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20) 실천적 성화생활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18

교회를 향한 교훈(살전 4:1-5:28)</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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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실천적 성화생활(살전 4:1-12)


- 더욱 많이 힘쓰라 -</span><br>
<span class="t2">
1. 개인적인 ‘도덕적 성화생활’(살전 4:3-8), 곧 ‘거룩함’이다.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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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형제 사랑에 더욱 힘쓰라고 하였다(살전 4:9-10).</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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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영감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기독교만이 최선의 종교라는 사실을 입증해 줌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리려 하고 있다.<br>
그것은 결코 말이 아닌 행위이고, 웅변이 아닌 생활이라고 하였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저들에게 들려줄 결정적인 복음 설교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활이 바로 예수를 알려 주는 첩경이 된다고 하였다.<br>
그 사실이 ‘더욱 많이 힘쓰는’ 그리스도의 성화생활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거룩한 생활’인데, 곧 ‘일부일처주의’라고 하였다. <span class="b1">「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아는」(살전 4:4) </span>도덕적, 윤리적 생활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사실상의 설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살전 4:3).<p>

그 다음에 ‘더욱 힘써야 될 성화적 삶’은 ‘형제 사랑’이라고 하였다.<br>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 <span class="b1">「형제 사랑에 관하여는…」</span>이라고 하였다.<br>
여기 나오는 ‘형제사랑’(φ?λαδελφ?α?)은 ‘사랑’, ‘우정’이란 단어 ‘필리아’(φ?λ?α)와 ‘형제’라고 하는 단어 ‘아델포스’(αδελφ??)의 합성어로 ‘형제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동일한 기업의 후사가 된 영통 형제관계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span class="b1">「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span>고 한 경우이다.<br>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서 예수님은 <span class="b1">「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span>고 하였다.<br>
여기 <span class="b1">「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span>은 첫째,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는 영생구원(요 6:39) 곧 마지막 날의 부활이다. 둘째, ‘너희의 거룩함’(살전 4:3), 곧 새 생활이다. <br>
그래서 이 ‘거룩함’은 ‘형제애’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사실상 아가페(?γ?πη) 사랑에 근거한 새 형제애를 가리킨다. 결코 이 형제에는 혈연이나 국가적, 민족적 동맹관계에서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p>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믿는 자끼리 사랑하는 형제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성적(性的) 거룩함과 정결함에 대한 권면이나 다음에 뒤따르고 있는 노동에 관한 권면(살전 4:11-12)과는 전혀 다르게 형제사랑에 대하여는 쓸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br>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저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그때 벌써 형제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 중에 <span class="b1">「…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span>고 하였다. <br>
저들은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로 바울의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 같은 성령의 역사로 함께 믿게 된 새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적 우리의 경험이다.<br>
불신앙의 사람이 가족과 혈통, 사회적인 여러 유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인생의 엄청난 새로운 변화를 입을 때, 그 은총의 변화(입신)를 입은 사람들끼리 새로운 형제가 됨을 느낀다. 그리고 동질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br>
또 하나는 저들이 직접 그 형제사랑을 몸소 행동으로 옮긴 사실에서 나타났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0절 상반절에 <span class="b1">「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span>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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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한 대로 데살로니가는 북쪽 마게도니아의 수도였다. 그 여러 지역 교회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를 향한 믿음의 역사와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수고(살전 1:3)가 이미 소문이 나고, 그 영향력이 퍼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보면 그 후에 데살로니가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탄생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것만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 베뢰아 교회 등이다. 그 후에 또 더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을 것이다.<br>
저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사랑은 먼저 ① 주 안에서의 뜨거운 기도와 위로, 격려, 용서의 교제로 나타나고, ② 더 나아가 물질적 구제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러한 실천적 사랑의 행동들이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실로 용기와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에 대하여는 더 쓸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p>

그럼에도 사도는 이 부분 마지막에 <span class="b1">「…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살전 4:10b)</span>라고 하였다. 결코 형제사랑은 어떤 한계가 있거나 멈출 수 있는 도달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형제사랑은 식어질 수 있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span class="b1">「…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살전 4:10b)</span>라고 함으로 멈출 줄 모르는 형제사랑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있다. <br>
더 많이 사랑해야 된다고 하였다. 더 많은 사랑의 희생, 더 많은 사랑의 수고, 더 많은 사랑의 성장을 요구한 것이다. 결코 형제사랑은 중단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형제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br>
이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 계명이다(요 13:34). 이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요한일서 4장 7-8절에 <span class="b1">「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span>고 하였다. <br>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공동체는 ‘형제사랑을 더 많이 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연합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심방하고, 위로하고, 구제하고, 권면하고, 교훈하는 것이다. <br>
사도 바울은 거룩한 정결운동에 ‘더욱 많이 힘쓰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살전 4:1). 그리고 ‘형제사랑’에도 ‘더 많이 하라’고 하였다(살전 4:10). 이것이 바로 성화적 삶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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