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13) Ⅱ.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11

"Ⅱ.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3)"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의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6절
석원태 원로목사


Ⅲ.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살전 2:1-20)

 

1.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회고(살전 2:1-4).
2.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의 변증(살전 2:5-12)

3.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살전 2:13-16)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의 영감은 또 한 번 감사로 나타나고 있다.

1) 그 감사의 첫 번째 내용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된 사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다.

저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① 들음으로 받았다고 했다.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라고 했다.
여기서 ‘받았다’는 말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νω)는 외적 곧 객관적 사실을 받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적 수용이다.
② 그 다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했다.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고 했다.
여기에 ‘받는다’라는 말 ‘데코마이’(δ?χομαι)는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앙적 수용이다. 곧 환영하는 내용이다. 영접이다. 저들은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의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③ 그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했다고 하였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이다(히 4:12).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롬 10:17).
말씀이 듣는 자, 곧 믿는 자 속에 역사함은 성령님의 결정적인 역사이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고, 또 들을 수도 있다.
예컨대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사람이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여,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저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다.
아볼로의 교훈을 받은 자들은 성령의 세례와 관계없는 예수를 믿었다. 저들은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중에 저들은 에베소에 온 바울의 복음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다(행 18:24-19:7).
지식적인 신학, 지식적인 설교가 있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고 전하지 않고, 유덕군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르치는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객관적 진리, 즉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관적으로 영접한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인데, 그 믿음의 역사는 성령님의 결정적인 역사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다」(살전 2:13)고 하였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받은 복이다. 저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즉 하나님의 영생권내에 속한 자들이었다(행 13:48)

2) 그 감사의 두 번째 내용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여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감사의 두 번째 내용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도는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고 하였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과 같은 동질성을 말함이다.

무엇을 본받았는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는 실로 죽음에 이르는 핍박과 환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예루살렘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피난생활을 감수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핍박받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교인들이 피난 와서 세운 교회였다. 저들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하였다. 유대인의 대박해의 죄목이 되었다(살전 2:15-16). 그 유대인들의 죄목은 무엇인가?

(1) 유대인들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했다(살전 2:15).
저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친 자들이었다. 누가복음 23장 21절에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하였다.

(2)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쫓아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 「…우리를 쫓아내고…」라고 하였다.
여기 ‘쫓아내다’라는 말은 ‘핍박하다’, ‘괴롭히다’라는 뜻으로 쫓아낼 때까지, 죽을 때까지 핍박했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수없이 한 사람이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일 뿐 아니라, 그 아들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쫓아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4)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 노릇을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라고 하였다.
여기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 보는 이방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선민우월주의 사상’으로 이방인을 개처럼 천시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요 4:26, 34) 보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실로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이다.

(5) 하나님의 세계선교 계획을 도전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세계선교 계획은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 지역을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라고 하였다(행 1:8). 그 대상 온 천하 만민이라고 하였다(마 24:14, 막 16:15).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방해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세계주의, 세계선교계획에 도전하였다.

(6) 자기 죄를 항상 채우고 있다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채움’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의미하였다. ‘죄를 항상 채움’은 앞에서 언급된 저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그 결정적인 심판이 주후 70년 유다가 멸망을 당하여 2000년 세월 동안에 흩어져 살아가는 비운을 안게 된 것이다.

지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 유대의 교회를 본받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 하반절을 보면,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헬라철학자들로부터, 그리고 그 수많은 여러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동일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하고,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내용을 생각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저들은 전도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음으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복음을 들을 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진리를 객관적 사실로 받고, 또 그것을 저들 자신의 것으로 받는 주관적 수용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때 성령께서 저들에게 믿음의 역사를 수반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복음신앙의 진리를 환난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고 수절하여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향한 전도자의 감사는 이렇게도 순수하고 깨끗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 흥함 때문에 감사하였다. 결코 저들의 감사는 세상에서의 부귀공명이 아니었다.

3) 그 감사의 세 번째 내용은 교회가 전도자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살전 2:17-20).

데살로니가전서는 ‘우정의 고전(古典)’이라고 불려왔다. 바로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근거가 우리가 받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에 있다. 물론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는 ‘우정’과 더 나아가 ‘애정’이 넘쳐흐르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그의 감사 가운데 그의 깊은 애정이 이 부분의 성경 가운데서 숨 쉬고 있다. 그의 영감의 기록은 온갖 세기를 거쳐 오는 역사 속에도 구절구절마다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의 고동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자신은 유모와 같고(살전 2:7), 아비와 같다고(살전 2:11) 하는 애정을 실토한 바 있다. 이제 우리가 받은 본문에서 교회를 향한 전도자 바울의 애정의 토로들을 보자.

(1) 얼굴 보기를 열정적으로 힘썼다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하였다.
여기 ‘잠시 떠났다’는 말이 나온다. ‘잠시’는 ‘얼마 동안’의 짧은 기간을 뜻한다. 바울은 3주 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박해자들 때문에 강제 이별을 당한 셈이 된 것이다.
‘떠났다’는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보이는 단어인데, 이 ‘아포르파니스덴테스’(?πορφανισθ?ντε?)는 ‘고아’(?ρφανο?)+‘버려두다’(?πο)의 합성어이다. 지금 사도는 자신을 부모를 여읜 고아로 묘사하였다. 그는 마치 자신을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남아 있게 된 고아와 같다고 했다. 그는 고아가 부모 보기를 갈망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한다고 한 것이다. 그 보고 싶은 정도를 ‘열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힘썼다’고 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자기를 ‘유모’와 ‘아비’ 같은 자로 비유하더니, 이제 교회(성도)를 부모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 부모로부터 떠난 고아에다 비유한 것이다. 정말 교회를 향한 목자적 사랑이 어떠함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고 하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별은 얼굴만 못보는 것뿐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토로하였다.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전 5:3)고 한 말이나,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다」(골 2:5)고 한 말과 맥이 통한다. 결코 저들의 이별은 마음이 아니고 육신뿐이었다. 바울이 어디에 있으나 마음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얼굴까지 보고 싶다고 하였다. 열정적으로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행스럽게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번 두번’이라고 한 것은 ‘몇 번’이라고 생각함이 좋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겨가면서 복음사역을 할 때마다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었고, 교인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하였다. 사단은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떻게 막혔는지 그 내용은 잘 모른다. 바울의 몸이 아파서였는지, 아니면 박해자 유대인들의 간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바울은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교회를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 일을 ‘사단이 우리의 길을 막았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길을 막았다’는 말은 원정대의 진행을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막으려고 진로를 방해했다는 의미이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의 길을 막고, 성도들의 천성 가는 길도 가로막는다. 그러나 그 막음은 오히려 보고 싶은 자를 더 보고 싶게 하고, 만나고 싶은 자를 더 만나고 싶어 하는 열정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복음전도의 길을 막으리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는 바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복음의 대로(大路)가 아닌가!

(2) 주 재림 시에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 여기 ‘그의 강림하실 때’라는 말은 신약에 24번이나 사용되었다. 초림의 예수는 구속사역을 시작하셨고, 재림의 예수는 그의 구속을 완성하러 오실 것이다.
화란 주석가 게할더 보스는 “여기 ‘주 강림’이란 엄숙성과 중대성을 띠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강림의 내용에 수반되는 구속완성과 악인 심판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 믿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야말로 주님 강림하실 때,
① 그의 소망이 된다고 하였다.
즉 사도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저들의 복음전도가 성취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② 그의 기쁨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저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③ 그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
여기 ‘면류관’은 경기장의 고토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씌워 주는 스테파노스(στ?φανο?)를 가리킨다. 예수님 재림의 날에 그 앞에 서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도자들에게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고 하였다. 승리의 상급이 된다고 하였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에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였다. 앞절에서 말한 것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받은 복음선교운동의 내용과 의미와 목적과 그 결과를 다 쏟아놓고 있다. 그가 전도자로서 ‘왜 세상에 왔는가? 왜 사는가?’ 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다 쏟아 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한 예수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야말로 인생성공을 할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예수 재림하는 그때에 가서 비로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의 면류관이 되고,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구원얻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현재에도 전도자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날에 그 결과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의 영광은 복음전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구원받은 성도임에는 틀림없다.
실로 전도자들에게 자기 행위를 하나님 앞에 보증받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의 역풍 속에서도 복음의 불사조가 된 전도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의 별이 있다고 하면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도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함께 주어질 영광의 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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