 신학적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약간의 견해차이로 해서 생긴 신학적인 문제는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웨슬리의 '자유의지'이든 칼빈의 '예정론'이든 그것이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지, 신학자들의 신학적인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교리적인 주장은 예수를 더욱 잘 믿게 하는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자유의지이든 예정론이든 그것을 잘못 알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 데리고 가십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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