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내 이름으로 축복하라[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평강은 없어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4. 08:52

091101 내 이름으로 축복하라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2-10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 6:22-27)

 

자카르타에 식당이 많이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주로 애용하는 단골식당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단골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그 말은 단골무당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옛날에는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늘 고정적으로 부르는 무당을 단골이라고 불렀던 거죠. 알고 보면 이 단어의 유래는 굉장히 역사가 깊습니다.

우리나라 고대사에 단군시대를 얘기합니다만 사실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사회의 지도자를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흔히 단국왕검이라고 표현했는데 단군이라는 말은 무당이라는 말이에요. 종교적인 지도자라는 말이에요. 왕검이라는 말은 정치적 지도자라는 의미예요. 고대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이므로 단국왕검이라는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거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고대문명이 발달했던 애굽이나 바벨론을 보면 벌써 왕이 등장하지만 그 옆에는 종교적인 일을 맡는 제사장들이 있었던 것이죠. 제사장을 두었던 것은 하늘의 변화를 알고 하늘의 일을 알아서 복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우상을 숭배하는데 머무르게 됐던 거죠. 그 역사는 참으로 유구하게 단골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오늘까지 우리 주위에 있는 거죠. 여러 가지 종교를 이야기하지만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을 구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게 어떤 복이냐, 하는 거지요.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 마음의 탐심이 우상숭배다그렇게 얘기해요. 복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 잘못된 마음, 그것이 우상숭배다 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셨기에 우상을 숭배하던 고대사회에 갈대아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창세기 12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어요. 그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너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이 흘러나가게 하겠다.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 너는 나를 따르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나를 따르라.’ 그를 부르시고 그의 한평생을 주장하셨어요. 그때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여러분, 복의 시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아브라함의 삶은 아직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흔들렸지만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고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주일에 한번씩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을 가벼이 생각할 것이 아니에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비록 지난 한 주간 우리가 많은 허물이 있었고 실수가 있었고 잘못된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에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복의 출발이고 복의 핵심이지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자로 따라갈 때 그와 함께 한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 집에 몸을 의지한 사람이 318명이라고 했어요. 그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였어요. 자그마한 왕이었죠. 창세기 20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저는 선지자라그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또 아브라함은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기도 하고 또 소돔 고모라 멸망을 앞두고 있는 저들을 안타까워하며 저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제사장의 역할도 했던 것이죠.

모세시대로 내려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요. 출애굽사건이에요. 광야로 불러내셨어요. 시내산에서 저들을 만나시고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지도자들을 세우셨어요. 모세는 선지자로 세우시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어요. 선지자와 제사장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게 하셨어요. 선지자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백성들의 생활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어요. 말씀이 있어요. 절기를 따라 시간을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어요. 우리가 구약에는 제사라고 표현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와 다른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격이신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점에서 명칭은 같지만 의미는 다른 것이죠.

선지자와 제사장,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두 가지 복을 상징하는 거예요. 하나는 무조건적인 복이에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복이에요.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셨어요. 이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사건이에요. 생명을 주셨어요. 햇빛과 물과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날마다 넉넉하게 주셨어요. 무조건적인 복이에요.

또 하나 조건적인 복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명기 28장에 보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복의 내용들이 기록돼 있어요. 조건적인 복이에요.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는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생명을 비롯해서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복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처음에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사람도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창세기 2 4절부터 다시 한번 창조를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창조의 내용이 재미있어요.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두 가지 전통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두 가지 전통이 있어요. 그 하나가 신명기 신학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신명기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거기에는 우리의 응답과 행위를 강조해요. ‘네가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네가 불순종하면 너의 삶에 고난과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요. 분명 그러하죠. 그러나 그 신명기를 포함해서 창세기부터 온 천지만물에 가득한 복이 있어요. 선인과 악인에게도 똑같이 부어주시는 햇빛과 같은 은총이에요. 무조건적인 복이에요.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선포하라. 너희를 지키시고 너희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선포하라.’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은총이에요. 이런 은혜가 있기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죠.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해수욕장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죽을뻔했던 아가씨가 인공호흡으로 극적으로 살아났어요. 정신을 차린 후 자기를 인공호흡으로 살린 젊은이를 보며 말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죽을뻔했네요.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까 1분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고 그러네요.’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기분이 좋아서 씩씩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보다 먼저 인공호흡을 하려고 매달린 두 사람을 때려눕히느라고 시간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더 일찍 살릴 수 있었을 거예요.’ 그 놈 때문에 이 여자 죽을뻔한 거예요. 사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수많은 위기와 재난 속에서 절묘하게 살아요. 저도 몇 번 고비가 있었어요. 몇 년 전에 메리어트 호텔에서 폭탄테러가 있었잖아요 점심시간에.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그 식당에서 식사약속이 있었거든요. 여러분은 별로 감동이 없으시네요. 제가 죽을뻔했단 말입니다. 사람이 다 이래요. 죽었으면 울 일도 비껴나가면 무감각해요.

제가 신대원 다닐 때였는데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다 보면 522번 버스 종점이 있어요.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요. 저는 신호등 건널 때 한 3초는 기다립니다. 하도 차들이 쌩쌩 달리니까 일부러 3초를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몇 발자국 떼고 난 후에 걸어가요. 그 날도 제가 뭔가 생각을 하면서 신호등 앞에 서 있다가 한 3초 후에 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순간에 덤프트럭이 휙 하고 지나갔어요. 내리막이니까 트럭이 과속으로 내려오다가 신호등 불이 바뀌었지만 급정거를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간 거예요. 아주 코앞에서 휙 하고 지나갔어요. 그날 제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그 감동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아주 등에서 땀이 나더라고요. ‘, 죽고 사는 게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이거로구나.’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우리가 이러고 살아요. 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거예요.

이렇게도 살지만 또 하나 하나님의 얼굴빛을 대할 때 우리는 은혜를 힘입고 마음에 평강을 얻는 거예요. 광야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에서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요즘 제 주위에 한국에 있는 분들 가운데 제 나이 또래로 암에 걸려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가장이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고 땀 흘려야 집안이 운영된 터인데 가장이 오늘 내일 하고 병원에 누워있으니 집안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얼마나 절망이에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살 수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어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깊이 깨닫고 산 사람을 든다면 다윗이에요. 다윗은 왕이었고 그 좌우에 선지자가 있었고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운 세 사람이 있었어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어요. 하나님이 택했다는 의미로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구별했어요. 다윗은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도대체 내가 누구이며 우리 집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주셨습니까.’ 다윗이 생각해보니 양치기 목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너무나 놀라운 은혜였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 거예요. 그러다 생각이 난 거예요. ‘나는 이렇게 궁궐에 있건만 아직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해서 하나님은 장막 안에 계시는구나.’ 그래서 하나님, 내가 성전을 짓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언제 너더러 내 집을 지어달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이 온 천하가 다 내 집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네 기도를 듣고 받아들여서 네 몸에서 나는 아들로 하여금 내 집을 짓도록 하겠노라. 너에게 은총을 부어주겠노라. 너의 중심을 알았으니 너와 네 후손의 왕좌를 영원히 지켜주겠노라.’ 놀라운 약속을 주셨어요. 다윗이 엎드려서 감격하면서 기도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이고 내 집이 무엇이건대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까.’ 다윗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사람만큼 생사의 위기를 겪은 사람이 많지 않아요.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 즉 줄리어스 시이저예요. 그 사람에 관해서 무려 천 페이지를 썼어요. ‘나는 아지고 줄리어스 시이저와 연애하고 있다. 그는 로마가 낳은 가장 멋있는 개인이다. 그 사람의 매력이 뭐냐, 사람들은 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와 사회와 인간을 입체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나이 사십에 갈리아,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있는 게르만족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이 되어서 8년 동안 나가서 싸웁니다. 그 숱한 위기 속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고 돌아와요.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늘 승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잖아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드디어 권력을 장악해요. 자기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것을 뚫어보는 탁월한 개인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줄리어스 시이저도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 못했어요. 가장 믿었던 사람에 의해서 칼에 찔려 죽었어요. 이게 인생이에요.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 내게 이런 숱한 고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지켜주신 것, 이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다윗의 헌신은 하나님께서 이토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깊이 깨달았기에 나오는 거예요. 시편 78 72절에 보면 다윗은 양치기 시절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결국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서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는 성실한 마음, 또 하나는 공교한 손, 그건 재능이죠.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헌신이에요.

교회에서 억지로 일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어요. 사람이 연약하니까 때때로 억지로 일할 수밖에 없지만 늘 그렇다면 그런 비극은 없는 거예요. 눈을 열어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돼요. 다윗이 누렸던 이 복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더 풍성하게 주어졌어요.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해요.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 다 같은 말이에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누가 기름 부음을 받느냐, 왕과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는 말은 예수님은 곧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다 라고 하는 고백이에요. 요한복음 14 6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선지자란 뜻이에요. 죄사함을 얻고 자유케 되는 삶의 진리를 밝혀주는 제사장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생명을 주시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야말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에요.

특별히 신약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에는 죄를 위하여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와서 그 목을 쳐서 피를 하나님 앞에 뿌리고 그것들을 불사르면서 자기 죄를 씻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아 그 피를 흘리심으로 단 한번에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신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게 십자가 사건의 비밀이죠.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이거예요. 이게 은총이에요.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복이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님을 따라간 아브라함에게 예배자로 사는 것이 복이었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복이 시작되는 거예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한국 STX라는 기업이 초호화 유람선을 건조했다는 거예요. 타이타닉호의 다섯 배래요. 모두 만 명이 탈 수 있대요. 그 배의 가격이 1 8천억이래요. 대단한 거예요. 그 안에는 공원을 비롯해서 극장, 쇼핑센터 등 심지어는 암벽등반 코스까지도 있대요. 몇 달 전에 다 예약이 끝났대요. 그런 배를 타고 유람을 하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러나 100년 전에 타이타닉호가 첫 출항을 했을 때에 재난을 만나서 가라앉았어요. 큰 배건 작은 배건 다 풍랑에 뒤집어질 수 있어요. 기업이 크다고 마음 놓을 수 없어요. 요즘 일어나는 위기 속에서는 누구나 다 불안한 거예요. 어떻게 해야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는 거예요.

중국의 유명한 작가였던 임어당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다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그 분이 꿈을 꿨어요. 그 넓은 양자강이 말라 붙었어요. 자기가 탄 배가 바닥에 가라앉아서 돌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빨리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애를 쓰고 수고해도 배가 돌에 걸려서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랴?’ 조금 있더니 비가 막 쏟아지기 시작해요. 강에 물이 차오르면서 배는 떠오르게 됐어요. 바닥에 있던 수많은 돌들을 헤치고 강 위로 떠올라서는 하류로 쏜살같이 내려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에게 평강은 없어요.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하늘보좌 우편에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다고 했는데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다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2 9절에 말씀하시길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이 소유한 백성이다.’ 신학적으로 만인제사장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되셨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제사장의 특권을 주셔서 많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축복하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라.’

100년 전에 스탠리 존스라고 하는 미국인 선교사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인도선교를 잘하신 분으로 선교역사에 기록돼 있어요. 그분이 노년에 병들었어요. 병상에 눕게 됐어요. 그때 입원하면서 간호사에게 부탁을 합니다. ‘내가 한가지 꼭 부탁이 있습니다. 아침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저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스탠리 존스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상에서 일어나십시오. 꼭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얼마나 쑥스러워요. 그런데 얼마나 간절히 부탁하는지 간호사가 그렇게 명령한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말씀대로 일어났어요.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라. ‘내 이름으로 축복하라. 그리하면 내가 복을 주리라.’

어제 음악회를 갔었는데 너무 좋은 노래 구절을 들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런 노래예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제 가슴이 뜨끔했어요.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소원이 없고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죄가 된대요. 여러분, 믿음으로 축복하는 거예요. 그 축복 누구에게 쓸 거예요. 자녀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내 마음에 걸림이 있는 사람에게 기도하고 축복하고. 이게 바로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같이 오늘도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