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강》 전하는 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롬 10:13-21)
본문 14-15절에서 우리는 '어찌'라는 말을 4번 반복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찌 부르리요? 어찌 믿으리요? 어찌 들으리요? 어찌 전하리요?"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부르면서 믿어야 하고, 믿으면서 들어야 하고, 들으면서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제일 조건은 전하는 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인가? 막16: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목소개!▶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의 말씀은 매우 짧지만 일반적으로 성도가 자주 접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칫 본문에 내포된 진리를 놓치기가 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짧은 말씀 속에는 기독교 교리의 진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칼빈).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⑴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믿는 것이요, ⑵십자가의 죽으심과 ⑶부활하심과 ⑷승천하심과 ⑸다시 이 땅에 오실 재림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오중복음'입니다. 즉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죽음과 심일 만에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을 믿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가짜 교인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자기의 인생의 모델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기서 부른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내 왕으로 내 구주로 부르고 고백하는 신앙의 행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려면, ⑴지금까지 부르던 자신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돈과 명예를 사랑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즉 전에 섬겼던 신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⑵자기 자신의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자기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어떤 그릇에다 새로운 음식을 담아야 할 때 우선 그릇을 깨끗이 닦아내고 음식을 담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도 그릇에 '더러운 것, 각종 미신, 샤머니즘, 욕심, 자존심'들이 가득 묻었는데 여기에다 예수 그리스도를 넣으면 예수님은 '액세서리'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깨끗이 닦아내는 것, 이것이 자기 자신의 부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⑶주를 부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누구에게 줍니까? 아무나 다 줍니까? 아닙니다. 믿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주십니다. /믿/
그런데 아무리 택한 자라 할지라도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역사가 주어져야 합니다.
첫째, 말씀이 주어져야 하고, 둘째는 성령의 감화가 주어져야 합니다. 반드시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⑴"그런즉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여기서 바울은 믿음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를 부르는 일은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어찌 부르리요" '기도 속에 하나님을 부른다'는 뜻을 가진 말로서 가정법을 썼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부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⑵"듣지도 못하는 이를 어찌 믿으리오." 예수님을 믿는 일은 듣는 것에서부터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자주 들어야 합니다. 주일예배, 저녁 예배, 삼일, 철야, 구역, 새벽기도에서 빠지지 말고 열심히 참석하고 들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한 투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자본이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사모하는 자에게 저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믿/
⑶"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그렇습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듣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이는 아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전하는 자로 세웠습니다. 보냄 받은 자는 강한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이란 사도란 의미인데,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신 자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예수님도 요7:16절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13-15절에서 <선교의 5대 강령>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른다. 믿는다. 듣는다. 전한다. 보낸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가 있어도 씨 뿌리는 자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짭니다. 누군가가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할 때, 씨 뿌리는 자의 정성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이름이 들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함도 하나님의 은혜요, 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우리 모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강하게 전하십시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는 자가 메시지를 주십니다. /할/
"기록된바" 구약 성경을 인용해서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52:7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여기서 좋은 소식은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좀 그 인기가 시들해진 것 같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미스코리아선발대회는 굉장한 인기가 있었는데, 해마다 미인들이 미모를 자랑하는 미인 선발대회를 한국일보 주체로 열렸습니다. 여기서 진선미를 뽑아 세계 미인대회에 참가시키고 있습니다. 이 대회에 참가한 미인들은 다 비너스 여인상 같은 팔등신 미인들이고 하다 못 해 발 맵시까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아름다운 발은 이 미인들의 발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차범근은 한때 축구의 황제였습니다. 그가 그라운드에서 공을 몰고 비호같이 차 넣은 그 발은 정말 아름답고 절묘한 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름다운 발과는 거리가 먼 발입니다.
본문의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항복하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전도자의 발걸음이 아름답습니까?
⑴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식입니다. 세상에는 기분 나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 세금쟁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소식이기에 소식 중에 제일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마라톤을 올림픽의 꽃이라고 부릅니다. 그 유래가 있습니다. 서기 490년에 그리스 해안에 있는 마라톤이라는 도시에서 페르시아 군과 그리스 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전투였습니다. 만일 이 전투에서 그리스가 지면 민족이 망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사람들은 초조하게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의 명장 '말티 아테스'가 적군을 당당하게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한 병사가 이 소식을 아테네에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이 청년은 승전보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25마일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왕궁에 전하기를 '우리는 이겼다.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남기고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의 소식을 들은 왕과 군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기뻐 춤을 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매년 마라톤 대회로 열렸던 것이 올림픽의 꽃이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승전보를 전해준 것처럼 죄악에 물들어 죽어 가는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꼭 전해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전해주어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장례식 행렬이 어느 흑인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 모든 흑인들이 나와 통곡을 했습니다. 어느 여인은 아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얘들아 저 어른을 보아라. 저 어른이 너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단다" 실로 링컨이 걸어간 발자취는 흑인들의 생명을 구해준 발자취였습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부상 군인들의 생명을 건져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네 이웃이 지옥 불로, 유황불 속에서 영원히 타 들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⑵왜 아름답습니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지키는 일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막16: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명령은 주님의 마지막 최후의 명령입니다. 부모의 유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불효한 자식도 부모의 유언만은 꼭 지키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신 이 지상 명령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합니다.
이 명령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럽을 향하였고, 의심이 만은 도마는 인도로, 모리슨 테일러는 중국으로, 리빙스톤은 먼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이 명령이 순종하기 위하여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발걸음입니까?
⑶면류관이 보장된 발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디 목사는 '복음을 전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VIP가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살전2:19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후에 자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믿/
▶초대교회의 유명한 최봉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하루는 술 취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최 목사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는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술 취한 청년은 다짜고짜 최 목사를 보기 좋게 던져버렸습니다. 그때 면서기가 그 광경을 보고 그 청년을 후히 꾸짖고 보내었는데, 최 목사는 그 면서기를 붙잡고 '당신 때문에 면류관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청년 대신 당신이 예수 믿고 천당'가자고 전도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복음 전하는 그 발이 아름답습니다. 사형수에게 박사 학위를 준다고 해도, 애인이 결혼 승낙을 했다고 해도, 수억의 재산을 상속받는다고 해도 귀찮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너를 대신하여 죽은 사람이 있기에 너를 석방하라는 이 소식은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어 가는 생명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합시다. 그 발걸음이 아름답고 복된 발걸음이 됩니다. /할/
여러분! 메시야 재림의 대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의인들의 구원과 부활과 영생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에는 행한 대로의 상급이 있습니다.
단12: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한 만큼의 상급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충성스럽게 달려왔음을 자랑하고 내세에서 받을 의의 면류관을 대망하며 기뻐합니다. 한편 그것은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고,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 자'(약5:20)는 그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도록 도와 준 자들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영광에 큰 영광을 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16-21절까지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구원이 이방민족에게 뻗어나가게 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사53:1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렇게 귀한 복음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믿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사53:1절의 인용입니다. 사53장은 600년 전에 이사야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전하는 복음을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을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예언에도 이스라엘은 그 당시 믿지 않음을 그 후에도 지금도 복음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맞았습니다.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눈으로 보는데 나오기보다는 귀로 듣는데서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 말씀은 로고스의 말씀이 아니라 레마의 말씀입니다. 설교자의 레마를 듣는 것입니다. 아무나 설교했다고 믿음의 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깨달아지고 생명이 되어진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의 20세기 전반을 통하여 문화나 문명이 생기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부흥했습니다. 교회당이라고 해봐야 겨우 비바람이나 막을 수 있고 속에 들어가 봐야 의자하나 변변히 없어 가마니 깔고 그 위에 앉아 예배드리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속에서 역사 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대 폭발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오직 말씀선포와 들을 귀만 가지고 오늘날 세계가 깜짝 놀랄 교회의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하고도 화려한 교회당과 문화재급의 장식들로 둘러싸인 유럽의 교회들은 점점 쇠퇴해 갔습니다. 그 안에 생명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애굽은 이미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며 스핑크스 등 나일강의 찬란한 문화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문화, 페르시아의 문화, 헬라의 문화 등은 지금도 인류역사상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고도의 문화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별로 자랑하거나 이렇다 하게 내세울 문화나 문명이 없습니다. 오직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위대한 문화유산이 있다 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있는 곳에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유럽은 기독교 문화는 있으나 말씀이 없습니다. 일본도 기독교서적은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출판되고 있으나 말씀이 없습니다. 교회가 죽어가도 크리스천의 수는 줄대로 줄어든 채 도무지 늘지 않습니다.
로마의 바티칸이나 성 바울 성당 안에는 그림과 조각으로 가득합니다. 파리의 노틀담사원이나 루브르 박물관 안에는 그림과 조각으로 가득합니다. 만일 이것들을 우리가 돈주고 사려한다면 한국 땅을 몽땅 다 팔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문화나 문명, 지구는 없어질 날이 있으려니와 믿음은 영원하고 말씀도 영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능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입니다. 영성적 기능이란 은사적이며 체험적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지금도 역사 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여 그 은혜를 힘입고 이적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월적이며 신비한 체험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이란 말씀중심이며 체계적 교육을 통하여 성경말씀의 내용을 학습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리가 있고 신학이 있고 많은 연구들이 누적되어 있어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신앙체계를 확립하고 탈선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체험의 종교라고도 하고 또는 말씀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교회역사학자들은 유럽의 교회들이 20세기에 들어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 원인은 예언자적 기능 즉 교육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체험만을 강조하고 영생만을 강조한다면 신비주의적인 샤머니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양면, 즉 말씀과 체험이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능력 없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고전4: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딤후3: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어야 생기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가 됩니다. 여기서 '들음'이란 단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복음이 그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 권력, 명예, 재물 이런 것에서 오는 교만을 버릴 수 없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준비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들어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많이 들으십시다.
호4: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들어야 지식이 생깁니다. 들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10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들어야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세상은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옵니다. 유혹의 소리, 분노의 소리, 순종의 소리, 방탕한 노래 소리, 절망의 소리,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소리를 듣고 날마다 천성 문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18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지금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 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은 늘 꼭 들어야할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지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곧 듣고 믿지 않다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면서 계속 그 때 그 때 믿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반드시 비교될 일이 온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그 때 믿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뇨'란 '그들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듣지 아니하였느뇨' 라고 질문식으로 한 것은 '들었쟎느냐?'라고 강조하시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디 사는 사람들이라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성경의 말씀인 특별계시 이전에도 이미 자연계시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계시는 일반계시, 특별계시, 혹은 자연계시, 초자연계시로 나누는 데 자연환경을 통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19:1-4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 말씀은 특별계시가 온 땅에 이미 전파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 는 예언입니다. 또한 자연계시, 일반계시로는 이미 온 땅에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고 복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주 듣고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백성들이 세상에선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33년 동안 함께 하셨습니다. 마10: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우선순위의 첫째로 삼았고 기득권을 주었습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오시면 복음이 어디서부터 증거 된다고 했습니까? ⑴예루살렘과 ⑵온 유대와 ⑶사마리아와 ⑷땅 끝까지입니다. 이것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영역입니다. (땅 끝까지만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고 하지만 뜻 있는 영적인 사람들의 견해는 땅 끝이 바로 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못했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사실 바울은 열심히 유대인들에게 전했습니다.
행24:5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염병이란 욕을 들을 정도로 바울은 열심히 유대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입이 열 개라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못합니다.
▶19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 들고 나오는 변명은 복음을 듣지는 들었지만, 무슨 소린지 잘 알지를 못해 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억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만큼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백성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선지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분위기에서 살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못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구실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여기서 '백성 아닌 자'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출6: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32:2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시기하게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반기며 잔치를 베풀어주자 시기한 맏아들처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미련한 백성이라고 개 취급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자 시기했습니다. 또 노엽게 한다는 말은 질투하게 한다는 뜻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여 증오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19절의 뜻은 마치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말을 안들을 때, 남의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면 자신의 아이가 시기하여 돌아오게 한다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을 축복해 줌으로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신32:21절의 말씀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미친 것이며 복음이 일단 이방인들을 구원하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믿게 된다는 예언자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전가화 목사님은 마지막 땅 끝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말했습니다.
▶20절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사65:1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구하거나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백성들입니까?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지옥의 땔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버렸답니다.
▶21절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버려진 것입니까? 그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고 대적하고, 떠난 백성이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손을 벌리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65:2절을 인용해서 묻고 있습니다. 불 신앙과 불순종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히 하나님은 버린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사65:2절은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지금도 하나님은 종일 손을 펴서 배역한 백성들을 불으신다는 것을 들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까지도 버리지 않으시고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인데 이 말은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눅15;20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얼싸안는 표현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품은 사랑의 품입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탕자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품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랑이 없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랑이 있는데 누가 끝까지 거절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인내해야합니다. 때가 되면 초대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회개운동, 돌이키는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 이 탕자들을 녹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복음의 신앙 위에 우리의 인생을 다시 건설해야합니다.
"돌아오라!"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하나님이 선택해 놓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복음 전파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20: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엡2: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마28: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오라고 하십니다. 와서 쉼을 얻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합니다.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먼저 이웃에게 가야합니다. 직장으로, 가정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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