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9강)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롬 11:25-3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4

《제39강》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롬 11:25-36)

 

  성도들은 생각하기를 <목사들은 성경 박사>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성경박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공부하면 할수록 더 어렵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한 수단으로 허락하신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계시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뚜껑을 열어 들어다 보게 만든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우리가 완전하게 다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기록된 말씀 중에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를 비롯하여 바울이 쓴 서신중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어려운 내용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고 베드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벧후3:15-16절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우쭐대면 망합니다. 이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안다고 떠들면 바로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펼 때마다 겸손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잠깐 우리가 배운 로마서를 돌아봅시다.
  ▶1-3:20절까지는 인간의 '죄악 론'입니다.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 그리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죄가 있기에 구원받아야 함을 기록한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 죄는 인간을 타락시켰습니다. 지성, 감성, 의지까지 타락해서 인간 스스로가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 완전 타락, 완전 부패'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 3장 21절부터 시작하여 4장 전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들에게 '은혜로 구원을 베풀고, 우리 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장은 구약 시대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과 율법 이후의 다윗 두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들도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5장의 결론이며,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6장을 들어가면서 "그러면 은혜 가운데 있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를 자문하면서 답하기를 "그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면서 은혜 가운데 있음으로 죄를 지을 것이 아니라 더욱 주를 위해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7장은 이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점점 성화 되어서 주님을 닮아야 됨을 설명했고, 8장에 넘어와서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능력으로 넉넉히 믿을 뿐 아니라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묻고는 어떤 환난도 곤고도 핍박과 적신이나 위한한 칼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다시 확신하기를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 자들도,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9장으로 넘어와서는 바울의 마음에 번민이 일어납니다. 이 번민은 자기 동족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반해 눈을 들어 자기 동족을 바라보니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민족이 내 친척이 예수 안 믿다가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괴로워서 "주여 이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것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정론을 기록했습니다.
  10장에 넘어 오면서 예정론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미치었고, 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시기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지 않은 어린 아이를 끌어드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다른 아이를 불러 젖을 먹이면 그 아이가 시기심이 발동하여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경우와 같은 이치입니다.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말하면서 '유대인들 중에서도 남은 자는 구원을 받지 않겠느냐?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음으로 더 겸손히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1장의 그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25-32절까지는 이방인의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구원의 역사를 얻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25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그 스케일이 큽니다. 큰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구원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그 때문에 이방인 세계에 선교활동이 활발해집니다. 그리고 후에 가서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충만한 숫자의 구원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
  "형제들아"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를 받은 한 형제입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한 호칭입니까? '형제들아'란 말은 그 당시 로마 교인들을 두고 한 말이지만, 오늘날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호칭하는 언어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는 말은 '다 아는척하며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아!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다. 지혜를 받은 자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질까 봐 바울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제일 싫어하십니다. 바울 시대에 믿음이 좋은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향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너희들 대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제 영원히 멸망한다는 식으로 거만하고 오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같이 오만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포도송이는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아래로 숙인다.>라는 말이 있고, 우리 속담에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겸손과 교만 중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신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교만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서서히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그 몸 속에 암세포가 자라게 되면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교만도 우리의 영적인 암이 되어서 건강한 정신을 파괴하고 마음을 쇠폐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믿/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방사람들이라는 좀 다른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완전히 계시가 안 된 비밀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 비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비밀은 '완전히 공개가 안 된, 아직도 알지 못하는 부분, 인간의 지혜와 연구를 통해서도 알아내기 어려운 은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어로는 '신비롭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속한 일들은 인간들에게 전부가 신비롭습니다. 이 신비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것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실증철학자 '어거스트 콩트'의 첫 이론은 <보이지 않는 것과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즉 실증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보이지 않으니 안 계시는 분입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실증론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실증될 수 없는 것은 실증될 수 없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내가 보지 못했으면 내가 못 본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수정입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일상생활 속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가 못하면 남도 못한다고 일축해 버립니다.
  자신이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언제나 신비롭게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될 것이라" 지금까지 숨겨왔으나 이제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비밀이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이 이방인이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①더러는 완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모두가 믿지 않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는'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완악한 자가 있고, 이방인 중에서도 완악한 자가 있고, 믿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②이스라엘이 믿음이 없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 있는 일로 보았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즉 복음이 전파되는 그 분량에 이르기까지는 이스라엘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해 보면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비밀로 숨겨진 것이 이제 하나님이 내게 계시로 알게 해 주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일부가 완악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을 이방인이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위해 하나님의 계획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비밀의 계획을 어찌 인간이 미래에 대해 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예수를 믿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고집 불통하다가 나중에 믿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오늘 중요한 진리는 기독교의 복음이 이방인의 수가 차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의 문이 닫히기 전에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에 문이 열릴 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후부터 오늘날까지 약2천년 동안 이스라엘은 구원의 문이 닫혀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세계 각처로 흩어져 핍박을 받고 유랑하면서 고아와 같이 외국에서 지내며 세계 모든 민족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이방에 복음의 문이 열려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를 받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947년에 이스라엘 2천년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소련, 미국연방 강대국들이 승인하여 나라가 독립되어 팔레스탄 지방에 이스라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역사는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뉴스에 비치는 팔레스탄 지방의 테러사건이나 갈등사건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것은 2천년동안 팔레스탄인들이 그 땅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대인들이 들어 닥쳐서 "나가라, 여기는 우리 땅이다"고 하면서 몰아냈습니다.
  선조들의 뼈가 묻히고 산 땅인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육신의 조국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1947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는데 세상에 흩어진 모든 유대인들은 시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 소련에 있는 사람, 아프리카에 살고 있더라도 이제 다 시온 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식생활이 다르고 피부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사상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선민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 우리가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면 아랍 유학생들은 죽을까봐 공부도 포기해 버리고 도망가지만, 유대인들은 본국에 전쟁을 하려 학업을 포기하고 달려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많은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기 '이방인의 충만한 수'란 하나님의 정하신 수를 말하며, 그 수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스라엘의 충만을 말했고,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충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수가 이방인과 유대인들 가운데서 모두 충만해 질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받을 수를 정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그 수가 다 채워지면 하나님의 심판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 이웃을 전도해야 합니다. 
  어느 아들이 아버지가 예수 믿을 때까지 금식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사로 보다가 마침내는 아들을 잃을까봐 하나님 앞에 항복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가족을 위해 일사각오로 기도하고 전도할 때입니다.
  고후6:2절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26-27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자'란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속자, 즉 값을 치러서 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얻기 위해 룻의 죽은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땅 값을 치러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복수를 해주는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피를 흘려서 죽어 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대신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된 상태에서 해방되었고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 용서는 큰 용서입니다. 이 큰 용서를 통해서 불 신앙이라는 경건치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믿/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스라엘이 복음을 대적하므로 복음이 이방으로 갔다가 유럽으로 유럽에서 다시 영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온 것입니다. 이렇게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온 이방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이 끝나는 날에 이스라엘이 믿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사59:20-21절을 인용한 말로, 구원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야곱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경건치 않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는 뭐니뭐니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
  "돌이키시겠고"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운동을 의미합니다. 회개운동은 하나님의 큰 용서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한 구원, 회개운동을 일으키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 눅23: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할/
  27절에 '저희 죄를 없이 할 때'란 그들이 예수 앞에 달려 나와 회개함을 가리키는 말로, 바울은 지금 동족들의 구원에 가슴이 설레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바른 회개는 은혜의 통로를 열어놓은 것입니다. 

 

  ▶28절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와 원수 된 자" 복음을 거절하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입장에서 보면 '원수 된 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원수 된 자입니다.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임한자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조상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인하여 여러 번 멸망하게 되었으나 멸망치 않고 보존된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조상에게 주신 언약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구원받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 인생은 때때로 많은 후회를 합니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부모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후회거리가 되고 실망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인생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실망감이 들 때입니다.
  자기에게 실망할 때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도 집니다. 인생은 이런 후회스러운 일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 그 계획에는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히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후회함 없이 그 계획을 추진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할/
  여기서 '은사'는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택하시고 부르시고 은사(구원)를 주신 이상 사람이 잘못한다고 해서 후회하거나 구원하심을 절대로 변경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수정도, 변경도 절대로 안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중보판도 개정판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은사에는 후회하심도 변경하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 분은 변개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믿/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뽑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도 감사할 뿐인데, 종으로까지 세워 주셔서 더더욱 감사 드립니다.
  그렇다고 주의 종이 되어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바로 사명을 따라 살았는가? 아닙니다. 너무너무 바르게 하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때마다 시간마다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감격을 주십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생각해 보세요!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시고 천국의 티켓을 주시고, 이 땅에 살 동안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착수하신 일은 끝까지 이르시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행하시는 데는 변개함이 없으십니다.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는 결단코 구원하시고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믿/ 하나님께서는 성림교회를 세우시고 그 일을 착수하셨습니다. 끝까지 이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실 자에게 기필코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복 받는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0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너희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입니다. 처음에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제 긍휼을 입은 자라" 이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깊은 곳에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그 긍휼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긍휼을 입은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31절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너희는'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0절과 비슷한 말씀입니다만 이방인들이 전에는 하나님을 순종치 않았으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돌아왔고 이방인들이 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은 이것을 보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동족의 구원을 확신하며 제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바울은 25-31절까지의 결론을 본문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다 포함한 하나님이 택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가두어 두심'이란 '구류'라는 의미로 '갇혀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방인도 불순종의 상태에 있었으며, 지금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과 이스라엘은 다 불순종이 감옥에 가두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순종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 믿고 복 받은 자는 어느 날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징계, 고난, 환난, 고통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가 다시 깨닫고 겸손하게 회개하여 다시 믿음을 찾고 순종하면 다시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내리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교만하지만 그들이 깨닫고 올 것이라는 바울의 진단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는 마치 사진을 찍었지만 아직 현상을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우리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스라엘이 완악해질 것인지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충분한 비밀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깊으신 계획과 섭리를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합니다.
  ①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찬양합니다.
  부요함은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는 한계가 있어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일을 한눈에 보시고 계시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믿/
  여기 '지혜'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한 것'이며, '지식'은 '현실 세계에 나와 있는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체험하고 그래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139: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②하나님의 판단의 깊음을 찬양합니다.
  판단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측량치 못할 것이며" 영원히 찾아낼 수 없는 무한한 뜻과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실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 인간의 길과도 다르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 인생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인생의 생각보다 높다"고 말합니다.
  ③"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길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찾지 못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길이란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한 대로 구원과 생명의 진리는 가히 인간으로는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34-35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4절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큰소리 칠 수가 있느냐? 누가 하나님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서 토론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설계하시고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만 하십니다.
  35절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충족한 만큼 무엇인가 드려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를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다 하더라도 그 물질가지고 또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그 지혜가지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상29:14절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이 성전 건축헌금을 드리고 감사해서 다윗이 기쁨의 감격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그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되며, 그를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를 거슬려 보려 해도 결국 그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르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따라야 합니다.
  시편에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지켜 주셔서 그가 혹 넘어지더라도 붙들어 일으켜 주시며, 그 길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 찬송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물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입니다. '나오고'란 원어 '에코'란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의 제일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1:2절에 보면 태초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의 원인도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로 말미암고" 사람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야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태양, 공기, 비, 오곡백과 등등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삽니다. 작년 여름에 얼마나 무더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무더위 속에서도 곡식이 잘 자라게 해주십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아멘!/

  ②만물이 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께로 돌아감이라" '주를 향하여 돌아간다'는 말은 예수로 말미암아 잃었던 천국 본향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론 미국으로 갈 수 없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면 조종사가 그 비행기를 몰고 가듯이 하늘나라로 우리 주님이 인도해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주께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존재입니다. 정욕도 지나가고 인간의 힘도, 권력도 지나갑니다. 인생은 잠깐 보이는 안개요 들에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땅의 삶이 아무리 부하고 만족하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역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후4: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시간도, 태양도, 물질도 다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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