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아바, 아버지여[Abba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5. 11:01

091004 아바, 아버지여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1-7

성경본문                                                                                                

 

31.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 14:32-42)

 

 

 

여러분,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뉴스에 의하면 우리 고국의 추석은 모처럼 태풍이나 재해가 없이 풍년으로 모처럼 행복한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전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울한 추석이로구나 생각됩니다. 가까이는 인도네시아 빠당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지진은 페루, 남태평양의 사모아 등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또 엘니뇨 현상으로 중국 남부, 베트남, 필리핀에 대홍수가 일어나는 등, 기상재난이 온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난 10 1, 중국이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전 세계에 드러내었습니다. 30만을 동원해가지고 중국이 어떻게 변모했는가를 보여주는데 무섭더라고요. 중국이 이제까지 숨겨두었던 최신예 무기들을 다 꺼내놓고 세계 제일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뽐내는 것을 볼 때 그 힘을 가지고 온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재난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추석은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간이기도 합니다. 추석에는 종말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우리가 추석을 지킬 때 정확하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지키고 있어요.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농경문화이기 때문에 절기가 일치하고 있어요. 성경에 세 가지 절기가 있지 않습니까?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 우리의 명절하고 일대일 대응이 되요. 유월절은 우리의 설날이에요. 오순절은 우리의 사월초파일이에요. 보리 추수하는 때란 말이에요.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명절로 옷을 바꿔 입은 것뿐이지 농경문화 속에서는 보리 추수할 때에요. 초막절은 벼농사 수확, 쌀을 거두는 것이죠. 초막절은 심판과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서 한 주간 동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데 예배를 드릴 때 읽는 성경본문이 뭐냐 하면 놀랍게도 전도서를 읽어요. 전도서가 뭐예요. 지혜자 중에 지혜자였던 솔로몬의 입을 빌어서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가장 풍성한 것을 나누는 절기에 뜻밖에 네가 거둔 모든 것이 알고 보면 헛된 것이다. 가장 긍정적인 시간에 가장 부정적인 말씀을 던지는 이 역설의 의미는 뭐예요. 자만하지 말라는 거예요.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온전한 상태의 성경적인 신앙을 잃어버리기 쉬운데, 어느 때냐? 풍성할 때 사람은 자만에 빠져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 같이 행세하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이 얘기해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 말라. 조금 손에 쥔 것을 가지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다 아는 것 같이 말하지 말라.

또 재앙이 오고 재난이 오고 고통이 올 때 사람들은 임박한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세속을 떠나서 자기들끼리의 공동체 안에 갇혀서 임박한 종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그러지도 말라는 거예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삶에 고난이 올 때는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이 네게 준 분복分福을 누려라. 네게 준 가정과 기업과 자녀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고 너의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나누고 베풀어주라는 얘기에요. 남모르는 사람에게 나누고 베풀어주라 이것이 흘러흘러 나중에 네 자녀에게로 돌아오리라. 이게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말씀을 통해서 얻는 종말론적 신앙이에요.

그러나 종말론적 신앙의 모범은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어요.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시면서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이시기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분이기에 내일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을 그대로 보이셨죠. 놀라고 슬퍼하셨다. 제자들에게 좀처럼 하지 않던 말씀을 하셨어요. 내 마음이 고민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서 기도하자. 연약한 제자들을 붙들고 올라가셨어요. 나와 함께 기도해다오. 히브리서 5 7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예수님은 감정에 솔직하신 분이었어요. 기쁠 때는 웃으셨고 또 슬프고 어려울 때는 눈물을 흘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어요.

‘Jesus Christ Superstar; 라는 뮤지컬이 있어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히트작인데 놀랍게도 23살에 작곡한 거예요. 천재죠. 그러데 이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는 겟세마네라는 노래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한 뮤지컬이잖아요. 그런데 주의할 것은 가룟 유다의 눈으로 본 예수예요. 뭔가 혁명을 기대하고 그를 좇았던 가룟 유다의 실망과 배신감을 표현한 노래예요. 거기서는 예수님이 실패자로 나와요. 인간 예수, 뭔가를 붙들고 나아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좌절하고 실패하는 예수를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나 겟세마네노래가사를 쭉 읽어보면 우리가 너무나 성경본문을 단순하게 대할 뿐 아니라 그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고난도 우리와는 다르게 쉽게 이기셨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피상적인 이해인가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거기 이런 내용이 있어요. ‘내가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쓴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것을 마시지 않게 해주십시오. 쓴 잔을 마시고 몸이 달아올라서 목이 타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년 전 당신과 함께 시작할 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지치고 너무나 피곤합니다. 지난 3년은 다른 사람이 30년 뛴 것 같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뛰었습니다만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그토록 이제까지 정확하게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를 조금이라도 보여주십시오.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오늘 내가 죽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걸 알려주십시오. 나는 너무나 지쳤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말씀하시지 않겠다면 좋습니다. 그럼 나를 죽이십시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어서 나를 데려가세요.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노래가사를 보면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너무 절절해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데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답을 얻지 못하면 그는 방황하는 사람이에요. 꼭 시험에 떨어져서가 아니에요.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답이 없다. 그게 힘들잖아요. 몇 년 전에 차에서 내리면서 발을 내딛는데 갑자기 다리가 뚝 하더라고요. 그날부터 양반다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이게 뭔가? 몇 달 동안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이게 뭐냐 도대체, 고치는 건 두 번째 문제고 도대체 원인이 뭐냐 그러다가 휴가를 얻어 한국에 나가서 확인한 결과 알았어요. ! 고관절이 문제로구나.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그러고 사는 거예요. 이제 운동하시며 사세요. 그런데 희한하지요 이거는 그냥 끌어안고 사는 거지만 원인을 알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요.~ 그런 거구나. 어쩔 수 없는 거구나. 이건 마음을 다스리고 운동하면서 악화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구나.’ 꼭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원인을 알면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 예수는 이렇게 몸부림치지 않았을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다른 면을 보여줘요. 여기서 끝났다면 그 예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어요.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어요. 그게 바로 아바라는 표현이에요.아바! 아버지여 (Abba, Father)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아바(Abba) 라는 이름이 비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라고 표현했어요. 기도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더더욱 아버지여라고 고백했어요. 특별히 이 본문에서는 역사적 예수께서 실제로 하셨던 표현을 그대로 살리고 있어요. 아바(Abba)라고 부르고 있어요. 아바라는 건 쉽게 말하면 어린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아빠, 엄마는 만국공통어잖아요. ? 아이들이 처음 입을 떼면서 나오는 말이니까. 가장 친밀한 가운데서 부르는 이름이에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게 신앙의 핵심이에요. 참 오래되었어요. 제가 첫 아이를 얻었을 때니까 참 오래 된 거지요. 제가 다가구 주택의 2층 집에 살았는데 아마 그 때가 추석이었던 것 같아요. 아래층에 여러 집이 모여 사는데 난리가 났어요. 싸움이 난 거예요.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여자들이 크게 우는 소리가 나요. 내부계단을 막아놓고 살았는데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일이 크게 터진 것 같아서 내려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1층에 내려가 봤어요. 그랬더니 돌아앉은 셋방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았는데 남자들끼리 주먹다짐을 하고 싸운 거예요. 그 좁은 방 안에서 여자들은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고. 가만히 들어가 보니까 부자가 싸웠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이 싸웠다고요. 30대 중반 된 아들하고 초로의 아버지하고 주먹다짐을 해가지고 아버지가 얻어터져가지고 피를 흘리고 쓰러졌어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머니 제삿날인 거예요. 형제들이 다 모인 거예요. 거기서 시비가 붙은 거예요.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가정을 안 돌보고 방탕하고 속 썩여가지고 엄마가 죽었다 이거죠. 맏아들하고 싸움이 붙은 거예요. 말싸움이 커져가지고 주먹다짐이 된 거예요. 매를 맞아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거예요. 얼마나 민망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너희야말로 아버지와 싸우는 자들이다. 이런 예를 드셨어요. 너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존경한다 하지만 너희의 마음으로는 멀다. 그 증거가 뭐냐. 너희가 고르반이라는 규례를 만들었는데 이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을 고르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걸 하나님께 바칩니다.’ 라고 마음에 서약하면 그건 절대로 다른 일에 쓰질 못해요. 그건 하나님께 바쳐야 돼요.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건 고르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부모를 섬겨야 할 의무를 교묘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피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너희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명을 너희끼리 만들어놓은 규례를 가지고 깨뜨리는구나. 왜 그런지 아느냐 너희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은 그걸 몰랐을까요. 겉을 화려하게 꾸미고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이나 어떤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죠. 그걸 모르면 자꾸 겉을 꾸미려고 해요. 문제는 우리 안에 있어요.

아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부부가 길을 가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만 남편이 신호등도 안 바뀌었는데 후다닥 건너가다가 그만 차에 칠뻔했어요. 운전사가 창문을 내리고 막 욕을 해댑니다. ‘멍청이, 바보한참 떠들고는 휙 하고 가버렸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쫓아와가지고 여보! 당신 저 사람 알아요?’ ‘아니 모르는데.’ ‘아니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이 당신을 저렇게 정확하게 알아요?’ 이거 유머치고는 너무 지나쳐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 정말 악한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멀리 있지 않아요. 우리 가정이 전쟁터잖아요. 상대의 허물을 알면서도 덮어줄 생각을 하지 못해요. 한마디 말에 가시가 있어요.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너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마음이 있어서예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아무리 애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 같아도 그거 다 헛된 거예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신 거예요. 남편이 그런 줄 알고 아내가 그런 줄 알았으면 이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마세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주여!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내가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그럴듯한 신앙적인 수사가 아니에요. 그건 현실이잖아요.

아바라는 고백은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고난이 하나님이 지워주시는 고난이든지 나의 허물과 연약함으로 인해 자초한 고난이든 간에 이 안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고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예요. 우리가 점쟁이가 아닌 이상 내가 뭐 언제 죽을는지 하나님이 알려주시기 전에 알겠어요? 그걸 알려고도 할 필요 없어요. 신앙을 그런 쪽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잘못이에요. 기적을 부인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밤낮 초자연적인 기적을 쫓아가는 것, 그거는 기적을 부인하는 것 못지않게 잘못된 신앙이에요. 이미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알만한 것은 알게 하셨어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오늘 알아서 안 되는 것은 감추어 두셨어요. 만약에 내일 죽는 것을 알면 여러분 어떻게 되겠어요?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어요? 내일 죽더라도 하나님이 딱 감추시니까 오늘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거잖아요. 시한부 선고를 받아야만 두려움을 가지고 그때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하니 그 얼마나 어리석어요. 시한부가 따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약속이 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고 그것을 들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라고 불렀던 거예요. 오늘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5 8절에서 9절을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고 온전함을 이루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고난이 있다는 뜻이에요. 고난이 다 해결되길 기대하지 마세요. 아니 그건 죽는 날까지 가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사는 거예요. 그걸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부드러운 눈으로 보는 거예요. 선생님이 학생들을 부드러운 눈으로 보면 애가 살아나요. 아무리 애가 똑똑해도 선생님이 비판하고 야단하면 곧 죽어버려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기로 작정하셨어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제가 며칠 전에 TV의 한 장면을 보고 ~’ 했습니다. 다 보지도 못했어요. 그 한 장면이 제 맘에 탁 들어왔어요. 88세 맞은 아버지 생신잔치를 하는 거예요. 육남매가 있는데 육남매가 다 보쌈집을 한대요. 모두 모여 아버지에게 절하면서 생신을 축하 드립니다. 한 아들이 용돈 2만원을 드리면서 말해요. ‘아버지, 이거 작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이고 세상에, 저런 날 그래 용돈을 2만원밖에 안 드리나그랬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 형제가 얼마나 우애가 좋은지 몰라요. 아버진 별로 말도  없어요. 많이 배운 분이 아닌 것 같아요. 똑똑한 아버지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를 중심으로 육남매가 하나 같이 사이 좋아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보쌈 썰기 대회를 해요. 각 가정 여섯 집에서 대표가 나와가지고 가슴, 팔에다가 몇 째 집 누구누구 명찰을 달고 보쌈 썰기, 더 재미있는 것은 손주들도 나와요. 우애가 좋더라고요. 거기에 나오는 사람은 유학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고 다 평범한 사람인 것 같고 뭐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거나 재산 물려받은 것 같지도 않아요. 다 어렵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마음을 모아서 행복을 만들어가면서 살더라고요.

여러분,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행복을 구하지 마세요. 이미 다 들어와 있어요. 내 마음이 어두운 거예요. 눈이 어두운 거예요. 눈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러므로 깨어있어 기도하라.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할 때 습관을 좇아 올라가셨다.’ 우리가 연약해요.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전도서에서는 곤고한 일을 겪을 때에 생각하라.’ 기도라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거예요. 아침에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앉아있을 때 생각을 하면서 한번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하나님, 이 일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미 예수께서 죽음의 고난을 아바! 아버지를 부르시며 승리하셨기에 우리의 주님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셔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를 붙들어주셔요. 우리 마음 속에 말씀하셔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종말론적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