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5) 신.망.애에 대한 감사 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05

"Ⅱ.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감사(살전 1:2-10)
- 신.망.애에 대한 감사 ②"

데살로니가전서 1장2~10절
석원태 목사


  Ⅱ.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감사(살전 1:2-10) - 신.망.애에 대한 감사 ②

 

  1.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망.애에 대한 감사이다(살전 1:2-4).


  첫째, 「믿음의 역사」(살전 1:3)라고 했다.

  둘째, 「사랑의 수고」이다.
  데살로니가 1장 3절 중에 「사랑의 수고와」(του κ?που τη? ?γ?πη?)라고 하였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더 분석하면, 교회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다스리는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령과 말씀이 주장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인간의 주장이나 사상이 주장되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기도 내용은, 저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구원신앙의 영감에서 나오는 감격적인 선행의 삶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감사내용은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사랑의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포스’(κ?πο?)는 ‘엄청난 노력이 기울여진 고생’을 뜻한다. 앞에서 말한 ‘역사’는 이루어진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 ‘수고’는 엄청나게 지불되고 있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언키 힘든 희생적 대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고’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특성 중에 하나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는 수고’에 비유했다(살전 2:7).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서 말하기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2장 9절에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라고 하였다.

  사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혈통적 단계의 사랑인 ‘스톨게’(stovrgh)가 있다.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filejw)가 있다. 정욕적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rw")’가 있다. 이런 유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이다. 유한적이요 가변적이요 순간적이요 기만적인 것들이 섞여 있다. 결국 육으로 난 육이다.
  그러나 무한한 자기희생을 나타내는 ‘아가페’(ajgaphv)가 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사랑이 없었다. 또 몰랐다.
  예수 밖에 있을 때의 우리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라고 하였다.
  죽은 사람에게는 움직임이 없다. 사랑의 기능이 없다. 죽은 사람에게는 썩은 시체의 냄새만 날 뿐이다. 말하자면 ‘사망의 냄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한 긍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었다(엡 2:4-6).
  우리는 지난날에 죄인 되어 있었다. 경건치 아니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롬 5:8).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 4:9-10).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요 3:16, 고후 5:2).
  사랑의 본질은 수고하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랑의 내용은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는 것은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고’, 곧 힘쓰고 애씀은 사랑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수고를 동반하는 사랑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 사랑을 빼놓으면 우리와 관계가 안 된다. 천사가 사랑을 빼놓으면 마귀가 되고, 사람에게서 이 사랑을 빼놓으면 짐승이 된다고 하였다. ‘사랑의 수고(코포스, κ?πο?)’는 ① 강타를 당함(smite), ② 쓰러짐(down), ③ 고통(suffer)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수고를 하되 ① 자발적으로, ② 감격해서, ③ 겸손하게, ④ 주를 바라봄으로 해야 한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다(모성애). 그래서 여자(女子)보다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는 수고가 있다. 그것은 짐이 아니고 어머니의 어머니 된 특권이요 축복이다. 그래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눈물 속에는 얼마의 염분과 수분만으로 분석되는 과학적 설명 이상의 사랑의 수고가 있는 것이다(감화 감동).
  야곱은 라헬을 사랑한 까닭에 7년의 수고를 수일같이 감수했다(창 29:20). 그렇게 사랑은 긴 것을 짧게 하고, 힘든 것을 쉽게 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즐겁게 감수하며, 심지어 죽음도 이기게 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도 상호 간에 사랑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고 하였다. 저들은 예수 신앙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핍박 속에서도(행 17:1-9)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세상 속의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였다(요 13:34).
  다시 말한다.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에 그 바탕을 두고 일어나는 것이다(롬 5:8).

  그래서 ‘수고하는 사랑’(사랑의 수고)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한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바 된다. 그러나 수고하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 수고하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수고하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나간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 감사와 기도가 나왔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말하고, 기억하고,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역사요 사랑의 수고라고 하였다.

  버나드 뉴만(Bernard Newman)이 불가리아의 한 농가에 있을 때의 일을 전해 주었다. 그가 그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 집의 딸이 드레스에 수를 놓고 있었다. 뉴만은 그녀에게 묻기를 “너는 끝없이 계속되는 그 일에 싫증이 나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때 그녀가 답하기를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나의 웨딩드레스인 걸요.”라고 하였다.
  사랑의 수고에는 언제나 숨은 영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수고에도 피곤이나 싫증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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