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죽어서 사는 사람[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지 친구나 손님이 아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2. 09:28

090621 죽어서 사는 사람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1-1

성경본문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19-21)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순신 장군은 볼수록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요 멋있는 리더였다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 우리나라가 아무런 준비가 없어서 그 당시에 보름 만에 서울을 빼앗길 정도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그나마 나라가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그러한 것들을 예견하고 준비해서 일본 수군을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이죠.

기록에 의하면 24번 싸워서 23번을 다 이겼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패했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매 순간 결승전과 같은 싸움이었습니다. 도저히 이순신을 무너뜨릴 수가 없으니까 일본군은 여러 가지 첩보전과 음모로 조선 조정을 뒤흔들어서 이순신으로 하여금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그는 모함을 받아 투옥됩니다. 죽을뻔했습니다마는 하늘이 저를 살려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빈손으로 현장에 내려오는 동안에 그가 그 동안 준비했던 수백 척의 군선과 군량미와 해군기지가 칠천량해전에 패해 다 잃어버립니다. 그가 현장에 왔을 때는 13척의 배밖에 남지 않았어요. 조정에서 명령이 옵니다. 이제 더 이상 수군은 틀렸으니 권율 장군 휘하에 가서 육군으로 싸워라. 그때 그가 말합니다. ‘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수군으로서 승산이 있습니다. 내가 이곳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마지막 결정적 싸움을 명량이라고 하는 곳에서 싸우기로 작정을 합니다. 순 우리말로 하면 울돌목이죠. 해협이 너무 좁아 급류가 흐르는 곳이어서 물소리가 큰 까닭에 명량이라고 했던 거죠.

기록에 의하면 13척의 배로 왜 수군 133척과 싸워서 승리합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1597 9 15, 이순신의 나이 53살이었을 때 그가 모든 장수와 사병들에게 명량해전을 앞두고 격려하고 권고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기로 각오하고 싸우면 이긴다. 그러나 필생즉사必生卽死,’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이 좁은 길목에서는 한 사람만으로도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다. 이렇게 장수와 사병을 독려하고 얼마나 자기도 죽음을 각오하고 보낸 밤이었던지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줬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결국은 그 전투에서 승리하죠. 결정적으로 왜 수군이 패하죠. 그 다음부터 왜군은 더 이상 이순신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기회를 엿보아 도망가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마태복음 16 25절에 딱 이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게 언제 하신 말씀이냐? 마태복음 16장이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레미야나 엘리야나 세례 요한이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아비도 아니고 어떤 선생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 놀라운 비밀을 오늘 이 시간 너에게 보여주셨구나.’

, 올바로 주님을 고백했다면 이제 그 주님을 향하여 너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아라. 진정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섬겨라.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시에 대해 공부해보셨지요? 이런 문학적 표현은 잘 새겨서 들어야 해요. 이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누구냐?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서 꺼내놓은 말씀이 오늘 갈라디아서 2 20절의 말씀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로 판별이 돼요. 왜 예수 믿는다면서 감격이 없습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는데 왜 느낌조차도 없습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하는 분이 있어요. 또 예수님을 친구로 대하는 분이 있어요. 또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대하는 분이 있어요.

손님으로 대한다. 제가 자카르타에 오기 전에 캐나다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할 뜻이 있다면서 한번 만나자고 그랬어요. 우리 부부가 갔습니다. 한 열흘 머물면서 두루 교회식구들을 만나서 얘기도 나눠보고 교회이야기도 듣고 또 제 이야기도 드리고 했어요. 목사님이 얼마나 꼼꼼하신 분인지 제가 오판하지 않도록 안내를 해주시더라고요. 손님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목사님 입술이 터졌어요. 저를 대접하다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저도 불편하고요. 호텔에서 자고 밥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어느 날 목사님은 하루 쉬기로 하고 사모님이 저희를 안내해주셨는데, 그 날 나이아가라 폭포를 안내해주셨어요. 차로 토론토에서 한참 가더라고요. 다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전망탑 꼭대기에 올라가니 식당이 있어요. 스테이크를 먹는데 사모님이 우스개로 이런 말씀을 하셔요. ‘목사님, 여기는 얼마나 손님이 많이 오는지 어쩔 수 없이 손님을 세 등급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3등급은 어떤 손님이야? 차로 모시고 와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쓱 보여드리고 그대로 집에 가면 그게 3등급이에요. 그럼 2등급은 뭐냐?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한 다음에 그 아래 배를 타고 폭포 아래 물 떨어지는 데까지 한 바퀴 돌면 그게 2등급이에요. 1등급은 뭐냐? 폭포 구경하고 배타고 돈 다음에 전망대에 와서 밥 먹으면 1등급이에요. 너무 손님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지요. 너무 감사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 말 아세요? ‘손님과 생선은 사흘이면 냄새가 난다.’ 남의 집에 놀러 오신 분이 계시다면 사흘 안에 딱 돌아가시는 거예요. 냄새나요. 괴롭고 불편해요. 그래서 저는 사흘 이상 머무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소 닭 보듯 합니다.’ 있나 보다. 자나 보다. 가나 보다. 그냥 그런 게 제일 나아요. 서로 편안해요. 일일이 대접하려 하면 나도 피곤하고 그분도 피곤하고. 그래서 친구들이 오면 아예 미리 얘기합니다. 당신 집 같이 생각해라. 나도 피곤하면 내 방에 들어가 잘 테니까 대신에 당신들도 밥 먹으려면 밥 먹고, 자려면 자고, 또 얘기하다가 같이 나가자 하면 나가고, 편하게 지내자. 이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손님이기를 원하지 않으셔요. 또 친구이기도 원하지 않으셔요. 예를 들어서 내가 이명박 대통령하고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사람들 만날 때마다 내가 동창이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그를 만났는데, 대통령이 반갑다고 하면서 이 사람이 내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맞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내가 대통령하고 초등학교 동창이었다고 얘기하면 그건 좀 어색하지 않아요? 남은 떡 줄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마시는 꼴이잖아요. 그건 에티켓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친구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예수님 보고 예수님은 나의 친구다.’ 함부로 할 말이 아니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에요. 주인이시라고요. 여러분,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혼잔치가 벌어졌어요.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집에 초대 받아서 갔어요.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결혼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이 얼마나 낭패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만 고민하고 있지 예수님께 묻지 않는단 말이에요. 손님이니까. 예수님을 손님으로 두는 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아요.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눈치채고 그 모든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와서 지금 사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 전권을 맡깁니다. 하인에게 말하기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에 그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해서 맹물밖에 없는 집에 다시 향기로운 포도주가 공급된단 말이에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에만 맹물 같은 우리의 인생이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어요.

간혹 우리가 서로 간에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기도 해요. “아휴, 저 사람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그런 말도 하지 말아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분석은 올바로 했을는지 몰라요. 그러나 신앙은 분석하는 데서 그치면 나도 그 사람과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이에요. 저 사람이 아직도 비판하고 있다는 말은 그 책임의 일부분은 나에게 있어요.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교회에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거예요. 이건 똑똑한 게 아니에요.

또 하나 좋은 예가 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제자들을 만나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부였던 제자들이 갈릴리에 돌아가서 고기 잡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에 나오잖아요. 주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셨어요. 베드로를 비롯해서 밤새 그들이 애쓰고 힘썼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동터오는 아침에야 주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됐어요. 주님이 명령하셔요. ‘저 깊은 곳으로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 피곤하지만 그물을 던졌을 때 153마리의 고기를 낚았다 그러잖아요. ‘모나미 153이라는 게 주님 말씀대로 기업을 운영해서 응답을 받겠다, 그 고백으로 153이라고 하는 암호를 딱 넣은 거잖아요.

참 희한해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이적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에요. 그런데 밤새도록 수고하면서도, 고기를 잡으려고 애쓰면서도 응답을 얻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뭐냐. 그게 자아라는 거예요.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하고 싶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이죠. 여자 분들은 남자 분들보다 더 지혜로워야 돼요. 남편들이 아내의 조언을 잘 안 듣거든요. 남자 분들의 속성을 이해해야 돼요. 첫째, 남자 분들은 공인된 권위자의 조언만 듣거든요. 사사로이 옆에 있는 사람들 얘기는 잘 안 듣게 되어있어요. 더구나 아내의 얘기는 잘 안 듣게 되어있어요. 두 번째, 그것도 내가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먼저 도와주시오할 때에만 가능해요. 남자들의 자존심이에요. 이것을 잘 파악하면서 도와야 되는 거잖아요.

왜 자아를 내세우는가. 왜 그런지 아세요? 무지하기 때문이에요. 사사기의 결론이 뭡니까. ‘당시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어요? 하나님을 떠나 사는 불신앙의 사회였다. 그런 말이에요. 빌립보서를 보면 빌립보 교회의 여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와요. 빌립보 4 2절에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자 두 분이에요. 싸우지 마라 그랬어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교회의 싸움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면서 서로 방식이 다를 수 있는데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 내가 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또 말은 바르게 했습니다만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어요. 내가 저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명분에 딱 맞는 말을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건 악한 거예요. 저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고, 저가 깨닫지 못할 때에 은밀히 도와주라고 했지, 말을 가지고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악한 것이죠. 율법에 비추어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어요. 우리의 복잡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세요. 얼마나 거짓돼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감정의 기복을 보세요. 얼마나 자기 멋대로예요. 이러한 것들을 인정해야 돼요. 더구나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 생각, 과연 어떻습니까? 이사야 55 8-9절에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른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다르다. 흔히 소신을 얘기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소신을 내세우는 것은 죄예요. 시간과 공간과 몸과 자기 경험의 한계 속에 갇혀있는 우리가 함부로 소신을 이야기하는 것, 그건 죄라고요.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가 죽지 않을수록 내 인생에는 손해라는 걸 알아야 돼요.

이번에 월드컵에 남북한이 동반 진출하게 됐어요. 북한이 44년 만에 나가잖아요. 북한 선수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통곡을 하더군요. 박지성 선수한테 너무 고맙다고. 남한이 이란을 무승부로 붙들었으니 그렇게 됐거든요. 이란 팀이 원래 강 팀이에요. 이번에 그 팀에 자중지란이 일어났어요. 이란의 최고 스타와 감독이 불화관계에 있었어요. 감독이 최고 스타를 잘라버렸어요. 그랬더니 이란 축구협회에서 반대로 감독을 해임시켰어요. 이 어지러운 판에 한국하고 맞붙었으니 어떻게 됐겠어요. 그렇게 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내 인생의 감독이에요. 내 인생을 그분께 맡겨야 돼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면 어리석은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아직도 나를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려고 하는데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온전한 승복과 수용이 있어야 되는 거죠.

두 번째는 믿음이에요. 지난번에 신문기사를 보니까 왕년의 수영스타 조오련씨가 50대 후반인데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려고 훈련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조오련도 대마도를 건너려면 오랫동안 훈련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은 미국을 어떻게 갑니까. 아무도 미국 가는 것 걱정하는 분이 없더라고요.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갈까. 당연히 비행기로 갔다 오죠.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믿음을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분이 있어요. 착하게 사는 것, 그걸 믿음이 좋다고 이해하는 분이 있어요.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닌 경우가 더 많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몇 가지 율법을 잘 지켜서 착하게 사는 것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거예요. 성경이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6 6절에 보니까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나의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왜 그랬느냐.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입어 살기 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아요. 내가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자아의 죽음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믿음의 내용은 이거예요. 말 잘 듣고 착하게 산다는 건 두 번째 문제예요.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고 오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 이게 영적 신분이에요.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든 만물이 복종하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만물을 복종케 하는 권세가 있다.

참 오래 전입니다. 제가 서울의 어느 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있을 때에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인데 너무 잘 생겼어요. 얼마나 예의 바른지 몰라요. 나중에 알고 보니 국가대표 사격선수예요. 고등학교 2학년인데 벌써. 그런데 선생님을 통해서 얘기를 들었는데 더 놀라워요. ‘목사님, 저 아이는 3년 전만해도 저런 애가 아니었어요. 중학생 때 그 짧은 성경 공부하는 시간에도 똑바로 앉아 있지 못하고 뒤에서 드러눕는 애였어요.’ 앉아있지를 못했던 애예요. 너무 주위가 산만한 애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쟤가 저렇게 변했습니까?’ 학교에서 까불고 돌아다니다가 그 학교에 사격부가 있었는데 사격 선생님에게 딱 붙들렸어요. ‘너 좀 이리 와봐. 너 총 좀 쏴봐.’ 공부도 안 하던 녀석을 붙들어가지고 총을 쏘게 했는데, 얘가 여기에는 특기가 있었던 거예요. 사격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훈련을 받기 시작했어요. 선수권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인데 국가대표가 된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비행기 타고 세계 선수권대회에 나가는 거예요. 가는 데마다 국가대표예요. 국가대표가 드러누울 수가 없어요. 수많은 외국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뀐 거예요. 나는 국가대표구나. 국가대표에 걸맞은 에티켓, 국가대표에 걸맞은 표현, 또 영어를 부지런히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변했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사고방식이 먼저 변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내가 몸부림치고 애써서 하는 순종이 있어요. 이것은 참다 참다가 나중에 터지게 돼요. 그래서 교회 일할 때도 스스로 참으려고 하는 사람, 여러분 잘 분별하셔야 돼요. 그런 분 잘못 건드렸다가 터지면 수습 못합니다. 또 하나 있어요. 믿음으로 죽는 방법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내 남편을 만나주시고 내 아내를 만나주신다그게 비밀이에요. 여러분, 복된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빌립보서 1장에 보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을 마음 아파합니다.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은 똑같았어요. 사도 바울하고 경쟁하는 선교단체가 있었어요. 다른 교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는 거예요. 이 틈에 우리가 저 팀을 앞설 수 있다. 우리 교회가 더 잘 될 수 있다. 이렇게 못된 마음으로 시기와 투기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을 낸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반응을 보세요. ‘올바른 마음으로 하거나 혹 사람이기에 욕심을 가지고 하거나,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진다면 나는 아무 상관없다. 내가 감옥에 묶여있든지 풀려나든지 또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이게 바로 자기 죽음을 날마다 경험하고 사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