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1-10 “장막 집과 영원한 집”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 죽음에 대한 이해가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먼저 죽음을 소망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자살 충동이 아닙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소망,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3. 그는 그 소망을 두 가지 집을 대비함으로 설명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택하라면 어떤 집을 택하겠습니까?
4. 무너지는 집과 무너지지 않는 집을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슨 갈등이 있겠습니까? 왜
새 집이 있는데 무너질 장막 집을 놓고 슬퍼하겠습니까?
5. 새 집으로 이사할 날짜가 정해진 사람은 손꼽아 새 집에 입주할 날을 기다립니다.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바쁩니다. 게으를 시간이 없습니다.
6. 버릴 것은 버리고 이웃에 주고 떠나야 할 것은 주고 가져가야 할 것만 챙깁니다. 지금은
이삿짐센터에 맡기지만 사실 다 스스로 하던 일입니다.
7. 비록 장막 집과 같은 이 육신의 몸을 떠나는 날짜를 정확히 몰라서 이렇게 엉거주춤 살고 있는 것이지 알면 시간을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8. 버리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만 정리하는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새로 입주할 집에
필요한 것을 장만하는 일이 또 다른 일이자 기쁨입니다.
9. 새로 배치할 가구나 침구류를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 일입니까? 마치 신랑
신부가 새 살림을 장만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겠지요.
10. 당연히 그 삶은 정갈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새 집에 입주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삶입니다.
11. 바울은 이 삶은 또 ‘죽음이 생명에 삼킨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 삶의 본질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12. 이 땅에 잠시 사는 삶이 왜 이토록 소란하고 천박합니까? 죽음에 대한 이해,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를 몰라서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즐겁게 하다 패가망신하는 일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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