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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이별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남긴 문장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8. 8. 18:15

세상과 이별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남긴 문장들

등록 :2018-08-08 14:59수정 :2018-08-08 15:51

 

한겨레 칼럼으로 다시 읽는 황현산 교수의 문장 11꼭지


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시를 한국에 소개한 번역가, 등단하지 않고 평론을 발표했던 문학평론가, 젊은 문인들의 ‘팬덤’을 형성했던 불문학자. 8일 세상을 떠난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대중은 어쩌면 그의 칼럼을 가장 많이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여러 칼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독자들과 나눴고, 2013년 펴낸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로 깊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황 교수는 <한겨레>에서 2009년 5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삶의 창’ 칼럼을, 2016년 7월부터 2017년 8월까지 ‘황현산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에도 그 중 일부 칼럼이 수록됐습니다. “시민으로서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보라 생각한다”, “나는 정치·사회 현실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문인을 경멸한다”고 생전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칼럼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관련 기사 : “현실을 몰라도, 현실을 받아쓰기해도 바보 작가”) 구의역 사고, 여성혐오, 문단 내 성폭력,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교육현장부터 일본군 위안부, 정치와 선거 이슈에 이르기까지 그의 통찰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칼럼을 통해 그를 다시 한 번 기억해봅니다.

■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구의역의 수리공을 진실로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닌지 자문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그 생각을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은 제 생각을 버선목처럼 까 보일 수 없다. 그 사람들과 나향욱들은 끝내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충격적이다.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황현산 칼럼] 간접화의 세계

■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발표한 것은 1949년이다.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이제는 상식적이 되어버린 저 유명한 말을 했다. 여성을 ‘여성답게’ 살도록 유도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자연 질서이기보다 사회의 제도이고 관습이고 교육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황현산 칼럼]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다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거나 봉사하지 않기에, 그 윤리의 뿌리와 현재적 의의를 성찰하는 여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며 생생하게 윤리적이다. 윤리적 탈선이 권력의 위계에 이른다면 거기에서는 윤리의 뿌리도 그 생생함도 찾을 수 없다.”

“등단제도는 신인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독자의 관심을 모아주는 제도이지만 한편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재능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 능력의 발휘를 막아버리는 제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늘 공평한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의 식민화 시도도, 등단·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등단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이다.”

[황현산 칼럼]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 한국의 소녀상이 중국, 일본, 베트남 소녀상일 때

“한국의 남자들도 이 죄악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는 동안 저질렀던 이런저런 만행들을 우리는 이미 모르지 않는다. 어느 글에서도 썼던 이야기지만 한국의 문인들이 월남전 참전을 사과하기 위해 베트남 문인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이긴 전쟁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는 태도였지만, 그들만 해도 권력자들이다. 당시 처절하게 파괴되었던 마을 민간인들의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마음이 그들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한국의 소녀상이 중국 소녀상, 일본 소녀상, 베트남 소녀상이기도 할 때, 그 소녀상은 아베 같은 인간들이 돈다발 따위를 들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높이와 넓이를 얻을 것이다. 한국 소녀에게 참으로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만국의 소녀들에게도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다.”

“경남 진주의 활동가들이 진주 교육지원청 뜰에 세운 진주평화기림상을 나는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그 소녀상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소녀상보다도 아름답다. 한 시대의 불행을 딛고 우뚝 서 있는 소녀는 벌써 희생자 이상의 어떤 존재다. 인류의 죄악을 알고 있고 자신의 불행과 함께 모든 여성의 불행을 알고 있기에 그의 표정은 단단하다. 그는 한국 소녀이면서 벌써 한국 소녀가 아니다. 그는 어두운 광장을 온기 약한 촛불로 밝혔던 역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중국 소녀가 되고 일본 소녀가 되고 베트남 소녀가 된다. 지극히 가녀린 촛불로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민주주의만이 만국의 민주주의가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현산 칼럼] 소녀상과 만국의 소녀들

■ 투표는 역사적 무의식이자 그 거울이다

“내 주변에는 젊은 날에 혁명투사였으며 지금도 사실상 혁명투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대선에서건 총선에서건 투표 같은 것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거대한 혁명이 투표 행위로 줄어든 것이 한심해서일까. 불타버린 노적가리에서 타다 남은 낟알이나 줍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그 친구들 옆에서 투표는 역사의 무의식 만들기라고 자주 되풀이 말하곤 한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못했을 때, 이를테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나는 내가 죽인 난초 분들을 생각한다. 이 나라는 내 나라지만 내 의식과 같은 나라는 아니다. 이 나라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어떤 역사를 살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 역사의 의지와 같은 의지를 지닌 것이 아니다. 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사의 무의식과 같다. 그 무의식이 늘 투표를 통해 나타나니 어쩌면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투표가 ‘어느 세월에’라고 한탄하게 하는 영원히 가망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꽃 피는 난초 분들이 있고, 잘 자란 아이들이 있다. 마침내 깨어지는 벽이 있다. 그래서 투표는 역사적 무의식이자 그 거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는 저 역사적 무의식의 세포를 바꾼다. 확실하다.”

[황현산 칼럼] 투표의 무의식

■ 선의를 얻기는 쉽지만 쇄신은 어렵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늘 실권을 장악하여 왔다. 권력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그 남성적 세계의 외부를 대상화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화된 세계가 이번에는 남자만의 세계를 승인하고 만다. 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여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 수동적 존재들을 통해서 남성적 세계의 적극성이 확인된다는 말인데, 남자다운 세계는 남자답지 않은 세계를 끝없이 생산할 때만 존속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 바로 남자다운 세계의 아이러니가 있다.”

“남자의 서사가 손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남자들의 행동거지가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벌써 풍속의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풍속이 만들어주고 승인해주는 남자들의 습관은 자주 남자들의 생리나 본성과 혼동되기 때문에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의 효과는 없다. 생리와 본성을 어떻게 철저하게 반성할 수 있겠는가. 남자들의 권력행사가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는 것은 그 권력의 힘이 일상의 미세한 틈에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풍속에서 빠져나와 그 풍속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그의 삶과 의식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일이다. 흔히 말하듯 개혁은 죽음이자 동시에 부활이다. 선의를 얻기는 쉽지만 쇄신은 어렵다. 죽음은 어느 경우에나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살아서는 은유로만 체험된다. 안경환씨의 책에서 보게 되는 이상한 비관주의, ‘남자는 이렇게 생겨먹었다’로 표현되는 비관주의는 이 실천해야 할 쇄신 앞에서의 망설임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황현산 칼럼] 풍속에 관해 글쓰기

■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삶의 창]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 과거도 착취당한다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삶의 창] 과거도 착취당한다

■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이 참사가 잊히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주검이 땅에 묻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아파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삶의 창]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삶의 창] 승리의 서사

■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가장 덜 비천할 것 같은 대학에 관해 이야기하자. 요즘 대학의 거의 모든 총장들이 시이오(CEO) 총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교육도 학문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 학교 경영을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영이 교육과 학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교육과 학문이 학교 경영을 위한 수단이 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학교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기초학문 분야의 학과들을 폐지하고 있는 대학이 벌써 여럿이며,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저술활동은 그만두고 학교 평가에서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논문을 양산하라고 교수들을 다그치는 대학도 벌써 여럿이다. 어느 대학은 경영 전문가를 불러 도서관의 경영평가를 하였더니, 열람실의 일부를 카페로 바꾸라는 진단이 나왔다는 소문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실정이 이러하니 한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된 사람이 남의 논문을 표절하여 학위를 얻었다는 혐의에 명쾌한 대답을 못하는 것도, 전문가들의 판단과 학계 안팎의 질타에도 아랑곳없이 그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도 크게 개탄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을 말한다면, 표절이 명백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준 대학이 학위를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학이 아닐 것이며, 그 사람이 계속 교수로 남아 있는 대학도 대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나라를 상상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럽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삶의 창] 논문표절과 이 비천한 삶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56741.html?_fr=mt2#csidx6b15d508711bbd2b06160da73f95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