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은 여수 광무동에서 자취를 할 때였다. 포항제철에 다니다가 회사를 GS칼텍스로 옮기고 보니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집이 여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광무동 달동네의 사글세방이었습니다.
열 달에 보증금 80만 원이었던 집. 연탄 아궁이가 있는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가 딸린 집이었다. 워낙 산꼭대기에 있다 보니 우리 집 뒤로는 달랑 두세 채의 집이 있을 뿐이었고, 그 집을 지나면 바로 장군산 정상이 가까이 있었다.
많은 집들 중에서 내가 굳이 달빛이 가장 빨리 닿는다는 광무동 달동네의 꼭대기로 올라간 까닭은 창문만 열면 여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산정상이 가까워 날마다 산에 오르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쉬는 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바람이 불었고 집 뒤의 미루나무에서 까치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신호에 맞춰 창문 너머 골목길에는 우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뽀얀 웃음소리가 날마다 들렸다.
거기에 사는 아이들 대부분은 내 어렸을 때하고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이었다. 코를 흘리고, 연탄재로 놀이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깡통 차기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다고 날마다 외치는 아이들이었다.
엄마 아빠는 늘 바쁘고, 집에는 아무도 없거나 할머니만 계시는 아이들, 그래서 늦은 밤까지 가로등 아래서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이 불만이기보다는 그 삶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 중에는 커서 배를 타는 것이 꿈인 아이들도 많았다. 그곳 동네에는 아버지가 선원인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드물었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면 잘하는 축에 들어갔다.
하긴, 그러한 환경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가난해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집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부모가 가진 자본의 크기에 따라 아이의 꿈의 크기와 아이의 미래까지도 결정되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집보다 더 넓은 꿈을 가진 아이도 줄었고, 자신이 사는 집보다 더 거창한 꿈을 가진 아이도 줄었다.
이렇게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의 크기가 아이의 꿈의 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고 그저 오손도손 사는 것이 아이의 소원인 아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난은 어른의 가난과 차원이 다르다. 아이들의 가난은 아이 자신의 노력이나 운명과는 무관하게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난보다 훨씬 더 아프고 슬프고 가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