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내 사랑하는 성경[성경책살려내는 둘=목사의설교와 성령의감동]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4. 20:48

100221 내 사랑하는 성경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3[눈을 열어주소서]-22

성경본문

11.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5-17)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첫 시험을 치르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문제가 나왔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 뭐라고 인사해야 되나요? 다섯 자인데 끝은 로 끝납니다. 아이가 씨익 웃으면서 썼어요. ‘뭐 이런 걸 다어려서부터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가르쳐야죠.

땅그랑에 찌뜨라 라야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는 한국인 아버지 인도네시아 어머니해서 혼혈가정이 한 70가구가 되고 그 자녀들이 한 1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 외곽지역에 더 있지요. 그런 가정들 중 간혹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도 있지만 아이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도록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쳐주는 일이 시급한 것이죠. 마침, 대사관과 한인회의 여러 기업들과 관심 있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서 어제 그곳에 루꼬(상가건물)를 빌려 공부방을 개설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순서가 있었습니다. 다 뜻있는 순서였습니다만 제 마음에 참 기뻤던 것은 이미 4년 전부터 아이들을 집에 초청해서 글을 가르쳐주고 예배를 드리던 고재천 선교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수고와 노력이 한인사회에 알려지면서 협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여러 가지로 돕는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저는 어제 그 행사 가운데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순서가 있었어요. 40명 되는 주로 초등학생들이 나와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요. 거기가 전기사정이 안 좋은 모양이에요. 사모님이 반주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반주를 할 수 없어 그냥 선교사님이 첫 음을 잡고 노래를 불렀어요. 뭘 부르는가 했더니 왕 왕 왕 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 공 공 공 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공주다이걸 부르더라고요. 몇 곡을 계속 불렀어요. 우리가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들을 아주 잘 부르더라고요. 노래만큼 확실한 교육이 없어요. 성경의 말씀을 노래로 찬송으로 부르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도와준다 한들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 성경을 심어주고 그것이 그들의 입술에 찬송으로 머물게 되면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열어주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야 돼요. 그런데 성경을 읽으려 하는 분들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성경에 오류가 많다는 거예요. 틀린 데가 많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어요.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된 책이죠. 누군가 그것을 썼지요. 그게 원본이지요. 지금은 원본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요. 그 누군가가 쓴 성경을 여러 교회에서 함께 읽기 위해서 그것을 옮겼습니다. 사본, 옮겼을 거예요. 많은 사본들이 나왔어요.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번역해야 돼요. 역본, 번역본이 나온 거예요. 이렇게 옮겨 쓰고 받아 쓰고 하는 동안에 중복되기도 하고 빠뜨리기도 하고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경을 옮겨 쓰면서 이 구절을 끼워 넣으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좀 더 뜨겁게 만나겠지해가지고 끼워 넣는 경우도 있었어요. 거룩한 열심이 지나친 거지요. 오류가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쓰게 한 책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오류는 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실 때에 그것은 기계적인 영감이 아니에요. 기계적이라고 하는 것은 커피자판기와 같아요. 예쁜 아가씨가 눌러도 정량 그대로 나와요. 할머니가 눌러도 똑같이 나오고 아저씨가 눌러도 똑같이 나와요. 이게 바로 기계적이라는 거예요. 누가 어떻게 하든 반응은 똑 같은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시지 않아요. 유기적인 영감설이에요.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들어서 쓰셔요. 배운 사람은 배운 대로, 다양하게 경험한 모든 것을 다 쓰셔요. 심지어는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것까지도 쓰셔요. 제가 아버님으로부터 생전에 받은 편지가 딱 한 통 있습니다. 군에 있을 때 저의 아버님이 편지를 보내셨어요. 아버님이 편지를 보내셨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사건이에요. 감격하며 편지를 읽었어요. 두 장을 쓰시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한 장으로 마무리 하셨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맞춤법이 좀 틀리셨더라고요. 옛날 분이시니까. 틀린 곳이 몇 군데 있었어요. 그러나 군에 간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나 뜨거웠어요. 성경도 그래요. 틀린 데가 있어요. 사람 이름이 틀리기도 하고 숫자가 틀리기도 하고 장소 설명이 틀리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는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지혜를 주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요.

또 하나 문자적인 오류를 넘어서서 내용에 있어서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있습니다. 이게 난제難題예요.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1 20, 21절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자기 맘대로 풀지 말아라. 왜 성경을 쓸 때 하나님의 감동을 입어 썼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있어야 돼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요. 문자를 읽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어요. 그 내용을 사실 그대로 읽었다고 해서 이해한 게 아니죠. 그 말씀을 읽고 사람이 변화되었다면 오늘도 내가 그 말씀을 읽을 때에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냐 마땅히 바른 읽기라고 할 것이에요.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3 16절에서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무식한 자와 연약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졌느니라.’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어려운 대목이 나올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선 다루듯이 하라그런 말이에요. 생선을 구울 때 천천히 살살 다뤄야지 막 뒤집고 하다가 생선이 다 흩어지면 안 되지요. 그러면 식탁에 내놓을 수 없잖아요. 원형이 상하지 않게 살살 다루라는 말이에요. 또 먹을 때도 급하게 먹다 가시가 걸리잖아요. 가시는 발라내고 부드러운 부분부터 먹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살을 먹고 어른들은 대가리를 먹는 거예요. 눈을 먹는 거예요. 생선 다루듯이 하라는 거예요.

김동길 교수가 언젠가 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했는데 참 인상적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동정녀 탄생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던데 저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 하나님이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내려가는데 어떻게 내가 사람과 똑 같은 방법으로 가겠느냐 나는 좀 다르게 가겠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어련히 그러셔야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할 것이지 그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할 게 무엇이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방법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두세요. 왜 그렇게 오셨는가 하는 그 이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신앙이 성숙하면 난제라고 하는 것은 눈 녹듯이 녹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서울에 눈이 많이 왔어도 봄을 막을 수는 없어요. 어느덧 다 녹아버리는 거예요. 그 문제를 들여다 봐가지고 풀리는 게 아니에요. 날 사랑하시는 십자가 비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음성을 듣고 말씀을 깨닫다 보면 난제를 다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1884년에 알렌Allen’ 이 들어오고 1885년에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들어왔어요. 나라 밖 만주에서 한국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선교사들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일본을 거쳐 들어왔는데, 일본에서 이수정이라고 하는 조선관리가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예수를 믿고 한문성경에 토를 단 <마가복음서 언해>를 가지고 들어왔어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예요. 100년 만에 이 놀라운 교회부흥을 이루었던 것은 그저 믿습니다해서 이루어진 부흥이 아니에요. 성경에 기초한 신앙이었어요. 성경을 통해서 교회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인들, 이름 없이 살았던 여인들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일깨워주고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어서 이런 변화를 일으키게 된 거예요.

1910년에 최초로 신구약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어요. 정확하게 100년 전에. 그런데 평안도 사투리예요. 당시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평안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번역은 했지만 너무 틀린 데도 많고 예배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다, 빨리 다시 번역하자 해가지고 1911년부터 1937년까지 26년 동안 선교사들과 그를 돕는 한국인들이 히브리어 성경, 헬라어 성경, 일본어 성경, 중국어 성경, 영어 성경을 갖다놓고 꼼꼼하게 번역해서 만든 성경이 지금 쓰고 있는 성경이에요. <개역성경> 이라는 말이에요. 다시 한번 번역했다는 말이에요. 37년에 나온 성경이에요. 이제 조금 있으면 100년 되는 성경이에요. 그러니 어렵지요. 한글 맞춤법 개정안이 그 다음에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좀 고쳐 썼을 뿐이지 어투가 어려워요.

교회지도자들이 고민을 많이 했어요. 흔히 말하기를 성경만한 수면제가 없다는 거예요. 레위기는 1장을 넘기기도 전에 코를 골고 잔다는 거예요. 너무 어려워서. 물론 뜨겁게 은혜 받은 분들은 어렵거나 말거나 감사함으로 읽기도 하지만 사실 어렵거든요.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성경들이 그간에 많이 나왔어요. 우리교회는 새벽기도 시간에는 표준새번역을 써요. 그렇게 읽으면 훨씬 쉽고 이해하기 좋아요.

그러나 1천만을 헤아리는 한국교회가 예배용 성경으로 쓰기에는 거부감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좀 어려워야지’, 읽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성경은 좀 어려워야지 하는 묘한 이중적인 심리가 있어서 고심 끝에 <개역성경>의 아주 어려운 부분들만 고쳐 쓴 <개역개정 성경>이 드디어 몇 년 전에 발간되었고 한국의 온 교회가 이것을 예배용 성경으로 씁시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앞서나가는 교회들은 다 바꾸어 쓰고 있는 거지요. 찬송가도 바뀌었어요. 그런데 뭐가 달라졌느냐 100곡 정도가 추가되었는데, 한국인이 신앙고백한, 한국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17편밖에 없어요. 새로 된 찬송가에는 128편 약 100곡 이상을 더 수록한 거죠. 그건 당연한 거예요. 우리가 언제까지나 150년 전 미국의 무디 부흥시대의 찬송만 부르겠어요? 그 찬송도 은혜롭지만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15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때 당연히 한국사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찬송해야 되는 거지요.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큰 사건이 있었어요.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대원군시대 평양 군민들과 충돌해서 배는 불타버리고 거기에 탔던 모든 사람이 죽었어요. 그 가운데 통역을 자처했던 토마스라는 영국 선교사가 같이 죽었어요. 그는 한국에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전하려고 한문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는 방법을 찾다가 그 배가 통역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통역을 자처하고 그 배를 탔어요. 그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내어밀다가 칼아 맞아 죽었어요. 그때 나이가 26살이었어요. 그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그냥 죽었어요. 그런데 그의 목을 내리쳤던 사람이 박춘권이라는 사람인데 그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의 조카 이영태는 전도사가 되고 선교사들의 성경번역을 돕는 사람이 되었어요. 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섬에 들러 잠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었는데 최치량이라는 열두 살 난 아이가 멋모르고 성경을 하나 받아들었다가 나중에 배가 다 불타버리고 사람들은 다 죽고 성경을 가지고 있다가는 큰일 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가지고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경을 넘겨줬어요. ‘박영식이라는 사람은 성경을 넘겨 받아 이걸 어디다 쓸까 하다가 다 뜯어가지고 집을 도배하는데 썼어요. 성경으로 도배한 집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후에 그 집이 평양 장대현교회의 터가 되었어요. 토마스가 그렇게 죽은 지 40년 만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소위 평양대부흥회’, 1907년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하나님은 성경을 전하기 위해서 저 멀리 영국의 한 젊은 청년을 부르시고 그가 한 일이라고는 싸우는 와중에 성경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뿐이었는데 그 성경이 한 알의 씨앗 같이 땅에 떨어져서 40년 만에 평양대부흥을 이루는 놀라운 일이 있었던 거예요.

북한에서 얼마 전에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준공되었어요. 개교를 했어요. 남한의 기독교에서 400억을 들여 지어준 거예요. 멀리 통일을 내다보고. 공사를 하다보니까 집터가 하나 발견되었어요. 알고보니 토마스목사 순교기념예배당터였어요. 대동강변에서 죽은 그를 기억하기 위해 가까운 데다가 기념예배당을 세웠는데 공산화되면서 다 무너지고 잊혀졌다가 공사하는 중에 발견되었어요. 사람들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이 있는 곳에 역사하셔요.

성경의 목적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데 있어요. 세상의 역사책은 승자의 기록이에요. 패자는 말이 없어요. <삼국사기> 이것은 신라를 이어 내려간 고려가 서술한 거잖아요.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쓰지만 고구려, 백제는 별로 없어요. 신라 위주의 역사예요. <삼국유사>, 삼국사기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똑같아요. 심지어는 <용비어천가>라는 게 나오잖아요.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성계의 4대조 집안까지 올라가면서 다 왕으로 추존하고 신격화 하는 이야기가 용비어천가잖아요. 세상의 역사책은 다 이래요.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왕이 죽은 다음에 실록을 쓰는데 그 때 정권을 누가 잡았느냐에 따라서 왕의 평가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달라요. 다윗은 영웅이었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은 우리와 똑같이 허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연약한 인간이에요. 다윗의 승리와 영광도 기록하지만 그 자신과 가정 안에 있는 죄악과 허물을 낱낱이 숨김없이 다 기록해요. ? 그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어요. 의사에게 갔어요. 검진을 했어요. 알고 보니 죽을 병에 걸렸어요. 그러면 주위에 있는 가족들은 그 사람이 충격을 받을까 봐 잘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의사는 그럴 수 없어요. 의사는 분명히 이야기해 줘야 돼요. 그의 병을 분명히 이야기해 줘야 돼요. 고쳐야 하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기록들은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냉정하리만큼 죄인이라고 얘기해요. 오늘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하는책이다. 요한복음 5 39절에 보면 여러분이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것만이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그의 고민은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카톨릭의 신앙이에요. 카톨릭의 신앙은 이미 다 매뉴얼화 되어 있어요. 신학자들이 다 교리화해 놓았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일이 신부들의 손에 다 맡겨져 있어요. 뭐 신앙고백이 따로 없어요.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다 되게 되어있어요. 이성주의예요. 객관주의예요. 종교개혁 전만 하더라도 성경 없이 예수 믿었어요. 성경은 있었지만 성경이 귀했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신부들만 읽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다 전해주는 말만 듣고 믿었어요. 성경 없이 예수 믿은 거예요. 교리로만 예수를 믿었던 거예요.

반면에 같은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난 급진파들이 있어요. 급진파들은 내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해요. 주관주의예요. 자기체험을 강조해요. 그래서 마틴 루터는 참 신앙은 어디에 있느냐, 참 신앙은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인 성경, 그것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하심으로 주관적인 계시가 되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될 때에만 우리의 신앙은 살아날 수 있다고백했어요.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은 죽은 책이다. 그 죽은 책을 살려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목사의 설교요, 또 하나는 성령의 감동이다.  성경을 풀어서 말씀을 전할 때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거예요. 성령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어떤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돼요. 이해해야 돼요. 이해되지 않는 체험은 사람을 더 혼란 가운데 빠뜨리는 거예요.

로마서 10 17절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생겨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 그 말씀에 생명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켜주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래요.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하려면 마누라를 처음 만나는 여자 대하듯 하라! 제가 은혜 받았어요. 맞다, 그러면 될 텐데. 저는 거기다 하나 더 붙이고 싶습니다. 성경을 그 여자가 건네주는 연애편지 같이 여겨라. 얼마나 두근거리겠어요. 성경이 말하잖아요. 그 안에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 종교개혁이 따로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때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거예요. 내게서 시작되는 종교개혁이 진정한 종교개혁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