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8강)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 (롬 11:13-2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3

《제38강》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 (롬 11:13-24)

 

  어느 교회 부흥회 때에 부흥강사가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습니다.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화답하기를 "맞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강사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어나서 걷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뛰어가야 합니다."
  교인들은 너도나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뛰어가야 합니다!" 강사님은 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그러자 모두가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강사님께서 흐뭇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정리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시간 구체적으로 작정을 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합시다."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화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용기를 내더니 일어나서 말하기를 "강사님! 우리 모두 예전처럼 다시금 앉아있게 합시다." 여러분! 이것이 행여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무슨 주제로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 사실을 계속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은혜로 보존하고 계시는 '남은 자'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버림당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11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실족'과 '넘어짐'은 의미가 다릅니다. '실족'은 '발을 헛디뎌서 비틀거린다'는 말로 그러니까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비틀거리다가 바로 설 수도 있는 것이 실족입니다. 여기서 실족한 족속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아직 예수 믿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넘어짐'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넘어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버림받아 멸망당하는 것, 즉 소망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넘어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실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완악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멸망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유익을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믿기를 거부한 덕분에 이방 사람인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참 감람나무에서 돌 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꺾인 가지'라고 본문 17절은 말합니다.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또 19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믿지 않은 이스라엘은 본 가지에서 꺾여 버림을 받았고, 그 꺾인 자리에 이방인들을 접붙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통하여 이방인의 전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가 이방인의 구원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과수원이나 과일재배를 하는데 가보면 접붙임을 많이 합니다. 참외밭에 가보면 호박으로 접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기적의 사과'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적의 사과는 배나무에다 사과나무를 접붙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배나무에 사과나무를 접붙이면 배의 단맛이 도는 사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감나무와 접붙이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이름이 개암나무입니다. 고향에서는 고염나무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 나무의 열매가 포도 알 만한데 맛은 아주 떫은 감 맛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감나무와 개암나무와 접붙이기를 하면 아주 맛있는, 그러면서도 감보다는 적고 개암 열매보다는 훨씬 큰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한 나무가 그렇게 접붙이기를 했는데 잘못되어 한 나무에서 두 열매가 열렸습니다. 한쪽에는 감이 열렸고 한쪽가지에서는 개암열매가 열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의 접붙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원가지를 찍어버리시고 그 꺾인 가지에다가 이방인인 돌 감람나무 가지를 꺾어서 접붙이는 접붙임의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꺾인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오히려 이방인이 구원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경탄을 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방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저주스런 백성들이라고, 택한 백성이 아니라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우리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바도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일 나무들이 전혀 다른 과일이지만 접붙임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맛을 내는 열매를 맺듯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 ◀제목소개!▶

 

  ▶13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그 당시 로마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주는 의미는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 너희가 이방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말입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백은 그 자신이 그 직분에 충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있고 능률도 높이고 보람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감도 없고, 일의 능률도 높이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만 합니다.
  교회 직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직분을 신통치 않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자를 관심 있게 보십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면 하나님께서도 무관심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리라" /할/
  행9:15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갈2:8절에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증거 함으로써 자신은 '예루살렘 공 의회 때에, 사도의 영역을 나눌 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직분이 확정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도 지독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이 있는데 히브라파 유대인이란 히브리말을 쓰는 유대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2000년 이상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타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아이들이 태어나고 후손들이 태어나서 자신의 모국어를 다 잃어버리고 그곳 나라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일본인 후손들은 악착같이 일본말을 통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2-3세들은 한국말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히브리말을 고수하고 지키는 자손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바울도 외국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을 했습니다. 그 당시 그 곳은 지금 미국 뉴욕정도 되는 곳인데 바울은 조국 예루살렘에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바울의 아버지가 아들이 유대인의 풍속과 말을 지키기 위해서 당시 좋은 학교 다 마다하고 조국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지금 우리나라 서울 대 쯤 되는 그 나라의 최고의 학벌입니다. 그러니까 지독한 유대교의 신봉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능수 능란하게 잘했습니다.
  그 당시 문화권은 헬라어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사울이라는 청년을 세계적인 선교사로 키우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 후 그는 유대인의 긍지를 벗어버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귀한 고백입니다.

 

  ▶14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 나게 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젖 먹는 아이가 어머니를 떠나서 달아날 때 그 어머니가 다른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면 자신의 아이가 시기 나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서 내 골육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15절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스라엘이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내버렸고,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서 세상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시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는 이스라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는 죽은 것이고, 하나님과 연합을 이룰 때는 우리의 영혼이 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에게 선교하고 있지만 자기 동족에 대한 관심이 굉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을 선교해야 합니다. 인도도, 소련, 중공도 선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다운 관심은 그곳을 선교하면서도 우리 한국 땅과 이북 내 동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믿/

 

  ▶16절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5절(하)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했는데, 이 말은 동족들이 예수 앞으로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한 말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절대로 영원히 버림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두 가지의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말씀이 첫 번째 비유로써 민15:20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그 해에 처음 익은 곡식은 베어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해 모든 수확은 하나님께 다 바친 것으로 대표하고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유대 사람들은 떡을 만들 때 반죽을 합니다. 반죽한 처음의 떡덩이를 떼어서 손을 흔듭니다. 이것을 거제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손을 흔들고 기도하면 이것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 떡덩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이스라엘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아브라함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거룩하였으니 그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조상들이 좋은 신앙을 가지면 그 자손들이 그 신앙을 본 받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반절에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그 당시도 높은 사람이 공식 방문지에서 기념식을 했습니다. 지금은 유명인사들이 오면 기념식수를 합니다. 어린 나무를 심어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후에 어린 나무에서 나오는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심은 나무는 하나님께 구별되게 심었기 때문에 나무에 자란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역시 족장들을 의미할 것이고 가지는 그 자손, 즉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들어 유대 민족의 거룩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사람들은 어떤 다른 민족보다도 자신의 조상들을 자랑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기도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본문의 사상은 귀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는 나머지 부분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입은 곡식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제사를 드립니다.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므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몫도 하나님의 것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돌봐주십니다.
  말3:10-11절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황충'을 제하여 주신다는 것은 헛된 곳으로 물질이 나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질병, 우환, 사고, 도둑, 기타' 등등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과일이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신다'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실패가 없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업의 부도가 나지 않게 하나님이 막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믿음의 씨앗이요, 축복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

 

  ▶17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접붙임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나라에도 감람나무는 접붙임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누구라도 들으면 상식적으로 잘 알 수 있는 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이방인들이 예수 믿게 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나무에 접붙임을 합니다. 특히 감나무에 합니다. 감나무는 그냥 놓아두면 열매가 나쁩니다. 그래서 먼저 돌감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다 좋은 감나무를 접붙임을 합니다.
  원래 감나무는 수세가 약해서 나무가 열매를 많이 열릴 수가 없고 열매도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감나무는 수세가 강해서 아무데나 심어도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열립니다. 우리나라는 원예 기술이 좋아서 풍성하고 맛이 좋은 과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다 접붙임의 시험에서 온 것입니다.
  중동지방에는 좋은 감람나무에다 밑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임 합니다. 본문의 접붙임의 방법과 반대입니다. 세상 농부는 참 감람나무 가지를 돌 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쁜 가지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수도 있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3:9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할/
  ▶본문의 해석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도바울이 접목하는 상식이 없어서 그렇게 썼다는 설과 바울이 상식적으로는 알았지만 그 과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접목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접목하는 내용만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 감람나무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인 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믿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 같은 이방인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참 감람나무의 근본은 이스라엘에게 언약했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그 나무에게 꺾어져 나갔고, 이방인은 믿음으로 예수에게 접붙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액을 받아 신앙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유대인들 때문에 복 받은 민족입니다.
  갈3: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8절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기에 꺾어진 가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즉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로 가지가 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사6:13절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바울은 분명히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메시야 민족의 뿌리의 사역을 감당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훌륭한 믿음입니다. 영적 뿌리는 뭐니뭐니해도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 앞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19-20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9절의 표현은 <유대인들이 좀 꺾어져 나간 것은 '아 이방인들을 접붙임 하시려고 그렇게 됐구나!'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복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으로 나가게 되어 우리까지 믿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는 진노의 자녀요 예수 밖에 사람들인데 수천 년의 이스라엘 전통과 역사의 그 뿌리에 연결을 받아 예수 믿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20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유대인은 믿지 않음으로 꺾어졌고, 이방민족인 우리는 믿음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 감람나무의 접붙임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이 축복이고 믿음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주제를 이신칭의(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주제로 잡았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기독교는 겸손을 가르칩니다. 주님이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막10:43-4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은 높아지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 7번 떨어져도 8번째로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높아지려고 꿈과 야망과 패기를 키웁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높아지려고 애쓰고 몸부림칩니다. 높아진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바닥까지 낮아지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낮아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단체 어떤 모임이라도 유독 '장'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릴 때마다 총회에서 제일 큰 이슈는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입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감투를 좋아합니다. 신문을 보면 늘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단골 메뉴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식상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는 사양하는 체 하지만 높은 자리를 탐내고 기대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황금이지요, 황금은 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직위는 그 사람의 명예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늘나라에서는 그 황금으로 길을 깔았다고 합니다. /믿/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천한 것입니다. 임금이나 왕이나 대통령이나 이 땅에서는 온갖 영화를 누릴지라도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하늘나라에서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다만 저주 속에서 가장 천하게 음부에 던져짐을 당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곳이 당시 유대 고을 중 가장 작은 곳인 베들레헴, 그것도 냄새나는 말구유에서입니다.
  주님은 겸손해지고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낮아져봐야 남의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억울함을 알고 힘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높은 마음은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높은 마음은 시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일 수도 있고, 뽐내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겸손해야 될 것은 영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좀 한다고 교만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사 좀 받았다고 교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교만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할/
  왜 주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교만한 자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를 통해 나타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업을 위해 애쓰고 힘쓰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믿/
  성경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유대인이 하나님을 바로 안 믿을 때, 하나님이 꺾어 버리셨는데 이방인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 믿으면 하나님께서 안 꺾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2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해당이 됩니다. /할/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하나님은 인자와 엄위(공의), 양면이 있습니다. 인자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이며 엄위는 공의대로 심판하시는 엄격한 성품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인자로 대하시지만 믿지 않는 불 신앙과 불순종한 자에게는 엄위로 다스리십니다.
  "넘어지는 자" 불 신앙으로 넘어지는 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는 산 믿음을 가리킴으로 산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따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맛 본 성도는 그 산 믿음의 자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산 믿음을 지키십시다. /아멘!/

 

  ▶23절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저희는 이스라엘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께 꺽기운바 된 이스라엘 백성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접붙임이 된다는 것이며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다시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4절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시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옛사람의 속성을 청산해야 합니다. 즉 돌 감람나무에서 찍혀야합니다.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백성들이 찍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도 찍혀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접붙임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상 숭배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와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갈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왜 성도들이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옛 사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못합니다. 옛 사람을 찍어버려야만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래된 고목 나무가 있습니다. 고목이란 사전에 보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 즉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를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서 있는 채로 죽은 마른나무를 일컫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신앙이 고목신앙이 되어버리지 않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외형도 다 죽어 가는 힘없는 신앙, 속 사람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없고 힘이 없는 신앙, 삶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향기를 발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잡음만 내는 모습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돌 감람나무에 참 감람나무를 접붙이려고 하면 돌 감람나무를 찍어내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절대로 접붙일 수 없습니다. 그래야 진 액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나무가 접붙임을 하면 새로운 맛을 내는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진 액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수혈 받아야 합니다. 생명이 꺼져갈 때 피를 수혈합니다. 생명이 꺼져갈 때, 물을 공급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태하고 발전이 없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무미건조 하다면 고목의 신앙입니다.
  고목은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지 못합니다.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충전을 시키면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어떤 꽃을 피워야 할까요?
  ⑴회개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정주의 "국화꽃 옆에서"라는 시구입니다.
  회개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필요합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아픔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들국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피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제일먼저 외쳤던 메시지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날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외쳤던 메시지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 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라"였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돌 감람나무를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지존파들도 막가파도 예수님이 들어가시니 회개했습니다.
  ⑵사랑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장미꽃을 꽃 중의 꽃입니다. 신앙의 꽃 중의 꽃은 사랑의 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다 버리고 우리 모두 사랑의 꽃을 활짝 피우는 성림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⑶겸손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고 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위로 여기는 겸손의 꽃을 피웁시다. 벧전5: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⑷봉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봉사란 남을 돕는 것이요, 남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웃을 검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막10: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⑸선교와 전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꽃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버립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물론 나무 자체가 중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생명의 열매인 전도와 선교의 열매입니다.
  ⑹소망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⑺기쁨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올해(2006년) 우리 교회의 표어가 기쁨 충만, 성령 충만의 해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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