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눈을 열어 주소서[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이게 복음이에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6. 18:46

100117 눈을 열어 주소서    설교집Ⅵ <얼굴과 얼굴로> 3-19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1-6)

 

여러분, <더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이란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1965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예요. 오스트리아의 본트랩 대령 가족의 얘기입니다.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요, 요즘 아주 세상이 좋아져서 DVD로 나올 뿐만 아니라 뒷이야기들을 또 하나의 DVD로 담아서 내어놓은 작품이 있어서 뒷이야기까지 다 보았습니다. 그러데 그 영화가 제법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어요. 그 노래들이 얼마나 마음에 다가오는지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내용을 다 알고 계실 거예요. 수녀원에 들어가서 견습 수녀로 지내고 있는 마리아 라는 처녀가 좌충우돌 수녀원에서 여러 가지 해프닝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수녀원장의 권고로 본트랩 대령의 일곱 자녀의 가정교사로 가서 일을 하게 되어 수녀원을 떠납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개구쟁이 일곱 자녀들과 부딪히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녹여내고 노래로 묶어내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대령의 교육방침과 마리아의 교육방침이 너무나 달라서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하게 돼요. 그러다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 두 사람에게 각각 변화가 일어납니다.

대령은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오스트리아가 2차 대전 직전에 독일에 병합되었어요.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합되듯이.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의 위기를 목격하고 좌절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내는 죽고 나라는 이토록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 세운 것은 엄격한 규율이었어요. 그래서 자녀들을 부를 때도 피리로 불러요. 그 음을 달리해서. 자녀들이 군대식으로 뛰쳐나오도록. 또 노래하지 못하게 해요. 지금 엄마가 죽고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노래를 하다니! 거부하는 거죠. 그런데 마리아가 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대령이 어느 남작 부인과 재혼할 계획을 가지고 비엔나로 떠나있는 한 달 동안에 아이들을 데리고 산과 들로 다니면서 노래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대령이 남작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이들이 남작부인을 위하여 더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것을 지나치다가 우연히 듣게 된 대령이 그 방을 향하여 가까이 나아갑니다. 문에 귀를 대고 노래를 듣습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불렀던 그 노래를 자기도 모르게 부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빠와 아이들 사이에 처음으로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실제로 그 배역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플로머 라는 배우는 애들을 싫어했답니다. 아이들이랑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렇지요. 아이들이 어떻게 딱 맞는 연기를 하겠어요. 짐짓 차갑게 대했는데 그날 그 시간 아이들과 노래하는 장면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뜨거움이 있었고 아이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보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들을 냉정하게 대하는 그 배우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었는데 같이 노래를 하는 중에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그를 받아들였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과거의 일에 지금 대령의 마음이 묶여있어요. 시간이 정지되어 있어요. 세상은 변화되고 있는데 나의 의식은 그 사건에 완전히 고착되어 있어요.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사랑의 노래였다는 말입니다.

또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겠다고 수녀로 서원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잠깐 동안이지만 가정교사로 와서 좌충우돌 부딪히는 가운데 그만 대령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두려움을 가지게 돼요.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 황급히 수녀원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수녀복을 입고 기도하려 하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요. 너무나 괴로운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수녀원장이 마리아를 부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어봅니다. 사랑의 사건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수녀원장이 말합니다. ‘마리아! 수녀원은 결코 도피처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자는, 꼭 수녀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자리만 거룩한 자리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과 꿈을 따라서 세상으로 나아가서 당신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서 사랑을 펼치고 사랑을 이루면서 사는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에요.’ 마리아의 생각을 활짝 열어줬어요. 마리아는 공간에 매인 사람이에요. 교회만이 거룩하고 수녀원만이 거룩하고 기도하는 골방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는 모든 곳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그 가운데에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마리아가 그 집으로 다시 되돌아가잖아요. 그리고 결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1939 2차 대전 직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정식으로 병합해버리면서 위기가 닥쳐와요. 해군 대령출신이었기 때문에 독일 해군의 징집명령을 받아요.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핍박이 올지 몰라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용기를 내서 가족과 함께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탈출하는 과정 속에 야외음악당에서 있었던 한밤의 음악회에 참여하고 노래하는 거죠. 거기에 에델바이스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에델바이스는 알고 보니까 오스트리아 민요가 아니래요. 그 영화를 위해서 특별히 로저스와 헤머스타인이라는 작곡자가 그때 만든 노래예요. 그런데 전 세계로 노래가 퍼지면서 우리는 다 오스트리아 민요구나 했던 거예요. 어느 정도로 헷갈렸었느냐 하면 미국 백악관에서 오스트리아에서 대통령이 왔을 때 환영한다고 에델바이스를 노래했다는 거예요. 백악관마저도 헷갈릴 정도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잘못 알고 있는 거지만 그 영화를 위해서 만든 거예요.

여러분, 사랑에 눈떠야 돼요. 이것이 나와 내 가정에 닥친 고난을 극복하는 지름길이에요. 사랑에 눈뜨는 거예요.

눈뜨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헬렌 켈러 아시죠? 그분이 88세를 살았습니다만 생후 19개월 때에 앓았던 열병으로 인하여 시각과 청각을 잃고 평생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각과 청각장애인으로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되었고 더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간절한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그 간절한 소원을 고백합니다. ‘사흘만이라도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유명한 글이 있어요.

만약에 내가 사흘만이라도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아침에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고 도와주던 설리반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그의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고, 그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고, 나를 도와주던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낮에는 산과 들로 나아가 그 자연을 돌아다니고 노래하며 춤추고 싶다. 그리고 저녁엔 저녁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먼동이 터 오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아침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밤에는 보석같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아침에 거리에 나아가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다. 그리고 오페라를 감상하고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마지막 저녁에는 거리에 나아가 네온이 반짝이는 다양한 가게들을 들여다보고 아름답게 포장된 상품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눈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다시 영원한 어둠으로 돌아가겠다.’

오늘 욥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하나님에 관하여 귀로 듣기만 했습니다. 이제 내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정말 욥의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욥기 1 1절을 보면 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방에 그와 같이 순전純全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난 사람이 없었다.’ 신앙의 모델이란 말이에요. 어떤 신앙의 모델이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의 모델이에요. 유대인의 전통신앙이라는 것은 신명기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네 집의 모든 것이 복을 받고 네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네 육축이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을 받으리라.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앉으나 서나 들어오나 나가나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라는 것이죠. 네가 노력한 대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게 인과응보의 신앙이에요.

욥은 이런 기준에 아주 철저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들딸들이 모여서 잔치를 한 다음날에는 반드시 아들딸들의 수만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행여라도 우리 아들딸들이 말이나 마음으로나 행실로 죄를 범했을까 두려워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욥에게 고난이 왔어요. 욥기 1 2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욥의 모든 소유를 다 거둬가셨어요. 그 많던 재산을 다 거둬가셨어요. 심지어는 아들딸들의 목숨을 다 거둬가셨어요. 기가 막힌 거죠. 그러나 욥은 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 보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는 자도 하나님이시요 이 세상에 올 때 내가 벌거숭이로 왔으니 하나님이 다 취해 가신다 한들 내가 어찌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을 내가 다 온전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영광을 받으십시오.’ 하고 찬송을 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따라갈 수도 없는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에요.

그런데 고난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한번 더 왔어요. 욥에게 질병으로 왔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어서 기왓장 깨진 것을 가지고 몸을 긁어야 할 정도로. 보다 못한 그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당신의 믿음을 지키려 하느냐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그때 욥이 말하잖아요. ‘왜 그렇게 불신앙적이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가.’ 그리고 성경은 말해요. ‘욥이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간의 변화가 생겼어요. 아까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했는데 지금은 찬양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아내가 몸부림치면서 외쳤던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던 말은 알고 보면 그것은 욥의 내면의 몸부림이었어요. 그것을 애써서 감추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것을 다 숨길 수 없었어요. 드러나고 있어요.

드디어 욥기 3장에 가보면 욥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탄식하며 드디어는 자기의 싦을 저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구들이 와서 욥을 위로하다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틀림없이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 아니냐.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너의 죄를 고백해라.’ 그 말에 욥이 그만 분노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s가 이렇게 참고 인내하고 찬송했는데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면서 친구들과 신앙논쟁을 하게 됩니다. 끝내 논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친구들을 야단하셨어요.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고난 당한 자에게 훈수를 두는구나 하고 야단하셨어요. 그러면서 욥을 칭찬하셨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어요. 욥에게 물으셨어요. ‘내가 세상을 지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내가 눈을 쏟아 내리는 눈 창고를 네가 본 적이 있느냐. 저 흉하다고 하는 악어나 하마 같은 동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네가 제대로 알고 있느냐.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한 손에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참 모습을 네가 알고 있느냐.’ 오늘 욥이 말해요. ‘하나님 이제까지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하나님에게 어서 나타나셔서 나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나의 교만이요, 나의 무지였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은 말이에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규범 안에 하나님을 끌어넣어서 그 안에서 우리 마음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욥의 결정적인 실수, 욥의 결정적인 무지, 욥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가 이제까지 지켰던 신앙의 틀 안에 가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기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에게 나타난 십자가 사건은 마치 나의 행위에 따라서 응답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인생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저는 목사로서 여러 가지 목회훈련을 받다가 잊을 수 없는 결정적 경험을 했어요.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불이 번쩍 했어요. 제가 여러 번 말씀 드렸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사랑은 아름답다.’ 이것은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하는 고백이에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이것은 도덕과 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이게 복음이에요. 내 신앙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사랑은 아름답다. 이것은 추상에 머무르는 거예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힘이 나오지 않아요. 사랑하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온전한 사랑의 힘은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라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예뻐서가 아니에요. 내가 잘 나서가 아니에요. 내가 도덕적으로 반듯해서도 아니에요.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 사랑을 발견하고 응답할 때 우리 삶의 눈이 열리는 것이지요.

이걸 깨닫지 못하고 살았어요. 고난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눈이 열릴 때,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과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잊혀지기 위해서 산 사람 Live to be forgotten>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가지고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인데 잊혀지기 위해 살았다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100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단체는 중국을 위한 선교단체였어요. 중국내륙선교회 이었어요. 허드슨 테일러 라고 하는 사람이 평생 세우고 가꾸어놓은 선교단체였어요.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 70살이 다 되어 건강이 상해서 더 이상 이 일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 후임을 정하게 돼요. 그때 약 1,000명의 선교사들이 이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가 선택한 후임자는 그 선교단체에 가입한 순서로 보면 225번째, 40살도 안 된 사람을 후임으로 선정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 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호스트예요. 그 호스트가 35년 동안 2번째 총재가 되어서 그 선교단체를 이끌어갔던 거예요. 다들 깜짝 놀랐어요. 그 앞에 많은 쟁쟁한 선배들을 다 제치고 왜 저 사람이 선택되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호스트는 사랑과 겸손과 절제를 아는 사람이었고, 선교의 대상이었던 중국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이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 선교사들을 섬기는 사람이었던 것이에요. 호스트라는 사람이 22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지원했을 때 면접을 보지 않았겠어요? 누군가 추천서를 써주어야 돼요. 그 추천서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가? 그런데 추천을 부탁 받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라고 썼어요. 그 사람들은 또 솔직하니까 그렇게 써준 거지요. 과연 선교사로서 성격이 적합한가? ‘잘은 모르겠지만 딱 맞는 것 같지 않다.’ 그는 과연 진취적인가?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 과연 그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보는가? ‘성경지식은 있는 것 같으나 아직 신앙은 어린 것 같다.’ 그가 과연 선교사로서 적합한가? ‘내가 틀릴지는 모르나 아닌 것 같다.’ 이게 선교사로 지원할 때 그가 받은 평가였어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총재가 될 때까지 약 25년 동안 꾸준하게 성장했어요.

놀랍게도 별로 그는 자기 글을 남기지 않았어요. 자기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어요. 숨었어요. 애써서 문서를 뒤져가며 그의 일화를 찾아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동료와 함께 중국에 들어갔어요. 중국 상해에 본부가 있었는데 가장 먼 산시성으로 파송 되었어요. 거기 가서 유학자 출신의 중국인 목사님 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스미스라는 동료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료가 그곳에 먼저 들어가서 터를 닦아놓고 나서 호스트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스미스가 판단할 때 우리가 같이 들어오긴 했지만 이 지역에 대해서 그래도 내가 먼저 왔으니 최종적인 결정권은 내게 있다. 이게 스미스의 생각이었어요. 호스트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그가 나보다 분명 말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좋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국에 같이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최종적인 결정권을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가. 너무 힘들고 괴로웠어요. 그러다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어요.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이후에 진정 내 마음에 평안이 왔다. 그 선교사역의 일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선교사의 장점을 칭찬해주고 그가 잘하는 것을 축하해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명령하면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우린 그저 명령하는 사람이 높은 사람, 잘난 사람, 위대한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질과 성격과 환경과 모든 것을 아시기에 일을 나누어주신 것 뿐이에요.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자기는 기도하는 자리에 늘 있는 거예요. 그는 말합니다. ‘완전히 곪기 전에는 종기를 짜지 말라. 괜히 그것을 건드려봐야 성나고 아프기만 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섣불리 그 문제를 자기의 지혜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충분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자.’

그는 사명에 눈뜬 사람이에요. 허드슨 테일러가 30여년 평생을 들여서 만들어놓은 선교회의 틀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았어요. 어느 조직에서나 후임자로 가는 것이 어렵잖아요. 잘못하면 전임자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개혁을 부르짖게 되잖아요. 때로는 그것이 옳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호스트는 잊혀지기 위해 산 사람인양 그렇게 살았어요.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요. 서양사람들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 수만 명이 죽었어요. 특별히 그 가운데 가장 큰 선교단체였던 중국내륙선교회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80명이나 희생돼요. 많은 선교단체들이 다 철수하고 있을 때에 호스트는 그 위기 속에서 후임자가 되고 그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집중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오히려 이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이곳에 들어올 200명을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요. 놀랍게도 200명의 헌신자들이 중국을 향해 다시 찾아옵니다. 시대적인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극복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 라고 하는 분명한 증거와 확신이 있기에 나 자신의 문제거나 가정의 문제거나 심지어 시대의 고난과 위기까지도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눈을 열어주소서. 새해 벽두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제목이에요. 눈을 열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