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얼굴과 얼굴로[온유함은 말씀이 자기를 다스릴수 있게하는 능력]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30. 08:01

091025 얼굴과 얼굴로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1-9

성경본문

6.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신명기 34:9-12)

 

오래 전에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저도 그때 그 드라마를 즐겨 보았는데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이라는 배우의 연기가 아주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연을 했던지 궁예 역을 하기 위해서 안대를 했었는데 시력이 다 나빠졌다고 해요. 인기를 얻으니까 그 다음에 모처럼 주역을 맡았어요. 그 드라마는 위기의 남자였어요. 저도 그 배우에게 호감이 가서 위기의 남자라는 드라마까지 봤습니다. 그런데 그 뒷얘기가 있어요. 그가 위기의 남자에서 중년 남자의 흔들리는 모습을 연기할 때 감독하고 많이 부딪혔다는 거예요. 이전 드라마의 배역에 너무 몰입되어서 미처 그 감각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거죠. 남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뚫어보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갑자기 위기의 남자역을 하려니 얼마나 혼돈이 오겠어요. 그래서 이런 장면은 찍을 수 없다해서 부딪혔다는 거예요.

심리적으로는 직업적 페르소나에 빠졌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페르소나는 헬라어예요. 옛날 그리스 연극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는데 그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탈을 쓰고 그 탈에 맞는 역할을 하고 또 탈을 바꾸어 쓰면 그 역할이 바뀌듯이,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연기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다 자기 나름의 페르소나, 가면을 쓰고 있어요. 사회적인 지위, 집 밖에서의 어떤 역할, 이런 게 다 나의 가면이에요. 문제는 자기가 쓰고 잇는 가면과 그 가면 뒤에 감춰져 있는 자기 자신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혼동하다가는 이혼당할 수 있어요.

예전에 잭 웰치가 두 번째 부인하고 이혼했을 때 그 부인이 뭐라고 이혼사유를 제기했느냐 하면 회사에서 사장이지, 집에 와서도 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니 나는 그와 못 살겠다.’ 그리고 이혼했단 말이에요. 혼동이 있을 수 있어요. 저도 교회에서는 목사지만 집에 가면 그 가면을 벗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쓴 가면과 내면을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이거 혼동하면 안 돼요. 여러분, ‘빌 클린턴전 미국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알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탄핵의 위기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예요. 미국대통령의 권력은 세계를 뒤흔드는 권력이에요.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나요. 최고로 공부하고 지혜롭고, 경험 있는 사람, 정치력이 탁월한 사람, 경제부흥을 이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그는 여자문제를 일으켰어요. 자기를 다스리지 못했어요. 자기 내면의 흔들림을 주체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물론 빌 클린턴은 어릴 때 재혼한 엄마와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죠. 건강한 남자의 모델을 보지 못한 거죠. 건강한 아버지의 모델을 보지 못하고 자라난 거죠.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인간의 양면성이요,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한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가면을 쓰고 나아간다면 안 되는 거죠. 가면을 벗고 나의 솔직한 얼굴을 가지고 나가야 돼요. 나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돼요.

종교개혁자 루터칼빈이나 많은 개혁을 했지만 그들이 개혁을 할 때 주목했던 것을 한 단어로 요약을 하면 라틴어로 코람데오라고 해요.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나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게 종교개혁의 참모습이에요.

오늘 말씀은 신명기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이 모세오경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에요. 이 다섯 권의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할 만큼 모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에요. 그래서 모세의 죽음으로 신명기의 문을 닫고 있어요. 역사의 막이 내리고 있어요.

모세는 어떤 사람이냐. 오늘 본문에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이에요. 바로왕과 신하들과 애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적과 능력과 권능과 위엄을 드러낸 사람이에요. 노예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새로운 땅으로 인도한 최고의 지도자예요.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대목이 있어요. 모세를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사람이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만난 사람이다.’  그런데 모세를 설명하는 이 말씀의 주어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모세의 삶을 이끄셨어요.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모세를 얼굴과 얼굴로 만나주시고 저를 낱낱이 아셨어요. 모세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능력으로 함께 하셨고 모세의 속사람을 낱낱이 아시고 저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코리언시리즈 야구 얘기를 들으셨죠? 너무 멋있었잖아요. 경제적 효과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국민들에게 주는 감동과 기쁨, 그거 대단한 거잖아요. 원래 기아팀이 옛날 해태 타이거스잖아요. 명문구단이었잖아요. 아홉 번이나 우승을 했는데 IMF로 기업이 흔들흔들 하면서 결국 나중에 기아로 넘어간 거잖아요. 한없이 추락해서 생전 안 하던 꼴찌를 두 번씩이나 했어요. 종이호랑이라고 비웃음을 당하던 팀이었어요. 기아의 회장이 새로 단장을 임명하면서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대요. ‘제발 좀 잘 해달라. 어제 축하파티 할 때 기아회장이 선수들에게 90도로 절을 했대요. 너무 고맙다고. ‘여러분을 우리가 맡았을 때 우리도 너무너무 힘들었다. 우리가 후원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우승해서 온 국민에게 기쁨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회사도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기업의 회장이 선수들에게 절을 했다는 거예요. 인간승리의 뒷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요. 특별히 고참선수들이 솔선수범하고 희생했다는 거예요. 홈런도 칠 수 있었겠지만 감독의 지시대로 번트를 대라면 대고, 그게 나는 죽고 너는 살아라 하는 희생번트잖아요. 묵묵히 작전을 따랐다고 하는 거예요.

 

신앙은 화려하게 성취하는 것, 남 보기에 부러울 만큼 일을 멋들어지게 이루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면이 건강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요, 하나님께서 이끄신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지어는 내 뜻과 맞지 않고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하나님이 찾으실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따르는 자세가 건강한 내면이에요.

크고 높은 집을 짓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하면서 뒷일은 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맡길 수 있는 건강한 내면을 회복하는 거죠. 그러나 그렇게 내면이 건강한 사람,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도 없다고 얘기하는 게 정확하겠죠. 하나님께 그토록 쓰임 받았던 모세 역시 그러했어요. 건강한 내면을 가지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시는 것도 놀라운 역사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 속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시기를 셋으로 나눌 수 있어요. 애굽에서의 40, 미디안 광야에서의 40,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이죠. 애굽에서의 40년은 모세라는 이름에 다 담겨 있어요.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다구원받았다는 말이에요. 모세스토리 아시잖아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남자아기는 다 죽이라고 했어요. 태어나면 다 물에 던지라고 했어요. 그런 불안 속에 모세가 잉태됐어요. 엄마가 불안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뱃속의 생명도 그 불안을 고스란히 느끼게 되죠.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더 이상은 숨겨 기를 수 없어서 갈대 상자에 아이를 담아서 물에다 띄워 보냈어요. 이제 누구 손에 갈런 지 모르는데 엄마만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게 아니에요. 그 안에서 울어대는 아기도 본능적으로 엄마 품을 떠나고 있다는, 버려짐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죠. 놀랍게도 애굽 공주의 손에 들어갑니다.

모세의 누이가 지혜롭게 그를 뒤좇아가서 내가 유모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바로 모세를 낳은 엄마를 유모로 소개했어요. 애굽 공주는 그 아기가 어느 정도 자라날 때까지 유모 품에서 자라나도록 허용했어요. 그래서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와서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그 품에서 자라난 거예요. 어느 정도 자라났을 때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거예요. 모세는 두 엄마 밑에서 자라난 거예요. 두 민족, 두 문화, 두 종교 속에서, 어떻게 되겠어요? 그의 젊은 날은 끝없는 정체성의 혼란이에요. ‘내가 누구냐? 내가 도대체 이집트 사람이냐, 이스라엘 사람이냐?’ 혼란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뜻을 세우고 고난 받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다가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죽여요. 살인하게 돼요. 그러나 놀랍게도 자기 동족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이제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호화롭게 자라던 네가 감히 우리의 고통을 알고 우리를 돕겠다고 하느냐거부 당해요. 그는 도망가게 돼요. 무너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모세의 애굽생활 40년이에요.

미디안의 40년이 이어집니다. 낯선 땅,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게 돼요. 그러다가 한 족장을 만나게 되고 그 집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살이 하게 돼요. 그래서 아이를 낳았을 때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어요. ‘나그네라는 뜻이에요. 타국 땅에서 나그네 되었다. 자기 연민,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자기의 모습을 아들 이름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 나이 80이 되었을 때는 쥐고 있는 지팡이보다도 더 말라버린 인생이 됐어요. 아무런 소망이 없어요. 그러다가 쓰러져 죽는 일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이 만나주셨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으면 저 같으면 아멘, 할렐루야하고 따라갈 것 같은데 모세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그게 거짓말은 아닐 거예요. 40년을 양치기로 살아 보세요. 입이 뻣뻣해지지 않겠어요? 옛날의 화려했던 지식 다 잊어버리고 경험과 자신감 다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학습된 무력감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이 생각으로 꽉 들어찼던 모세였어요. 모세가 그 생각의 꺼풀을 벗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전에 모세를 설득하는데 진이 다 빠진 거예요. 이적을 보여줘도 믿지 않아요. ‘나는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오죽하면 하나님이 화를 내셨다고 했을까요. 왜 그럴까? 아마 모세의 마음에 분노가 있었을 거예요. 하나님을 만났을 때 호기심과 놀라움도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화가 났을 거예요. ‘80년 동안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하나님 어디 가 계시고 이제 다 늙어서 죽을 판인데 나타나서 애굽에 가서 뭘 하라고 하시다니.’ 분노가 일어난 거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갓난아이가 말은 못해도 엄마 품에 안겨서 자라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내가 지금 안겨있는 이 품이 나의 보금자리라는 신뢰감을 갖게 돼요. 인간에겐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해요. 본질적 신뢰예요. 그게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어요. 갓난아이 같이 무력한 아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품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도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아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물론 믿음에 지식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남의 말을 들을 때 잘 듣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거부하는 사람입니까? 성격의 차이도 있어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누가 뭐라고 하면 거부하는 사람이 있어요. 본질적 신뢰를 잃으면 어려운 거예요. 자칫 잘못하면 과도한 열심으로 내적 불안을 감추려고 해요. 교회에서 열심으로 일해요. 그러나 그것은 헌신일 수도 있지만 자기 불안을 끊임없이 잠재우려고 하는 몸부림일 수 있어요. 그건 신앙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어서 속히 그 한계를 알고 벗어버려야 해요.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로움을 누려야 돼요. 모세는 그게 결여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내버리지 아니하시고 들어서 쓰시는 거예요.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모세가 깊은 내적 상처와 불안을 안고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쓰임 받았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구원이 열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서 출애굽의 40년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어요. 모세도 대단히 열심 있는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분노가 터지는 사람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분노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십계명 돌판을 내던져서 깨부순 사람이었어요.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어요. 물이 없어서 목마르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언제까지 이렇게 불순종하겠느냐고 분노하면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해서 물을 내라그랬는데 지팡이로 두드렸어요. ‘네가 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너의 분노를 드러냄으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도다.’ 책망을 듣기도 했어요. 때로는 하나님이 맡기신 짐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다고 죽여 달라고까지 했어요.

제가 70년대에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 설교집을 읽다 보니까 그분이 이런 고백을 하더라고요. 70년대에 순복음교회가 얼마나 부흥했습니까? 서대문 사거리에서 드디어 여의도로 나가기로 했어요. 그때 여의도는 허허벌판이었잖아요. 다들 반대했어요. ‘거기 나가면 뭐 합니까? 거기엔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있으니까 결정하고 밀고 나갔어요. 건축을 하는데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하지만 그 당시 여의도에 교회를 짓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철근이 녹스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붙들고 울며 기도하다가 순간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겪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권력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짐에 눌리기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님이 월급이 많은 거예요. 오해하면 안 돼요. ‘사장님 밤낮 골프 치러 다니고 노는 것 같은데 뭐 그렇게 월급은 많이 가져가시고.’ 그게 아니에요.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셔요. 그런데 이 모세에 관한 말씀을 읽어보면 놀라운 대목이 있어요. 출애굽기 33 1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만나주시고 대면하여 얼굴과 얼굴로 저를 만나주셨어요. 물론 하나님 얼굴을 보는 자는 죽는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했다는 말은 맨 얼굴로 대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대해주셨다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모세가 자기의 가면을 벗고 가난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서 열어놨다는 거예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해요.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어떤 남녀가 서로 사랑했어요. 그래서 남자가 부지런히 편지를 쓰고 때마다 선물을 보냈어요. 여자가 시골에 살거든요. 그러니 밤낮 우체부가 그것을 전해주지 않았겠어요? 드디어 이 아가씨가 결혼했어요. 우체부하고. ,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날마다 만나주셔요. 그거 잊어버리면 안돼요.

하나님이 모세를 다듬어 가셔요. 성경을 읽어보니 모세의 온유함을 얘기해요. 모세는 분노의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다듬어주시므로 말씀으로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단 말이에요. 사실은 태어나면서 좀 부드러운 사람이 있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생태적인 부드러움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성깔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열어놓고 말씀이 자기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내어놓는 사람, 그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는 거예요.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의 기도가 나와요.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인생의 자랑거리는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 우리의 인생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아침마다 우리에게 인자를 부어주십시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주십시오. 주의 얼굴을 대하게 해주십시오.’ 이게 바로 하나님 안에서 다뤄진 모세의 변화예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하게 된 거예요. 신명기 마지막 33장에 보면 전에는 그토록 분노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선포하는 거예요. 지파마다 축복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로다. 너희같이 놀라운 구원을 체험한 백성이 또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돼요.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나왔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야곱은 청년시절에 집을 쫓겨나와서 광야에서 헤맬 때 하나님의 놀라운 환상을 보잖아요. 그리고는 그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어요.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로구나 하는 뜻이에요. 그리고 20년 방황하고 살다가 중년이 되어서 돌아올 때 얍복강가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났어요.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랍게도 네 이름을 고쳐라. 이제는 야곱, 남을 속이는 자가 아니라 꾀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서 승리한 자,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자라고 네 이름을 고쳐라.’ 놀라운 축복을 받았어요. 그 자리를 기억하여 이름하기를 브니엘이라고 했어요. ‘브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요. 우리 삶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요. 하나님 만나야 돼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예수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있다.’

요즘 한국에 걷기 열풍이 일었다고 그래요. 저도 한번 제주도 가보고 싶어요. 이제는 차 타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올레 길을 걷고 싶어요. 뛰던 사람들이 이제는 걷기 시작했어요. 뛰던 사람들이 다 지쳐버렸어요. 탈진해버렸어요.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지금 왜 이러고 사는 거냐. 걸어보자.’ 뛰면 무슨 생각이 나겠어요. 오직 골인할 그 생각 하나만 가지고 뛰는 거예요. 그저 참자. 버티자 그러면서 뛰는 거예요. 그러나 걸으면 어떻게 돼요. 나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자기를 찾으려고 걷는 거잖아요.

<워싱톤포스트>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은 과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가.’ 20071월 추운 겨울에 워싱턴DC의 한 지하철 역에 평범한 중년남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해요. 바하의 작품을 연주하는 거예요. 45분간 연주했대요. 그런데 그 동안에 그 역을 지나간 사람은 2천 명쯤 되었대요. 멈춰 서서 그의 연주를 주목해서 잠깐이라도 들은 사람은 6명이었대요. 그 앞에 놓여있는 모자에 돈을 던져 넣고 간 사람은 20명쯤 됐대요. 모인 돈이 모두 32달러였대요. 45분 연주를 마치고 홀연히 사라진 사람은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이틀 전에 보스톤에서 어마어마한 연주회를 열었고 매진된 티켓 가격이 평균 100달러였던 죠수아 벨이라고 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예기치 않은 상황과 일상 속에서는 바하의 최고 작품을 30억짜리 바이올린을 가지고 최고의 연주를 하는데도 못 듣고 다 지나쳤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은 멀리 있지 않아요. 눈을 들어 보세요.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들의 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라. 먹고 마시고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찾으라. 그리할 때 진정으로 너희가 구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게 되고 삶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