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모의 전시 <구현모: 후천적 자연>. 이우성 제공
흔히 ‘시적이다’라고 말한다. 시적인 게 뭔데? 시인인 나도 모른다. 서정적인 문장(혹은 그런 표정이나 태도), 아름답게 묘사가 잘된 문장(마찬가지로 그런 표정이나 태도)을 보면 ‘시적이다’라고 말한다. 서정의 기준도 다르고 아름다움의 기준도 다르기 때문에 사실 다 말이 안 된다. ‘시적이다’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이딴 걸 왜 따지냐고? ‘시적이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흔히 갖는 시에 대한 인식 속에는, 시란 그저 아름답게 풍경을 읊는 것이라는 판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시가 아니고 시적이지도 않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시적인 건 뭐야?’라고 물을 법하다. ‘네가 생각하는 시적인 것이라는 판단 역시 주관적이지 않냐’라고 따질 법도 하다. 맞다. 그러니까 나도 우긴다는 마음으로, 아 그래도 이 정도면 보편적으로 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아?'라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할 때 시적인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 혹은 풍경이나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걸 보거나 경험하는 사람은 낯선 다른 걸 상상하게 되는 것, 혹은 그런 상태의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낯선 다른 것이 ‘아무거나’를 의미하진 않는다. 애초에 이야기하려고 했던 그 대상이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어떤 내면과 맞닿는 것이어야 한다. 설명이 어렵다. 마침 서울 삼청로 피케이엠(PKM) 갤러리에서 구현모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보면 ‘시적이다’라는 게 뭔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이질적인 것이 결합하여 있거나, 그것들이 섞여서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작품 안에 어떤 맥락이 담겨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거나’ 상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작품 내부에 생각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그 씨앗이 이 작품들을 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시도 미술 작품도, 대상 너머의 어떤 것을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지위를 획득한다.
전시명은 <구현모: 후천적 자연>이다. 작품들은 모호한 생각의 덩어리를 형상화해 놓은 것 같다. 자연의 일부가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일부와 결합된, 마치 그렇게 보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자연이 후천적일 수 있는가, 없다면 그것은 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씨앗’은 생각을 이끈다. 대부분의 사람은 구체적인 걸 보고 싶어 한다. 이해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나름의 생각을 나름의 방식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다. 시적인 것이 외면받는 시대에 시적인 것이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전시는 8월3일까지 열린다.
이우성(시인·미남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