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12) Ⅱ.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09

"Ⅱ.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2)"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의 변증②
데살로니가전서 2장 5~12절
석원태 원로목사


Ⅱ.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살전 2:1-20)


1.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회고(살전 2:1-4).

2.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의 변증(살전 2:5-12)

우리는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 자신의 회고, 곧 데살로니가 입성을 회고하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듯이, 데살로니가에서는 ‘많은 싸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말(설교)했다고 했다.
그러한 저들의 권면(설교)은 결코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궤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저들은 하나님께서 옳게 여겨 주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담대히 ‘말하고’, ‘권면’했다고 회고했다.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2장 5-12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 자신의 변증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소극적(부정적) 변증과 적극적(긍정적) 변증으로 나뉘어 있다.

 

1) 소극적(부정적) 변증(살전 2:5-6)
(1) 바울은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을 쓰지 아니했다고 하였다.
여기 ‘아첨’(κολακείας)은 신약에 단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이다. ‘아첨’은 우정을 악용하는 것이다. 사전에는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춤, 또는 그렇게 하는 짓’이라고 했다. 아첨의 말은 자기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마음에는 없는 불성실한 언어와 태도이다.
빈센트(Vincent)는 이 말을 ‘바울은 복음이 수용되도록 하기 위하여 아첨하는 차원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는 현란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가려, 복음이 요구하는 과격한 변화를 수용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여기 ‘아첨의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든 언어와 표정, 행동을 동원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 ‘아첨의 말’은 그 당시 헬라어 수사학자들의 입과 행동에서 매끄럽고, 부드럽고, 간사하게 연출되고 유행되는 불성실한 말들이다.
바울은 그의 설교(권면)가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고 변증하는 것이다. 그의 말 혹은 권면(설교)이 자신의 목적 수단이 되거나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흔히 요사이 유행되는 ‘아첨의 말’ 유의 설교들은 대개가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믿으면 잘되고, 예수 믿으면 가정과 생업이 번성하고, 자녀들이 형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가 말하는 참된 설교는 결코 그런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잘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고 했다(마 5:10-12). 결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말(설교)을 할 때 이런 유의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2)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탈’이란 ‘사물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을 말한다. ‘탐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갖기 위해서 나타내는 열렬한 소망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자기만족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마음과 행동 전부를 위장하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아첨의 말과 가증스러운 탐심의 행위는 전도자의 진위를 판단하는 표준이 된다.’고 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설교(말, 권면)에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서신에는 종종 ‘하나님이 증인이시다’ (롬 1:9, 빌 1:8, 살전 2:5, 10)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서 ‘하나님’이란 말을 다섯 번(2절에 2번, 4절에 2번, 5절에 1번)이나 쓰고 있다. 하나님은 저들의 전도의 힘이 되고, 저들 전도자를 옳게 여겨 주고, 저들을 진실한 전도자로 증거해 주신다고 했다. 그러나 탐심의 탈을 쓴 사람들은 아첨의 말을 하게 된다. 실로 무서운 위선이고 독선이다.

 

(3)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6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했다. 본래 ‘사도’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ambassador)이다. 사도 됨의 자격에는 몇 가지 특색이 따른다. 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동참한 자(행 1:21-22), ②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자(행 1:21-22), ③ 주님을 통해 친히 임명된 자(마 4:19), ④ 특별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는 자(마 10:1) 등이다. 나중에는 더 넓은 의미로 바울과 바나바(행 14:3-5)와 야고보와 주의 형제들(고전 15:7)까지도 포함되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롬 11:13, 갈 2:8, 딤전 2:7).
그러한 사도인 바울은 능히 ‘존중’을 받을 만했다. 이 말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자로서 높이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다」(살전 2:6)고 하였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 4절에서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자신의 사명자로서의 목적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 사도의 직분자체가 자신을 위함도 아니요, 사람을 목적함도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는 사도로서 존중받을 만한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사람의 권위나 명예를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전도자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겸손의 덕’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큰 미덕 중 하나이다.

 

2) 적극적(긍정적) 변증(살전 2:6-12)

(1) 유순한 유모처럼 교회를 보양했다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에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라고 하였다.
‘유순한 유모’처럼 복음 사역을 했다고 하였다. ‘유순한 유모’란 아이를 키우고, 보호하고, 양육함에 있어서 따뜻하고 세심한 마음을 기울였음을 뜻한다. ‘유모’란 뜻이 기르고 보살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게벳은 모세의 친어머니였지만 바로의 궁실에서 유모처럼 되어 모세를 키웠다. 유모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맡아 내 자식처럼 부모를 대신하는 자이다. 유순한 유모는 사람의 희생을 감수한다. 그는 친부와 친모를 대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하였다. 이는 영적 양부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디모데를 향하여는 ‘내 아들’(딤후 2:1),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이라고 불렀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산모(갈 4:19)에 자신을 비유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고 하였다.
모두 하나님의 자기 백성, 자기 양떼를 향한 부성애와 모성애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어쨌든 바울 자신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유순한 유모’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유순한 유모처럼 되어 저들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목숨까지 저들에게 주기를 즐겨했다’고 부언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복음만 전할 뿐 아니라 유순한 유모처럼 되어 저들을 기르고 돌보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이 전도자의 사랑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유순한 유모처럼 목숨을 줄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결코 전도자는 말로만 복음을 전하고 그저 지나가 버리는 행인만은 아니었다.
‘사모하고’, ‘사랑하며’, ‘목숨까지 즐겨 주고 싶은’ 전도자의 유순한 유모 같은 마음, 실로 교회를 향한 전도자의 순정적 사랑의 토로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적 사랑은 사욕을 챙기지 않는다. 이해관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전제나 조건이 없다. 있다고 하면 복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즐겨 내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고전 13:5).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가 경건치 아니하였을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확증함과 같은 것이다(롬 5:8). 전도자가 교회를 사랑하여 유순한 유모가 되어, 자기의 목숨까지도 즐겨 바칠 수 있다고 하면 그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고야 말 것이 아닌가!

 

(2) 밤낮으로 일하면서 자급 전도를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에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고 하였다.
그 당시 노동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어간이었다. 바울의 직업은 장막 만드는 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같은 업을 가졌다고 했다. 그 업은 일종의 장막(천막)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했다(행 18:3).
바울은 그의 일행과 함께 틈을 이용하여 밤낮으로 일했다. 그래서 그 수입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살았다. 그것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살전 2:9) 그리했다고 했다.
나중에 데살로니가 교인 가운데는 예수 재림 소망이 너무 지나쳐서 일하지 않고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의 이러한 노동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살전 4:11-12, 살후 3:7-10). 그 당시는 개척교회의 시대였다. 그 누구도 전도자를 위하여 일정한 생활비를 정해 놓고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본인들이 직접 자급 전도를 감행했다. ‘수고하고 애썼다’고 말하고 있다.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고 했다.
그 후로 교회가 성숙하고 조직을 이루었을 때 교역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게’(행 6:4) 되었다.
불행스럽게도 오늘의 수많은 이른바 전도자들이 경제문제로 그 자신과 교회가 크게 시험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의식주 문제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다. 일꾼이 저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마 10:9-10). 그럼에도 교회운동을 하는 것이 마치 교역자 생활수단인 것처럼 전락하고 변질되어 가는 현실들을 많이 보게 된다. 교회를 자기 생존의 수단으로, 직장으로 여기고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고 있다. 소위 이러한 교역자들의 모습을 많이 본다. 그러나 교역자는 오직 ‘복음으로써 사는 생존의 법칙’을 체득해야만 한다.

 

(3) 부성적 교훈의 권위로 일했다(살전 2:10-12)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유순한 유모처럼 저들을 양육하고 보호함에 있어 자기의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했다.
그런가 하면 저들은 교회를 향하여 부성적 권위를 가지고 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0절에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저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거룩하고, 사람에 대하여는 옳고,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는 흠이 없었다고 했다. 이 일은 하나님도, 너희들도 증인이 된다고 했다.
2장 11절에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하였다. 여기 ‘권면’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선행을 고무시키는 것을 말하고, ‘위로’는 낙심한 자나, 약한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말하고, ‘경계’는 방종한 자에게 내리는 엄한 훈계를 뜻한다. 이것은 ‘유순한 유모’의 모습과는 다른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부성적 모습이다. 전도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나타내야 할 또 다른 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2장 12절에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0-12절은 교회를 향한 전도에 부성적 교훈의 권위를 행사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자기 나라(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이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것은 ‘현재 교회’와 장차의 영광, 곧 천국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런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걸음을 걷게 함’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변증은 소극적으로, 아첨의 탈과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적극적으로는 유순한 유모처럼 교회를 보양하고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자급전도를 했고, 부성적 권위로 저희를 교훈했다고 했다. 이러한 자신들의 변호에 교회도 증인이 되고, 하나님도 증인이 된다고 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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