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강》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1-12)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배워서 실력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는 공부하고 준비하리라! 그리하면 기회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졸업이라는 말은 한문에서는 학업을 마친다는 뜻이지만, 영어로는 시작한다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즉 학교에서의 교육은 끝났지만 사회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세상도 배우고, 역사도 배우고, 경제도 배우고, 인간이 지켜나가야 할 덕목도 배워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배워야 합니다. 신앙의 삼박자가 있습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자'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바로 아는 것은 바로 배워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운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할/ ◀제목 소개!▶
벌써 11장을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죄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들의 죄, 그 다음으로는 유대인들의 죄, 그리고 온 인류의 죄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조직신학자 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죄가 없이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죄론'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4-7장은 하나님께서 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를 주신 것이요, 인간 편에서는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무엇인가?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실을 믿고 받아 드릴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분의 변화가 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 찬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9-10장으로 넘어가면서 동족들의 구원을 애타게 기도하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씨름하다가 그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귀한 의를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될 것인데,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천국 가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장하는 바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신학에서는 '남은 자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는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남은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모세가 12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 중의 10명은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드림으로 이스라엘을 통곡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가서 싸워 승리하자'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누구와 일하셨습니까? 남은 자였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이 사상의 원칙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의 언약을 맺으시기를 "내가 너와 네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여덟 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두 명은 잘 알고 있지만 여섯 명은 생소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덟 명입니다.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일, 사라에게서 난 이삭, 그리고 후처였던 그두라에게서 난 시므온,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이렇게 여섯 명의 아들을 포함해서 여덟 명이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는 '네 자손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으니 여덟 명의 모든 자녀들에게 그 복이 임하는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아니라 여덟 명의 아들 중에서도 '단 한 명 이삭에게만 복을 주시고 이삭 하나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노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남은 잡니다. 이 남은 자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약속된 복이 부어집니다.
여러분, 남은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오고 환란이 와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들을 세워 두십니다. 노아 때를 보세요,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이 다 악하여 지고,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방종과 타락의 시대였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 한 사람을 남겨 두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노아입니다. 오늘 본문은 동족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요 베냐민 지파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10장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퍼져나갔음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선민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특권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하는 가상의 질문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뇨?" 묻자 "그럴 수 없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당신의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2절 하반절에도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역시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시27: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런 확신을 갖게 된 배경에는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근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요, 베냐민지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냐민지파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12지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우리나라처럼 남과 북이 갈라졌습니다. 북쪽으로 열 지파가 가버렸고 남쪽에는 두 지파가 남았습니다. 북쪽으로 간 열 지파는 반역지파입니다. 남쪽에 남은 지파가 유다, 베냐민지파입니다. 유다지파는 자신의 왕이 있었으니 남아 있었고, 베냐민지파는 반역을 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양반지파입니다. 한번도 역적을 안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자신이 베냐민지파임을 말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자신이 진짜 유대인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얼마나 유대교를 신봉했던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공문서를 만들어 가지고 예수쟁이들 토벌작전에 나선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 치고 나만큼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포장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 같은 놈을 선택하여 예수 믿게 하지 않았는가? 유대교의 골수분자요 핍박 자였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을 보면 아직 믿지 않고 거역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관계성은 자기에게 조금만 피해가 오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사람의 인정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아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음을 바울은 지금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삼상12:22절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요10: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작정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도 한번 택하신 롯을 구원해 주셨으며, 노아의 때에 죄악의 파도가 온 세상을 오염시켰을 때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노아와 그의 8식구를 40주야의 홍수가운데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이방 여인 라합을 보십시오.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하나님은 라합의 온 집안 식구들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성도란 '구별하여 불러낸 자'입니다. 어디서 구별했습니까? 죄악에서, 사망에서 구별했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택함 받은 자(예정된 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편 강도는 죽음 직전에 불러 주셨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님의 택한 백성이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 돌아올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시키고, 전도시키고,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질병을 통해서 사업의 부도를 통해서 아니면 갑자기 큰 사고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편으로 불러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늦게 불러주셨습니다. 저도 굉장히 강퍅했습니다. 내 옆에 예수 믿는 사람이 오면 발길로 찼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인 것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큰 소리 꽝꽝 친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나의 그 강퍅함과 교만함을 보시고 나의 날개를 꺾는 작업부터 하셨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부장하고 싸움을 하고 쫓겨났습니다. 이것저것 돈을 투자해도 하는 것마다 다 망하게 만드시고 나의 수단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전에는 제가 굉장히 똑똑하고 잘 난 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고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핍박하는 남편이 언젠가 깨어져서 하나님 앞으로 나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소리치고 세상 밖으로 빠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꼼짝없이 머리 숙일 수밖에 없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게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94:14절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믿/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들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말했고, 2절에 와서는 구약 왕상19장을 인용해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암흑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 아합 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당시 아합 왕은 백성들을 유혹하여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도록 한 장본인이며 그의 부인 이세벨 역시 간악한 왕비로 악명이 높습니다. 이 아합 왕 시대에 활약한 엘리야 선지자를 들어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너무도 유명한 선지자이기에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너무 우상과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라본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후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갈멜 산상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맞붙어서 어느 신이 참 신인가의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850명의 바알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집고 가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남은 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싸우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850명과 싸웠던 것처럼 진리를 막고 거스리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승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다시 믿게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가 낙심하여 그 길로 호렙산 광야로 도망쳐서 한 로뎀나무 아래서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그만 살겠습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때 엘리야의 대답이 오늘 3절의 말씀입니다.
▶3절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2절에 이어 연결되는 구절로써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할 때 엘리야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송사 하는 말씀입니다. 왕상19:10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생각에 하나님을 섬기는 충성된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자신 혼자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 이스라엘을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절망 속에 엘리야는 이제 끝장이라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남겨두었으니 용기를 내어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의 4절입니다.
▶4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엘리야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몽땅 우상 숭배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그러니까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한 경건한 사람 7천명을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어도 7천명의 충실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부패하고 우상에 빠졌을 때도 하나님은 그 안에 7천명의 참 성도를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이 7천명이 신앙의 그루터기입니다.
이 택함 받은 소수의 무리가 생명입니다. 이 소수가 사명을 다할 때, 세상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적은 소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메뚜기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격침했습니다. 하나님은 적은 수를 사용하십니다.
눅12: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신약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대중들, 학자들, 교법사들, 바리새인들이 참 신앙을 지켜 나온 것이 아니라 저 갈릴리 바닷가의 소수의 어부출신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참 신앙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갔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전 구라파 사회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이 불 신앙 상태에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남기신 '마틴 루터, 존 칼빈, 쯔빙글리' 등 소수의 참 신앙인 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새 교인들 다 썩었어, 한국교회는 다 썩어먹었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도 진실한 성도들을 남겨두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케 하신 답니다. /믿습니까?/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일꾼들이 있습니다. 큰 교회나 적은 교회나 성도 전체가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몇 사람의 일꾼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남겨두신 성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5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누가 남은 자인가?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깨달음입니다. /믿/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 깨달음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남은 자요 은혜를 충만히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주 중에 최고의 저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체험하면 주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에 나오게 되고, 전도하게 되고, 봉사하게 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 깨닫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남은 자가 있느니라" ⑴사도바울이 자신을 증거로 삼아 실례를 들었고, ⑵아합 왕 시대에 7000명을 남겨 두신 것처럼 지금 보면 버림받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남겨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남은 자가 누굽니까?' 1절의 '하나님의 자기 백성'입니다.
▶엘리야 당시 남겨둔 7000명과 엘리야는 어떤 관계였는가?
⑴엘리야와 처지가 같다는 뜻입니다. 어떤 처지냐? 박해받은 처지, 엘리야만 박해받은 처지가 아니라 7000명도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7천명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⑵신앙의 기초가 같습니다. 바알에게 절하지도 굽히지도 않은 신앙의 절개가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 일본 압제 밑에서도 신사참배를 절대 거부한 신앙의 절개자 주기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오늘날 절개가 문제시됩니다. 돈에 절개를 빼앗기고, 명예. 분위기에 신앙의 절개를 빼앗기어 주일을 범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 신랑 신부의 절대가치는 정조에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절개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할/
사람들은 북한의 지하교회가 있느니, 없느니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에도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북 간의 관계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이니 개성 산업공단이니 해서 북한에 가는 것이 좀 쉬어졌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만해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한 사업가 장로님이 미국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님 요3:16절을 외우실 수 있으십니까?" "예야 다 잊어버렸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도 잊어 버렸다" 그런데 그 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주무시는 것 같던 어머님이 이불을 뒤집어쓰시더니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왜 잊어버렸겠니? 내가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한단다."
본문의 바른 배경은 그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불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영접하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백성은 그 안에서도 남아있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다시 사도바울은 그의 신학적인 변론을 펴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은혜로 된 것과 행위로 된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행위는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이며 서로 용납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값없는 선물이며 무조건적이며 순수한 선물일 때 은혜가 되지만 값을 지불하는 것이라면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하나님께 버림받는 다는 식의 율법 주의적 신앙을 전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 기초를 둔 신앙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굉장히 잘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와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행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이는 상급도 없다는 것'이 야고보 장로님의 지론입니다.
엡2: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는 또 하나의 은혜의 표현입니다. 봉사하는 것, 희생하는 것, 순교하는 것 다 은혜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저버리면서 은혜를 대신하는 어떤 행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고해도 감사하고, 봉사해도 감사하고, 희생하면서도 감사하십시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
▶7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이스라엘이 무엇을 구했습니까? 구원을 구했습니다. '내가 구원받아야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택하심을 받은 자면 그 믿음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은 자란 앞에서 말한 남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졌다고 합니다. 완악이란 말은 '굳은살이 박이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은 어느 부분이든지 다 감각이 있는데 여러 번 매를 맞게 되면 굳어져서 아픈 것도 모르게 됩니다. 이럴 때 감각이 둔해진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완악하여졌니라." 맞습니다. 구약에서는 '강팍'으로 표현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천국을 소개해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주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 천년, 만년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세상인데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에 들어가 고통 받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볼 때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우리들의 입에서 아멘! 할렐루야! 하늘나라 방언으로 살게 해 주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할/
▶8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 윤리적인 면에서 완악하게 된 것을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신29:4절과 사6:9-10절과 사29;9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신29:4절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사9:9-10절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사29:9절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하여 모세나 이사야가 가졌던 통분한 마음이 사도 바울의 가슴에도 가득했던 것입니다.
'혼미한 심령'은 그 심령이 완악하여지고 둔해져서 영적인 호소, 윤리적인 호소에 반응이 없게 된 심령이 마비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한 귀"은 그 당시 영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마음이 부패되어 눈과 귀가 있으나 영계를 보지 못하고 영음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의 눈, 영의 귀가 떠지고 열려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하늘의 신령한 법칙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영안이 활짝 열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9-10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바울은 시69:22-23절을 인용해서 기가 막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여기서 밥상이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제일차 적은 본능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누리는 분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요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은 다 같은 의미의 말인데 덫은 새를 잡는 그물로써 거치는 것은 짐승을 잡는 함정으로 모두 함정이란 의미를 주고 있는 말입니다. 또 보응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영적인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는 언제까지나 율법의 짐을 지고 있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또 눈이 흐려 보지 못한 것처럼 갑갑한 것이 없습니다. 등은 항상 곱게 펴져 있어야 힘이 있는데 굽어보십시오,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말로가 이처럼 비참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1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저희의 넘어짐'은 이스라엘의 복음 밖으로 나간 것을 의미하는 데, 여기서 바울이 자문자답 형식으로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영원히 버림을 당하는 것인가?' 묻고는 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쉽게 표현하면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 그들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불 신앙으로 구원의 은총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믿는 것이 바울의 신앙 관입니다.
▶12절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여기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 세상을 가리키며 특히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넘어지고 실패했으나 그로 인하여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부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얻어진 구원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넘어졌기 때문에 구원이 이방인에게 와서 부유함이 되었다고 하면 본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더 충만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넘어질 때 쏟아져 흩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가진 사람이 부유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 본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이야 얼마나 더 부유했겠습니까? 바울은 소망 적인 사도였습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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