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conscience)의 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함께 나눈다는 말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과 나눈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한다. 요컨대 양심의 원뜻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인 것이다.
대체복무의 내용을 군복무보다 어렵게 만들어 아예 잠재적 가짜들에게 유혹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 사회가 불신사회임을 자인하는 태도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양심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사라지고,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로 모든 논쟁이 귀결된다.
지난주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벌써부터 국방력의 약화나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시행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이번 판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를 왜곡하지 않을지 염려된다.
보통사람들에게 양심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착하다, 올바르다, 정직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가 ‘착하다’ 또는 ‘올바르다’고 할 때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도덕칙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양심(良心)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이 풀이에 따르면 양심은 그저 착하다기보다, 어떤 것의 도덕적 성격을 구분할 줄 아는 이성을 뜻한다. 흔히 통하는 관용어법과 다르다.
오래전 헌법재판소에서도 양심을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해석했다.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의 개념에 보다 더 가깝지만 이것 역시 일반적인 어법과는 약간 다르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고 이해하는 ‘양심’, 그리고 철학이나 인권에서 의미하는 ‘양심’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에 격하게 반발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니, 군대 빠지려고 하는 자가 양심적이라면 우리같이 군대 다녀온 사람은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그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이다. 정확한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갈등이다.
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conscience)의 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전통적으로 이것을 ‘도덕적 의식’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의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신일 수도 있고, 특정 문화권에서 형성된 초자아일 수도 있고, 자기성찰일 수도 있다. 함께 나눈다는 말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과 나눈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한다. 요컨대 양심의 원뜻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인권에서는 다음의 두 조건이 더해져야 양심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우선, 단순한 의견이나 피상적인 선택과 취향은 양심이 아니다. 타당성, 진중함, 정합성, 중요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마음속 깊은 차원에서 다져지고 정제된 믿음의 결정체가 양심이다. 양심이란 말은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심각한 개념이고, 일단 꺼냈다 하면 대단히 무게 있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깊은 생각에서 나온 신념이라면 다 양심인가. 히틀러가 ‘진심으로’ 인종차별주의를 확신해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저질렀다면 그것도 양심인가.
그렇진 않다. 이 때문에 둘째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깊은 믿음에서 나왔다 해도 모든 신념이 양심은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충족하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믿음을 그 사람의 양심이라고 인정해 주자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헌재 결정이 나온 뒤 병역거부자에 대해 ‘양심’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일부 언론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라는 표현을 썼다.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구분해서 불러야 옳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런 생각들은 인권에 관한 오해 또는 무지에 가깝다.
국제 인권 기준에서는 거의 언제나 생각-양심-종교의 자유(the right to freedom of thought, conscience and religion)를 한 묶음으로 취급한다. 세 가지를 하나의 권리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국제자유권규약, 미주인권협약, 아프리카인권헌장, 유럽인권협정, 유럽연합기본권헌장 등이 모두 그러하다.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같은 종류이지만 좀 더 포괄적이다. 종교의 자유가 특정 종교를 믿고 예배할 자유를 가리킨다면,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 더해, 국교 또는 다수 종교를 따르지 않을 자유,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 불가지론을 유지할 자유, 세속적 차원의 마음의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이런 양심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투옥, 태형, 암살 등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곳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라크, 말레이시아, 인도, 수단, 이란 등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다수 종교를 따를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양심의 자유는 자기 마음을 남에게 드러내고 남들과 그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권리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자기 생각을 마음속에 담아 두기만 하는 것을 자유라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양심-종교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표현의 자유 및 집회·결사의 자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런 권리들이 자유권의 핵심을 이루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신봉한다 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나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에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다.
대체복무 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가짜 양심범들을 가려내겠다고 벼르는 듯한 경향도 우려스럽다. 물론 제도를 악용하는 이들까지 모두 용인할 순 없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다. 옛날 같았으면 배교하느니 순교를 택할 사람들이다. 양심은 그만큼 무거운 것이니만큼 사람들이 양심을 함부로 팔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선 안 된다.
원론적으로 말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군대 내 생활조건은 아무런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 설령 군 생활이 아무리 편하다 해도 입대를 거부해야 진정한 양심적 거부다. 기합이나 폭언이 전혀 없고, 사병 월급이 대기업 사원보다 더 많고, 병영 시설이 5성급 호텔보다 더 좋고, 군 복무 기간이 6개월밖에 안 된다 해도 자기 양심 때문에 군대에 못 가겠다고 하는 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대체복무의 내용을 군복무보다 어렵게 만들어 아예 잠재적 가짜들에게 유혹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 사회가 불신사회임을 자인하는 태도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양심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사라지고,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로 모든 논쟁이 귀결된다.
모태신앙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 신앙 경력 몇 년부터 교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등등,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판별 기준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진짜 양심임을 변별할 수 있는 길고 긴 특수 검사 항목이 고안되는가 하면, 거짓말탐지기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테스트를 뚫을 수 있는 ‘족보’가 암암리에 돌아다닐 수도 있다. 양심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방안을 놓고 전문적이고 테크닉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고 대중 역시 그런 식의 피상적인 논쟁에 뛰어들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참된 ‘배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 문제로 ‘공정하게’ 채점하여 학생들 간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적으로 귀결되는 현실과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헌재 결정은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 신뢰성의 토대에 깊은 과제를 던졌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신뢰가 없는 사회라면 대체복무제가 자칫 불신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유엔에서 반대하는 유사형벌적 제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제도 변화보다 규범의 변화가 더 어렵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제도화를 우리 사회 전체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양심을 근거로 어떤 호소를 해도 “그 말을 도대체 어떻게 믿어”라는 반응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사회라면 그 어떤 제도를 갖춰도 양심이 진정으로 존중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