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무엇이 보이느냐[너무 자주 일어나는 이적은 신앙을 약하게한다]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2. 18:01

100314 무엇이 보이느냐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3-23

성경본문

21.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8:22-26)

 

제가 서울 압구정에 살 때 자주 지나다니는 길가에 안경점이 있었습니다. 거기 쇼윈도에 이런 글귀가 붙었어요.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 장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원초적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것도 한없이 답답하겠지만 보지 못한다, 그 고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많은 장애인들을 고치셨어요. 시각장애인도 많이 고치셨어요.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이야기, 또 실로암 연못가에 사람을 보내서 눈을 뜨게 하신 이야기, 바디매오라고 하는 사람의 눈을 고치신 이야기가 잇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많은 장애인들을 고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사역이 있었어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너무나 많은 환자들이 있었을 테니까. 병을 고치신 것도 그들이 불쌍해서 고치시기도 했습니다마는 또 많은 경우에 그러한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주목하도록,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도록 하는데 있었어요. 단순히 놀라운 이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방편으로써 표적으로써 이적을 사용하셨다는 거죠.

예수님이 고치신 환자가 많이 있겠습니다마는 그 중에 몇 가지만 묶어 여기 성경에 기록하고 있어요. 고치신 이야기를 다 기록한 게 아니죠. 일부만 발췌해서 기록하고 있다면 그 이야기를 여기에 기록하는 의도가 있겠죠. 그 의도가 중요해요.

제가 몇 년 전에 백내장 수술을 했어요. 수술이랄 것도 없겠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10분 동안 잠깐 칼을 댄 것이지만 그 수술을 하고 하루 만에 안대를 걷어내니까 완전히 바뀌어지더라고요. 완전히 사람들이 달라 보여요. 어느 정도냐 하면 여러분의 피부가 살아서 숨쉬는 게 보였다니까요. 제가 그 정도였으니 만약에 눈이 닫혔던 사람이 눈을 여는 순간에 보여지는 세상과 그로 인한 변화와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더 무서운 게 있어요. 그 감동이 한 달을 못 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다 보여서 너무 신기했어요. 예전에 내가 이걸 모르고 살았구나. 그랬는데 한 달쯤 지나니까 새 눈이 벌써 적응이 돼가지고 이제는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아요. 너무 평범해 보여요. 여러분의 피부가 더 이상은 살아 움직이지 않아요.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가지고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기 쉬어요. 분명히 내게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해요. 감정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그래요. 하나님이 너는 나의 아들이다 약속하셨으므로 내가 아들이 된 것이지 내가 불을 받아가지고 아들이 된 게 아니에요. 어느 종교나 그 정도의 체험은 있는 거예요. 밥 안 먹고 굶고 버티면 뭔가 보이는 법이에요. 거기에 내 신앙의 기초를 놓으려 하지 마세요. 그건 유혹이에요.

벳새다 소경을 치유하는데 몇 가지 특징이 보여요. 첫째는, 은밀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아와서, “예수님, 여기 이렇게 앞 못 보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럴 때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을 때 좀 보란듯이 말씀으로 눈을 떠라이렇게 하셔도 될 만한데 그렇게 안 하셨어요. 그 사람의 손을 붙들고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어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외에는 사람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셨어요.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무리를 떠나사그랬어요. 따라오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제쳐놓고 이 사람만 마을 밖으로 조용히 사람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치셨다고요.

또 더 놀라운 것은 고침 받은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랬겠어요. 이걸 어떻게 입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데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왜 그러냐. 초기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적을 행하기도 하셨어요. ? 사람들로 하여금 옛님을 주목하고 말씀을 듣게 하려고. 그랬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눈을 떴다는 데만 있어요. 말씀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에요. 오히려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렸어요.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분이 아니냐. 이분이 바로 다윗의 후손이고,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고, 로마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이분을 왕으로 모시자.

예수님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막 전개되는 거예요. 그 바람에 헤롯과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주목하게 됐어요. 예수님의 사역을 그르치게 됐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역 후반기에 이적을 행하실 때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행하실 수도 있었지만, 또 행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은밀하게 하셨다는 말이에요.

왜 그랬느냐?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그 뜻을 올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도록, 이런 경우에 표적이라고 그래요. 그저 놀라운 일이 아니고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어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이적을 보이시고 말씀을 전하신 다음에 꼭 확인 하는 게 있어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조심하라. 너희의 신앙을 빗나가게 하는 유혹이 있으니 그것은 두 가지다. 그것을 조심하라.’

첫째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두 번째는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누룩이라는 것은 빵에다 넣는 효모잖아요. 빵을 부풀게 하는 거잖아요. 여기서 누룩이라는 것은 잘못된 교훈을 말해요.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잘못된 거 자꾸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예요. 잘못된 교훈을 조심하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는 것은 율법주의를 말하는 거예요. 헤롯의 누룩이라는 건 헤롯왕을 따라간 사람들, 철저하게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따라간 사람들의 세속주의를 말하는 거예요.

교회생활에 충실한 분들이 주의할 것은 율법주의에요. ‘나 만큼만 믿어라이거예요. 그것만큼 잘못된 것 없어요. 교회는 나오지만 세상에 더 끌리는 분들에게는 세속주의가 위험요소죠. ‘신앙이라는 거 다 그런 거지 뭘 그래.’ 자기의 유익을 좇아서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게 아니라 내 필요를 순간마다 채워주시는 분이에요. 우상이에요. 우상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욕심을 형상화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비는 거예요. 당신이 누군지 그건 관심이 없고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면 누구든지 OK하는 거예요. 그게 우상이요, 미신이요, 세속주의죠.

TV 뉴스 보도에 보니까 이 광활한 우주공간이 맨 눈으로는 그냥 컴컴하게 보이지만 그건 눈이 어두워서 그런 거지 알고 보면 말할 수 없이 많은 별들로 꽉 차있어요. 어제 그 뉴스를 보면서 제 마음에 그랬어요. ‘어휴, 하나님 그만 하세요. 나의 이 좁은 머리로 이 어마어마한 우주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지금 만들어 놓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충분히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사오니 더 이상 복잡한 것을 안 보여주셔도 됩니다.’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 그거 이해하려면 얼마나 머리 아파요. 정말 너무 머리 아파요. 날마다 이적이에요.

어젯밤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났어요. 늘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잠자는 사이에도 세상 떠나는 분들 많아요. 내 능력 내 의지, 내 도덕, 내 고결함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생명 주신 것이 아니에요. 은총이에요. 은총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한 거예요. 은밀한 이적의 비밀을 알아야 해요. 글을 읽다 보니까 이런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이적은 신앙을 약하게 한다.’ 너무 신기하고 새로운 것만 보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이적이라고 하는 것을 눈을 열어봐야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벳새다 소경 이야기를 보면 치유방법이 좀 달라요. 예수님이 그 사람 눈에다 침을 뱉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여러분 그 영화 보셨어요? 추리극을 너무나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할만한 영화가 하나 있어요. <어두워질 때까지> ‘오드리 헵번이라고 인형 같은 여배우 있잖아요. 멜로드라마에 잘 나오는 그 사람이 모처럼 딱 한번 출연한 영화예요. 그런데 시각장애인이에요. 아파트 반 지하 좁은 공간에 남편과 단 둘이 살아요. 그런데 거기에 살인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이 들어와요. 그 두 시간 영화에 긴장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아파트 반 지하라는 좁은 공간, 더 답답한 건 주인공이 눈이 멀었다는 것. 그를 에워싸고 있는 긴장감.

그 영화를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뭐냐면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예민한 감각이 순간순간 튀어나와요. 그걸 볼 때마다 , 저 사람들은 정말 그렇겠구나.’ 더 예민한 거예요.

예수님이 눈을 고치신다고 데려가서는 조용한 곳에서 뭘 하시나 했더니 눈에 침을 뱉어요. 기분 나쁘게. ‘내 눈은 눈 아니야. 안 보인다고 이렇게 침 뱉어도 되는 거야?’ 얼마나 예민하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할 때, 대부분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생각과 달라요. 그래서 혼란이 오는 거예요.

어떤 의대 교수 연구실에 친구가 찾아왔어요. 친구에게 하나의 사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뇌파를 찍은 사진 두 개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대칭을 이루며 예쁘게 돌아가는 파동의 그림이에요. 그런데 또 하나는 좀 파동이 복잡해요. 혼란스럽기까지 해요. 친구에게 묻습니다. ‘이게 사람의 뇌파를 찍은 사진인데 자네라면 어떤 뇌파가 좋겠나?’ ‘, 그야 당연히 예쁘게 돌아가는 뇌파가 좋겠지.’ ‘틀렸네. 이건 간질병 환자의 뇌파라네.’ 정상인의 뇌파는 막 불규칙해요. 혼란스러워요.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맹하니 쳇바퀴 돌 듯 그렇습니까? 얼마나 복잡합니까. 정상인의 모습이에요.

임신을 하면 입덧을 심하게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하지만 여러분, 그거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새 생명을 품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에요. 그게 있음으로 인해서 곧 아기를 얻게 되는 거죠.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요로결석 있잖아요. 얼마나 아파요. 여자 출산 못지않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비교가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주 죽는대요. 돌이 움직이면 아주 아파 죽는대요. 그런데 의사가 말하기를 그거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여야 나오니까요. 움직인다는 게 좋은 거예요.’ 움직이면 칼을 대는 것 같이 너무 아프고 괴롭죠. ‘그건 아플수록 좋은 거예요.’ 생각을 바꿔야 돼요.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위하여 일하셔요. 내 생각대로 해달라고 요청할 때 혼란이 오고 갈등이 오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께 맡기세요. 평소에는 말씀으로 하시는 분이 오늘은 왜 또 이렇게 남의 눈에 침까지 뱉으실까,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나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예요. 이사야 55 8절에서 9절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른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과 내 길은 너희보다 높다.’ 믿음이라는 건 다른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 그렇게 하십시오, 내 주장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오늘 벳새다 소경을 고치시는 이야기 중에 또 하나의 재미있는 특징은 두 번 기도하셨어요. 침까지 뱉으면서 안수기도했는데 눈을 열어보라 하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었더니, ‘뭔가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뭇가지 같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두 번 기도해서 고쳤다는 예는 유일한 거예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셨나요? 뭔가 불완전한 것인가요? 아니요. 여러분, 여기에는 더 큰 의미가 있어요. 지금 어떤 상황 속에서 이 이야기를 싣고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 돼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다음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로 데려갔습니다. ‘가이샤라라고 하는 것은 시저라는 말이잖아요. 빌립이라는 로마 황제를 위해서 지은 도시예요. 유대의 계획도시예요. 신도시예요. 전차경주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둔 로마식, 헬라식의 신도시예요. 일부러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그리고 물으셔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말하죠. ‘사람들이 주민을 세례 요한, 엘리야, 구약의 어떤 선지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여론에 휘둘려요. 그런 실험이 있잖아요. 횡단보도 있는 데서 한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조사를 했는데, 혼자 아무리 목이 부러지도록 쳐다봐야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아요. 다 그냥 지나가요. 신호등 따라 바쁘게 움직여요.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해보도록 했어요. 두 사람이 쳐다봐도 요즘 한국사람은 바쁜지 그냥 다 지나가요. 그런데 이상하죠. 세 사람이 쳐다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다들 올려다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셋부터 변화가 일어나요. 통계적으로, 세 사람만 목소리를 모아서 이것이다 라고 얘기하면 주관 없는 사람들은 다 거기에 끌려가는 거예요.

에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례 요한이랍니다. 엘리야랍니다.’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거죠. 틀렸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물어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두 번째 물으셨어요. 오늘 벳새다 소경을 두 번에 걸쳐서 고치셨어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니 베드로, 안드레, 빌립, 예수님 제자들의 대부분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고 벳새다는 갈릴리의 큰 동네예요. 베드로가 벳새다 사람이에요. 벳새다 소경을 고치신다 라는 표현에 담겨있는 의미는 벳새다 사람인 너희들도 눈 떠야 된다 이거예요. 너희들도 내가 누군지 분명히 알아야 된다 라는 것을 이러한 이적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무엇이 보이느냐?’ 참 번역을 잘 했어요. 이게 말이에요, 헬라어나 영어로 말하면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말로는 무엇이 보이느냐?’ 로 번역했어요. 하나는 아주 능동적이고 서구식 방식이에요.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런데 번역은 아주 우리 문화에 딱 맞게 했어요. 우리는 동양적 방식이에요. 수동적 표현을 많이 써요. ‘무엇이 보이느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날마다 보는 것이 뭡니까? 돈만 보이는 사람, 그건 돈이 주인이죠. 돈만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 인생의 주인은 돈이죠. 물어볼 것도 없어요.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사람, 그 인생의 주인은 자식이에요.

예수님이 안수하며 눈을 열어라 그랬더니, 성경에 재미있는 표현을 썼어요. 이 소경이 우러러 본다’, 쳐다본다. 그랬더니 뭔가 사람들이 지나자는데 나뭇가지 같은 게 보였다. 다시 안수하고 다시 보게 했어요. 이렇게 생각해요. 소경이 생전 처음으로 눈을 여는 순간, 자기가 본다고 하기 보다는 뭔가 눈이 열려지면서 내 눈 앞에 보여지는 것들, 뭔가 움직이는 게 보이고 나무 같은 게 보이고 사람의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다시 눈을 감았다가 예수님이 안수하시고 눈을 열게 됐을 때 이제는 의지를 가지고 주목하고 보는 거죠. ‘뚫어지게보는 거죠. 아까 보였던 게 정말 무엇일까? 보는 것이죠. 처음에는 우러러봐요. 그 다음에는 아주 뚫어지게 주목하여 본다고 했어요. 드디어 마지막에 다 고쳐져서 밝히 보게되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 되는 거예요.

대니얼 고트립이라고 하느 정신의학 전문의사, 심리학자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마음에게 말 걸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30대 초반의 아주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였어요. 특별히 중독전문 치료사였어요. 그런데 교통사고가 났어요. 목이 부러졌어요. 척추를 다쳤어요. 전신마비가 됐어요. 잘 나가던 의사가 30대 초반에 한 순간의 교통사고로 모든 게 다 무너졌어요. 충격 받아 슬퍼하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분노하고, 그 다음에는 고통에 빠지게 돼요.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자기가 환자가 되고 또 의사가 되어서 자기를 관찰하고 자기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게 돼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과 자기 안에 일어나는 상관관계를 이제까지 책으로 학문으로 공부했던 것을 자기의 감각으로 부딪힘으로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안이 큰 문제로구나. 자기를 만나러 오는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해서 사람을 건드릴까 봐 불안해해요. 말을 조심하려고 해요. 눈을 맞추지 못해요. 마음을 열지 못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자기도 마음이 닫혀요. 불안은 전염되는 거예요.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고 다가와서 자기 얘기를 해요. 그럴 때는 자기도 마음 문이 열리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불안을 느끼면서도 용기 있게 자기 불안을 얘기해요. 그럴 때는 놀랍게도 환자인 자기가 상대방의 불안을 동정하게 되고 안타까워하면서 오히려 끌어안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는 부질없는 희망이 아니라 오늘 내게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면서 나가게 돼요. 진지한 물음이 시작돼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분이 벌써 60이 넘었어요. 그분의 글에 이렇게 말합니다. ‘30년 전 목이 부러지는 순간 내 영혼은 비로소 숨쉬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나를 찾기 시작하고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나는 삶을 택했고 그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을 사랑하게 되었고 행복도 맛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 인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친구에게 아주 유머러스 하게 이야기했어요. “내 장례식 때 자네가 내 유언을 꼭 사람들에게 전해주게. 나도 여러분과 같이 저 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에 부딪혔을 때 너무나 열 받았습니다.’ 비록 장애 안에 갇혀 있지만 나도 내 삶을 사랑하고 행복을 맛보았노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과연 숨쉬고 있습니까? 고통에 부딪힐 때 우리는 껍데기를 다 벗게 되고 눈을 열어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요. 여러분,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묻고 또 나 자신에게는 무엇이라고 말을 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눈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거예요. 무엇이 보이느냐? 다시 바꿔서 말하면 너는 네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보고 있느냐? 그것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