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14)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11

"Ⅱ.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3)"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②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6절
석원태 원로목사


Ⅲ. 회고와 변증 그리고 감사(살전 2:1-20)


1.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회고(살전 2:1-4).
2. 데살로니가 전도에 대한 바울의 변증(살전 2:5-12)

3.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살전 2:13-16)
1) 그 감사의 첫 번째 내용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된 사실이다.
2) 그 감사의 두 번째 내용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여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3) 그 감사의 세 번째 내용은 교회가 전도자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살전 2:17-20).

데살로니가전서는 ‘우정의 고전(古典)’이라고 불려왔다. 바로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근거가 우리가 받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에 있다. 물론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는 ‘우정’과 더 나아가 ‘애정’이 넘쳐흐르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그의 감사 가운데 그의 깊은 애정이 이 부분의 성경 가운데서 숨 쉬고 있다. 그의 영감의 기록은 온갖 세기를 거쳐 오는 역사 속에도 구절구절마다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의 고동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자신은 유모와 같고(살전 2:7), 아비와 같다고(살전 2:11) 하는 애정을 실토한 바 있다. 이제 우리가 받은 본문에서 교회를 향한 전도자 바울의 애정의 토로들을 보자.

 

(1) 얼굴 보기를 열정적으로 힘썼다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하였다.
여기 ‘잠시 떠났다’는 말이 나온다. ‘잠시’는 ‘얼마 동안’의 짧은 기간을 뜻한다. 바울은 3주 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박해자들 때문에 강제 이별을 당한 셈이 된 것이다.
‘떠났다’는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보이는 단어인데, 이 ‘아포르파니스덴테스’(?πορφανισθ?ντε?)는 ‘고아’(?ρφανο?)+‘버려두다’(?πο)의 합성어이다. 지금 사도는 자신을 부모를 여읜 고아로 묘사하였다. 그는 마치 자신을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남아 있게 된 고아와 같다고 했다. 그는 고아가 부모 보기를 갈망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한다고 한 것이다. 그 보고 싶은 정도를 ‘열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힘썼다’고 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자기를 ‘유모’와 ‘아비’ 같은 자로 비유하더니, 이제 교회(성도)를 부모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 부모로부터 떠난 고아에다 비유한 것이다. 정말 교회를 향한 목자적 사랑이 어떠함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고 하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별은 얼굴만 못보는 것뿐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토로하였다.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전 5:3)고 한 말이나,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다」(골 2:5)고 한 말과 맥이 통한다. 결코 저들의 이별은 마음이 아니고 육신뿐이었다. 바울이 어디에 있으나 마음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얼굴까지 보고 싶다고 하였다. 열정적으로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행스럽게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번 두번’이라고 한 것은 ‘몇 번’이라고 생각함이 좋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겨가면서 복음사역을 할 때마다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었고, 교인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하였다. 사단은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떻게 막혔는지 그 내용은 잘 모른다. 바울의 몸이 아파서였는지, 아니면 박해자 유대인들의 간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바울은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교회를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 일을 ‘사단이 우리의 길을 막았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길을 막았다’는 말은 원정대의 진행을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막으려고 진로를 방해했다는 의미이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의 길을 막고, 성도들의 천성 가는 길도 가로막는다. 그러나 그 막음은 오히려 보고 싶은 자를 더 보고 싶게 하고, 만나고 싶은 자를 더 만나고 싶어 하는 열정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복음전도의 길을 막으리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는 바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복음의 대로(大路)가 아닌가!

 

(2) 주 재림 시에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 여기 ‘그의 강림하실 때’라는 말은 신약에 24번이나 사용되었다. 초림의 예수는 구속사역을 시작하셨고, 재림의 예수는 그의 구속을 완성하러 오실 것이다.
화란 주석가 게할더 보스는 “여기 ‘주 강림’이란 엄숙성과 중대성을 띠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강림의 내용에 수반되는 구속완성과 악인 심판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 믿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야말로 주님 강림하실 때,
① 그의 소망이 된다고 하였다.
즉 사도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저들의 복음전도가 성취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② 그의 기쁨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저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③ 그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
여기 ‘면류관’은 경기장의 고토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씌워 주는 스테파노스(στ?φανο?)를 가리킨다. 예수님 재림의 날에 그 앞에 서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도자들에게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고 하였다. 승리의 상급이 된다고 하였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에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였다. 앞절에서 말한 것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받은 복음선교운동의 내용과 의미와 목적과 그 결과를 다 쏟아놓고 있다. 그가 전도자로서 ‘왜 세상에 왔는가? 왜 사는가?’ 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다 쏟아 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한 예수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야말로 인생성공을 할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예수 재림하는 그때에 가서 비로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의 면류관이 되고,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구원얻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현재에도 전도자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날에 그 결과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의 영광은 복음전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구원받은 성도임에는 틀림없다.
실로 전도자들에게 자기 행위를 하나님 앞에 보증받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의 역풍 속에서도 복음의 불사조가 된 전도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의 별이 있다고 하면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도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함께 주어질 영광의 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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