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탈식민주의 연구해온 연광석
박현채와 대만 작가 천잉전 참조 삼아
역사를 잃은 ‘사상의 단절·빈곤’ 성찰
박현채와 대만 작가 천잉전 참조 삼아
역사를 잃은 ‘사상의 단절·빈곤’ 성찰
사상의 분단-아시아를 방법으로 박현채를 다시 읽다
연광석 지음/나름북스·1만8000원
연광석 지음/나름북스·1만8000원
1985년 10월 <창작과 비평> 제57호에 실린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와 이대근이 각각 쓴 2편의 논문은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했다. 논쟁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점차 계급모순을 중심으로 삼는 쪽(‘민중민주’·PD)과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삼는 쪽(‘민족민주’·NL)의 대립으로 흘렀으나, 1990년대 들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 ‘포스트 냉전’의 거대한 조류에 휘말려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정작 박현채는 1989년에 이뤄진 대담에서 “비생산적인 이론투쟁은 종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이 같은 논쟁의 전개에 대해 “굉장히 탄식감을 가지고 바라봤다”(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고 한다. 당시 논쟁을 촉발했던 박현채의 진정한 문제의식은 과연 어떤 것이었던가?
‘민족경제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동아시아 탈식민주의 지식의 계보를 연구해온 학자 연광석(41)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단행본으로 작업한 <사상의 분단>에서 박현채라는 ‘사상가’를 다시 불러내어 우리가 처한 지성사적인 위기의 실체를 진단해보려 시도한다. 지은이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도발적이다. 그는 “식민 이후의 동아시아는 식민의 후과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단·냉전 체계로 진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역사적 종별성’(historical specificity)을 잃고 ‘식민주의적 현대성’에 붙들렸다”고 본다. 우리가 이뤄왔다고 믿는 현대화, 예컨대 국민국가와 국민의 형성, 자본주의적 발전, ‘민주’라는 말로 대표되는 정치 형식 등은 우리 밖에서 폭력적으로 주어진 ‘보편주의’를 그저 가상으로 구현한 것에 그칠 뿐, 우리는 여전히 ‘신식민성’과 ‘분단’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보편에서 출발해서는 동태적으로 실천하는 주체를 발견해낼 수 없다고 보는 지은이는, 역사의 종축 위에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민족’을 내부에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책 전체에 걸쳐 지은이가 자신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권역적 참조점’과 ‘역사의 우위’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과 분단이 중첩된 ‘동아시아’라는 권역 안에 존재하는 참조점들을 연결하고, 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국가와 국민의 틀에 갇히지 않고 실질적인 역사적 경험들을 실천해낼 수 있는 대중과 지식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작가이자 사상가 천잉전(1937~2016)의 모습. 출처 중국작가협회 누리집
이런 방법론에 기대어, 지은이는 ‘역사적 중간물’(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표현)로서 남한의 경제학자 박현채와 대만의 작가이자 사상가 천잉전(1937~2016)을 소환한다. ‘민족경제론’의 주창자로 유명한 박현채는 과거의 ‘식민’ 현실이 당대의 분단·냉전 체제와 착종된 ‘신식민’ 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성에 천착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과 1980년 ‘5·18참사’를 거치면서 정치형식으로서의 ‘민주’와 정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범주를 각각 획득한 남한의 지식사상계는 역사적 범주로서의 ‘민족’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가는, ‘탈역사화’ 추세를 보였다.”
때문에 박현채는 “민족적인 것이 곧 민중적인 것”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역사와 이론을 하나로 꿰는 실천적 사상을 제기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그가 제기했던 ‘사회구성체 논쟁’은 “‘민족’이 외재화한 민족민주, ‘민족’을 소거한 민중민주의 가상적 이원 대립으로 고착화”하고 말았다. “식민·분단 모순이 형식적 민주와 국가 간의 통합 문제로 추상화한 것이다.” 박현채의 문제의식과 사상적 실천은 점점 주변화되고 고립되었는데, 지은이는 이 같은 박현채의 경험을 ‘사상의 단절’이란 말로 설명한다.
‘민족경제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반면 천잉전은 박현채와 마찬가지로 ‘식민’과 ‘신식민’의 연장선과 경계 위에서 사상을 세우려 했지만, 박현채와는 다르게 ‘사상의 빈곤’을 경험한 인물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대만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통일을 주창한 ‘중국 지식인’으로서, 천잉전은 전통과 식민, 냉전이 복잡하게 착종된 대만의 현실 속에서 고뇌했다. 1989년에는 기자 신분으로 남한을 방문해 당시 민족민중운동의 각 영역과 의제를 취재하는 등 “남한을 통해 대만을 성찰”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지은이가 말하는 ‘권역적 상호참조’의 선구적 시도에 해당한다.
서로 비슷하고도 다른 박현채와 천잉전의 발자취를 되짚고 비교하며, 지은이는 오늘날 ‘사상 실천’이라는 것이 어디로 갔는지 묻는다. 분단·냉전에 기대어 끝나지 않은 ‘식민성’ 속에서 우리는 주체적으로 역사를 읽을 시야 자체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의 지식사상계는 오히려 이런 지체 자체를 망각하고 유럽적 현대성 ‘이후’에 침잠해 있었다.” 2000년대에는 아예 ‘사상의 종언’이라고 할 만한 지적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가상적인 현대성에 포획된 사람들의 삶은 “일상적으로 위기에 처했다”고 지은이는 짚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